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북풍의 서커스 (1)
누가 그놈 탄신일 아니라고 할까 봐, 이스케 녀석의 생일이 지나자마자 에렌딜은 순식간에 잿빛으로 물들었다.
다음 여름이 오기까지 햇볕 한 줌 보기 힘든 북부 특유의 음침한 기후가 시작된 거다.
종일 안개가 낀 것처럼 어둑하고 으스스한 환경에 처하게 되니 이곳에 왜 그렇게 성격 삐뚤어진 녀석들이 많은지 좀 알 것 같았다.
우울증에 걸리기 십상인 데다 언제 어디서 피에 굶주린 마물이 튀어나올지 모를 분위기.
가장 순박한 박애주의자라도 한 달도 안 되어 사납고 예민한 염세주의자로 돌변할 듯한 기후다.
이런 상황에서 그간 존재를 잊고 있던 인물이 귀환했다.
오메르타 공작, 이스케와 엘레니아의 부친이 마침내 에렌딜로 복귀한 것이었다.
“인사가 늦게 되어 송구스럽소이다.”
오메르타 남매의 부친이라면 왠지 북부의 암흑 기사로 이름을 날리던 젊은 시절의 냉혹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했을, 날카로운 느낌의 미중년일 거라 막연히 상상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산산조각이 났다.
자식들에게 그러한 미모를 물려준 분은 틀림없이 돌아가신 공작 부인임이 명백했다.
홍옥처럼 붉은 눈동자는 자식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꼬리가 아래로 쳐진 눈매와 새치가 드문드문 섞인 검은 머리, 각진 턱, 트롤처럼 투박하고 거대한 체격 등의 조합이 브리타냐 기수 가문의 수장이라기보다는 호탕하고 거친 산적 두목처럼 보였다.
“아들놈이 워낙 숙맥이라 제대로 대접을 해드렸을지 걱정했소.”
“경께선 과분할 만큼 친절하세요.”
살갑게 웃으며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대꾸하자 공작이 머리를 미세하게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가 다시 무어라 말하려는 듯하던 찰나 묵묵히 앉아 있던 엘레니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빠 생일을 놓치셨습니다, 아버지.”
“새삼스럽구나. 그 싸가지 없는 놈은 어차피 내가 빠진 편을 더 좋아할 터인데.”
“전하께서도 유감을 표하셨습니다. 성혼기념연회에 빠지셨다고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원. 그보다 부인, 신전은 방문하셨소이까?”
엘레니아가 입술 끝을 질끈 깨물었다.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신전에 방문했느냐는 질문은, 내가 교황의 여식으로서 이곳 성직자들을 방문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였느냐는 식의 물음이 아니었다.
갓 혼례를 치른 귀족들이 초야를 치른 뒤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함께 신전을 방문해 약언을 치르는 북부의 전통.
아버님 되시는 분은 지금 내게 그것을 끝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이거야말로 뜻밖이군. 솔직히 말해서 난 아예 이런 질문을 들을 거라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원작의 루드베키아는 파경에 다다르기 전 반년 내내 이스케와 단 한 번도 밤을 같이 보낸 적이 없었던데다 누가 둘에게 딱히 의무를 강요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다간 양쪽 모두에게 사이좋게 작살 났을 테니까.
“부인?”
잠시 침묵하는 나를 의아한 눈길로 응시하던 공작이 문득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누가 그 아비에 그 자식들 아니랄까 봐 일그러지는 얼굴이 상당히 으스스했다. 어어?
“설마…….”
“오빠가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엘레니아가 다시 툭 던지듯 끼어들었다. 알 만한 분이 왜 그러냐는 투였다.
그럼에도 공작은 표정을 풀지 않으며 매섭게 얼어붙은 눈길로 나를 쏘아보았다.
이봐요, 아저씨…….
“벌써 달이 가까이 지났거늘 아직도 의무를 마치지 않으셨단 말이오? ”
“그건…….”
“실례되는 말씀이오나 부인, 내 작금의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소. 성하께서 북부를 욕보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 단언하셨기에 안심하고 있었소만, 이게 대체 어찌 되어가고 있는 거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아저씨 아들한테 여쭤보심이 어떨까요?
공작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내 경력들도 경력인 데다, 초야를 치르지 않은 이상 혼례를 치렀다 해도 정식 부부라 할 순 없으니까.
내 앞선 신랑들처럼 일방적 결혼 취소를 당하는 수모는 이토록 자부심 대단한 가문으로선 허용할 수 없겠지.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에선 손 놓고 구경만 하던 아버님이 왜 갑자기 이리 나오시냐는 거다.
공작이 나와 이스케의 혼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건 딸을 교황의 망나니 차남에게 줄 수 없다는 심보도 컸지만, 동시에 안하무인 금욕주의자인 아들놈의 버릇을 고쳐놓겠다는 고약한 심보도 있었다.
일단 한 번 억지로 결혼시키고 나면 나중에 북부의 괜찮은 가문 여식과 새로 결혼시키기보다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심보.
즉, 나와의 결혼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 예상한 건 공작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
그런데 갑자기 왜 이래. 단지 자신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이려는 걸까?
주도권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때가 온다면 기꺼이 보내주겠으나 이쪽 멋대로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씨이, 원래의 루드베키아였으면 이쯤에서 찻상을 엎어버리거나 코끝으로 비웃으며 역으로 도발했을 텐데.
난 안 그럴 것처럼 보이니까 이러는 거지 지금?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하찮게 여겨주다니 고마워해야 하나?
나는 찻잔을 다시 집어 들며 하찮게 방긋 웃었다.
“그간 제가 여러 번 앓아서 다들 배려해 주시느라 그리되었던 것뿐이에요. 의무를 다할 각오는 되어 있으니 노여워 말아주세요, 아버님.”
공작은 여전히 못 미덥다는 눈빛이었으나 표정을 약간 누그러뜨리긴 했다.
“그렇다면야 안심이오만, 그 먼 뱃길을 타고 이곳까지 오셨는데 하루라도 속히 종지부를 찍어야 부인도 마음이 편하시지 않겠소.”
“염려 감사드려요. 경이 아버님을 닮아서 그렇게 상냥하신 거였군요. 전 정말 복이 많은 것 같아요.”
“……말이 통하는 분이라 다행이구려.”
다행이라면서 왜 떨떠름하게 들리는 거지. 싸움이라도 기대하셨나.
스멀스멀 음모가 피어올랐다. 만약 내가 남편 놈과 초야를 치른다면, 그렇게 정말로 부부가 된다면 나중에 파경하기 어려워진다.
여태까지 그래왔듯 초야도 치르지 않은 상태라면 혼인 무효화로써 없었던 관계로 만들기 쉽지만, 이혼은 또 다른 얘기였다.
교황이 통치하는 로마냐에서 이혼은 신분을 막론하고 금기였다.
같은 신앙을 가지고 교황청에 충성하는 주변 국가들 역시 비슷한 풍조였다.
물론 어디든 그렇듯 법적으로만 부부일 뿐이지 별거하고 자유분방하게 사는 사람들도 만연했지만, 그래도 이혼은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교황이 대놓고 자식들을 둔 세상이라 해도 쉽지 않을 문제.
아버지와 체시아레라 해도 초야를 없었던 일로 합의하고 나를 다시 데려가려면 꽤 많은 것을 내줘야 할 것이었다.
공작이 노리는 건 그것이겠지만…….
진짜 부부가 되고 나면 내겐 시간이 더 많아진다.
원작에선 혼인 무효 선포를 할 시기에 맞춰 엘레니아를 독살하고 로마냐로 돌아갔으니, 파경 절차가 더 까다로워진 이상 엘레니아에 대한 암살 음모 또한 그에 맞춰 늦춰질지도 몰랐다.
거기서 만약 내가 잘한다면, 내 계획이 성공한다면…….
이스케가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그냥 이곳에 둘지도 모른다.
인질로든 뭐든 여기서 살게 해줄지도.
진짜 부부인 이상 그놈이 허락지 않는다면 체시아레가 나를 멋대로 데려갈 수가 없으니, 그럼 나는 엘레니아의 죽음도 막고 내 목숨도 살리고 가족들이랑도 두 번 다시…….
오오오. 그럴싸해. 괜찮아. 매우 괜찮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열성 팬 컨셉이라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거랑 의무에 충실한 거랑은 또 다르지.
암, 뭣보다 아버님이 등 떠미는 중이잖아?
우리가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막 저렇게 노하시는데 어쩔 수 없지 뭐.
문제가 하나 있다면 바로 그 목석같은 남편 놈을 어떻게 꼬드기냐는 거였다.
안 그래도 비범한 금욕주의자인데, 과연 나랑 더 질척이게 될지도 모를 일을 만들고 싶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