* * *
잿빛 안개에 둘러싸인 신전은 처음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풍겼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북부의 음침하고 미스터리한 미궁 같은 분위기가 흘러넘친다.
“아앗, 부인. 마침 잘 오셨습니다!”
과일 바구니를 껴안고 연무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계단 한쪽에 걸터앉아 검을 손질하던 앤디미온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이스케의 생일 연회 날 본 나의 창피한 몰골은 죄다 잊었다는 기세라 좀 고마워졌다.
그런데 마침 잘 왔다니?
“안녕하세요, 앤디미온 경. 무슨 일이 생겼나요?”
“예? 아니요, 아무 일도 안 생겼으니 염려 마십시오. 그냥 반가워서 드린 말씀입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그냥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이건가?
“이스케 경을 보러 오신 겁니까?”
“네. 과일 하나 드시겠어요?”
“와, 감사합니다. 마침 갈증 나 죽을 지경이었거든요.”
나는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고 앤디미온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쿵, 쿵 하고 바닥이 울리나 싶더니 이윽고 웬 거대한 팔라딘 하나가 우리 쪽으로 가까이 진격해 왔다.
피처럼 검붉은 머리카락과 살벌하게 번득이는 호박색 눈,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살결과 우람한 덩치의 조합이 몹시 위협적이었다.
나직하게 내뱉는 음성 역시 매우 걸걸하니 섬뜩했다.
“과일입니까?”
“……하, 하나 드릴까요?”
성난 불곰 같은 외양의 팔라딘은 대답하는 대신 바구니에 담긴 복숭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콰직!
그러더니 매우 맛있게 깨물며 다시 쿵쿵 연무장 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자니, 앤디미온이 머리를 긁적이며 묻지도 않은 설명을 해주었다.
“제 형입니다.”
“아……. 듬직한 형을 두셨네요.”
“그건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지능이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라서요.”
그렇군. 내 보기엔 너희 모두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빠진 것 같은데.
“그보다 부인, 저쪽 좀 보십시오. 이스케 경이 대련 중이십니다.”
“대련이요?”
“예. 오 대 일입니다. 아, 물론 경께서 일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앤디미온과 나란히 앉아 사이좋게 과일을 깨물며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다섯 명의 동료에게 둘러싸인 남편 놈이 이윽고 연푸르게 빛나는 성검을 휘둘렀다.
이얏!
번쩍하는 파동이 이쪽까지 날아왔다.
“꺄아악! 너무 멋있어요!”
“과연 제 상관이십니다!”
“파이팅! 힘내요 우윳빛깔 우리 남편!”
“우윳빛…… 아무튼 파이팅입니다! 파이팅!”
난 열성 팬 컨셉이니 그렇다 치자. 앤디미온 얘는 대체 뭘까.
손뼉을 쳐 대며 열렬히 꺅꺅대는 우리를 근엄하고 진지하신 팔라딘들이 어떤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는지는 굳이 표현하고 싶지 않다.
아무튼 간에 저 대련을 빙자한 양민학살은 금세 싱겁게 끝이 났다.
콰직!
쓰러진 동료들 위로 거칠게 투구를 벗어 던진 이스케가 곧바로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매우 살벌하여 우리는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떠들어 댔다.
“와, 역시 북부 최고의 기사 타이틀은 아무나 다는 거 아니네요.”
“그렇습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괴수가 따로 없으십니다.”
“제 고향 기사들은 맥도 못 추겠어요, 진짜.”
“역시 제 우상이십니다. 하하하하핫……. 으아악!”
퍽!
말 그대로 날아오듯 튀어온 아이반 경이 앤디미온의 까만 머리통을 사정없이 후렸다.
아무래도 아이반 경의 취미는 종자들 쥐어 패기가 틀림없었다.
“이 새끼야, 넌 우리가 진땀빼고 있는데 혼자 처자빠져 늘어져서 과일이나 처먹고 꺄륵대고 싶냐? 어?”
“아으으…… 하, 하지만 저는…….”
“하여간 요즘 애새끼들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말이야, 틈만 나면…… 오셨습니까, 부인. 오늘은 언제 오시나 싶었습니다.”
그거 무슨 뜻이죠. 기분이 좀 이상했으나 나는 개의치 않고 방긋거렸다.
“앤디미온 경께선 제 말동무를 해주고 계셨던 거예요.”
“말동무라고 보기엔 좀 무리가 있었습니다만. 그리고 이 새끼 경 아닙니다. 부인께 뭐라고 사기를 쳤는지 몰라도 아직 찌질대는 종자 새끼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어이, 안 그러냐?”
“그, 그렇습니다. 그냥 앤디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
“뭐? 앤디? 애앤디? 너 지금 네 상관 부인한테 꼬리치냐?”
“예? 제, 제가 어찌 감히…….”
“지랄들을 떨어라.”
내 말이 그 말이란다. 역시 부부는 통한다더니. 호호…….
손등으로 땀을 훔치며 다가와 툭 던진 이스케가 멀뚱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안녕하세요.”
“…….”
“있죠, 방금 진짜 멋있었어요. 이미 반했지만 또 반한 것 같아요.”
그러니 우리 진도 좀 빼는 게 어떠하니? 응?
“넌 이리 와 새끼야.”
“아아니, 왜 저를 자꾸…….”
아이반 경이 앤디미온을 질질 끌고 가준 덕에 아름드리 계단에는 나와 남편 놈 둘만이 남았다.
보아하니 이스케는 자신의 종자가 입 더러운 친구에게 작살 나든 말든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저어, 혹시 제가 방해가 됐나요?”
“알긴 아는 모양이네.”
한결같이 야박하게 대꾸한 녀석이 건틀렛을 벗어서 한쪽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러더니 웬일인지, 내 발치의 계단 칸에 걸터앉아 과일 바구니로 손을 뻗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며 이스케가 과일을 베어 물고 씹는 소리만 울렸다.
콰직. 와자작.
미끈한 턱이 움직일 때마다 땀방울이 맺힌 관자놀이가 같이 움찔거린다.
슬그머니 손을 뻗는데 놈이 나를 힐끔 돌아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얼어붙는다.
히익, 도도한 것.
“뭐 해?”
“땀 닦아드리려고요.”
흑심을 감추려 기를 쓰며 배시시 웃자 놈이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들켰나?
“지저분하다.”
“하지만 저 아까 손 깨끗이 씻고 왔는걸요.”
“네 손 두고 말한 게…… 이런 제기랄.”
또 뭐에 짜증이 나셨는지 혀를 차며 눈길을 돌려버리는 도도하신 남편 놈이었다.
아아, 어렵다, 어려워.
그 다사다난했던 생일 연회 이후 칩거령도 풀어주고 약간은 덜 야박한 분위기가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놈은 여전히 내게 있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대체 심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좀 알 수 있으면 좋겠다.
휴, 그래도 이만하면 꽤 많이 발전한 것이니.
조금은 희망차게 행동해도 괜찮지 않을까? 적어도 처음처럼 내게 바구니를 던져 버리진 않고 있잖아.
“있잖아요.”
“왜.”
“아버님께서 돌아오셨어요.”
“아버지? 아.”
‘아’는 또 뭐니 ‘아’는. 집 나갔던 개가 돌아왔어도 그런 성의 없는 반응은 아니겠다, 얘.
“저어, 그런데 아버님께서 좀 화가 나셨어요.”
“흠, 그 양반은 원래 항상 불만투성이야.”
홱 하고 씨앗 부분을 내던진 녀석이 다른 과일을 뒤적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갑자기 암울해졌다.
역시 무서워! 한 손으로 날 박살 낼 것 같은 놈한테 어떻게 그렇고 그런 짓을 하자고 해!
“너 말이야.”
“네, 네?”
“아까부터 표정이 굉장히 독특한데…….”
“제가요?”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나?”
“사랑의 천사께서 지켜보고 계시지요.”
손을 양 뺨에 갖다 대며 두 눈을 초롱초롱 뜨자 잠시 정적이 내렸다.
이스케는 말 그대로 영혼이 나간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왠지 한 대 맞을 것 같은 분위기라 나는 그만 손을 슬쩍 내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 내가 생각해도 좀 너무 간 것 같다…….
“머리통을 열어 보고 싶을 지경이군.”
“잘못했어요. 실은 아버님께서 너무 노여워하셔서 어찌해야 할지…….”
“내 아버지가 뭘 잘했다고 너한테 화를 내?”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투였다. 혹시나 싶어 머리통을 꼭 감싼 팔을 잡고 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질끈 감은 눈을 슬며시 떴다.
“뭐라고 했는데, 그 양반이.”
“제가, 저희가 진정한 부부로서의 의무를 아직까지도 안 치렀다고…….”
“그게 뭔데.”
뭐야 이 대답은. 일부러 비꼬는 건가?
“저희가, 진짜 부부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그거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이스케는 정말로 의아하다는 표정이었고, 따라서 나는 잠깐 당황했다.
뭐야, 이거. 설마…… 아닌데, 얘 그런 종류의 순진한 금욕주의자 타입은 아닌데. 모를 리가 없는데.
꼭 내 입으로 그걸 직설적으로 말해줘야 알아먹을 작정이니?
“처, 첫날밤이요.”
“첫날밤이 뭐……. 아.”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아’ 한 녀석이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 내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지?
꼭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게 해야만 했느냐, 이 야박한 놈아!
나는 마른침을 연거푸 삼키며 남편 놈의 표정을 슬슬 살폈다.
이스케는 의외로 무덤덤한 얼굴로 과일들을 뒤적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게슴츠레 뜬 눈가에 왠지 모를 어수선한 냉소가 깃든 느낌이라 좀 걱정스러워졌다.
“물론 저야…….”
“신경 쓸 거 없어.”
“네?”
“신경 쓸 거 없다고. 내 아버지가 뭐라고 떠들든.”
그렇군. 신경 쓸 거 없군. 너야 네 아비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나는 아니라고 이 도도한 놈아!
게다가 난 너와의 진도에 중대한 생사의 기로가 놓여 있단 말이야.
“그, 그치만 저는…….”
“왜 새삼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군. 네가 그런 걸 바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너의 한결같은 야박함에 경의를 보내고 싶구나.
물론 내 입으로 떠든 말이니 반박할 순 없다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거랑 의무를 다하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지 않니!
이렇게 물러날 순 없어.
어차피 난 영혼까지 털어서 이놈을 구워삶을 각오를 마친 뒤였다.
왜냐하면 내 유일한 지푸라기가 바로 이놈이니까. 제기랄.
“미안해요. 당신이 싫어하실 거란 거 알면서……. 전 그냥, 어쨌든 당신 아내가 된 이상 할 도리는 다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어차피 아무 도움도 못 되는 쓸모없는 애물단지라는 거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고 나면…….”
콰지직.
놈이 노란 배를 한입에 반쯤이나 되게 베어 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마디만 더 하면 나를 저 배랑 똑같이 만들어주겠다는 뜻인지 계속해보라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 다들 조금은 저를 덜 나쁘게 보시지 않을까 해서…… 그러니까 제가 워낙 경력이 화려하잖아요.”
“…….”
“제가 집에 돌아가기 싫다고 말했던 거, 진짜 거짓말 아니에요. 전 진짜 다른 거 바라는 거 없어요. 그냥 당신이 너무 좋아서, 근처에만 있게 해주시면…… 당신이 정 저를 더 못 봐주시겠다면, 다른 더 좋은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시면 그땐 어쩔 수 없지만, 전 그게 당신 뜻이었으면 좋겠어요. 이번만큼은 제 가족들의 의사대로가 아니라요.”
최대한 애절하게 말을 잇고 나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이스케는 여전히 으적으적 과일을 씹으며 나를 묵묵히 노려보기만 했다.
붉은 눈동자가 번득거리는 모양이 심상치가 않았다.
내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중인가?
“절대 성가시게 질척대지 않을게요. 손해 보시는 거 하나도 없을 거라고 약속할게요. 당신이 원하시는 때 언제든 바로…….”
“넌 집에 돌아가기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네.”
응? 왜 갑자기 딴소리니? 핵심이 그게 아니잖아.
“그거야 당신이 여기 계시니까…….”
“정말 그런 이유뿐인가.”
혼잣말을 하는 투로 중얼거린 남편 놈이 배의 씨앗 부분을 다시 저쪽으로 홱 던졌다.
쓸데없이 드라마틱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아니, 이 도도한 것이 그동안 내가 얼마나 지극정성을 다해 열성 팬 노릇을 했는데 나의 팬심을 의심해?
내가 그 창피를 당하면서까지 생일 선물도 꿋꿋이 조공했거늘 이런 의심이라니!
내 연기력이 아직 턱없이 부족한 거였나? 메소드급이 아니었어?
“저는…….”
“그래. 좋아.”
그가 손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순간 반쯤 얼이 빠져서 놈을 멀거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네 말이 맞아. 너랑 일을 치르고 나면 신성하신 장인어른이라 해도 간섭할 수 없게 되겠지.”
“…….”
“너,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아, 그렇고 말고! 나는 곧바로 세차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이게 웬일이야, 적어도 며칠은 공을 들여야 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냉큼 이런 반응이라니!
내 열렬한 반응이 무색하게도, 도도하신 금욕주의자 남편은 무슨 심보인지 모를 무덤덤한 얼굴을 유지할 뿐이었다.
“마음이 바뀔 것 같으면 지금 말해. 네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는 지금 한 번뿐이니까.”
“전…….”
“이번이 마지막이야. 한번 일을 치르고 나면 돌이킬 수 없게 돼. 나는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어.”
겨, 경고하는 건가? 나중에 딴소리하면 어떤 짓이라도 해주겠다고? 널 만난 이상 난 이미 돌이킬 수가 없어, 이놈아!
이스케가 내키는 대로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면, 나 또한 살기 위해선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아, 우리 이렇게 보니 의외로 잘 통하는 것 같구나?
“절대절대 마음 바뀔 일 없어요.”
양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다짐하자 다시 한번 짧은 침묵이 스쳐 갔다.
두 눈을 열정적으로 반짝거리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이스케의 얼굴에 언뜻 복잡한 표정이 어린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오늘 밤 보자고.”
하고 툭 던진 녀석이 몸을 돌림과 동시에 나는 용수철처럼 팔짝 몸을 일으켰다. 우와.
“진짜요? 진짜 진짜 오늘 밤이에요?”
“…….”
“앗, 죄송해요. 너무 기뻐서…… 그럼 제가 당신 침실로 찾아갈까요? 아니면 당신을 기다리는 편이 나을까요? 역시 제가 찾아가는 편이 낫…… 꺄아악!”
순식간에 나는 또다시 독수리 발톱에 꿰인 병아리 신세가 되어버렸다.
괴수 같은 남편 놈은 나를 한 팔로 짐짝처럼 안아 든 채 그대로 마차를 세워둔 곳까지 직행하여 닭장에 병아리를 가두듯 나를 마차 속에 집어넣었다. 으악!
“아무 짓도 꾸미지 말고 가서 낮잠이나 푹 자 두지 그래.”
저 인정머리 없는 타박을 마지막으로 마차 문이 세차게 닫혔다.
야, 이 한결같이 도도한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