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36)

* * *

수십 종의 식물이 우거진 뜰은 안개에 싸인 숲 같았다.

곳곳에 밝혀진 따스한 초록빛의 성화들이 저물어가는 하늘을 밝혔다.

연회가 열리는 장소는 서편의 별관.

다들 그쪽에 보안을 집중 중인 탓인지 돌아다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라일락 덤불들 사이에 몸을 감춘 뒤 수를 놓은 손수건과 편지를 긴 소매 속에 꼭꼭 넣었다.

휴, 내가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열성 팬 노릇은 정말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아랫배와 허리 부근이 사정없이 욱신거렸으나 참을 만했다.

슬쩍 보고 확인만 하는 거야, 분위기 확인만 하고 나서……. 뭣하면 선물만 전달하고 돌아가지 뭐.

그래도 명색이 생일인데 흥미로운 열성 팬으로서 조공은 해줘야 한결같지.

이럼으로써 어떤 상황을 맞게 되건 나는 그놈을 봐야 했다.

이런 식의 유예는, 냉랭한 침묵 속에서 초조하게 처분을 기다리기만 하는 일은 끔찍했다.

며칠 내내 먹은 것도 딱히 없는데 계속 토하고 싶을 정도였다.

차라리 두들겨 맞는 게 낫지 이런 유예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

우르릉, 쾅!

신이시여, 당신 저 진짜 싫어하죠? 왜 하필 이럴 때 갑자기 소나기가 튀어나오냐고!

순식간에 하늘이 검게 물들면서 때아닌 소낙비가 쏟아져 내렸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소매를 꼭꼭 싸맸다.

최대한 비를 안 맞으려 나무들이 우거진 쪽을 골라 걸었지만 젖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드레스가 뻣뻣한 레이스 재질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척비척 별관 가까이 다가가니 서서히 소란스러운 소리가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막 도착한 손님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 누가 그놈 생일 아니랄까 봐 하늘이 노한 게 틀림없다고 쾌활하게 농담하는 소리 등등.

나는 가까이 있는 노간주나무 뒤에 몸을 감추고는 연회장 입구를 빼꼼히 엿보았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행복할까, 다른 사람들은.

다들 완전히 안으로 들어가 계단 쪽이 잠시 텅 빈틈을 노려 가까이 다가갔다.

기둥 뒤에 다시 몸을 숨기고는 안쪽을 슬쩍 엿보니 활기차고 호화로운 파티의 풍경이 보였다.

“……내가 이 선물 준비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정말 고생한 거 맞기는 하나.”

“하여간 얄미워.”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영애, 잘해줘 봤자 하등 필요 없는 놈이라고요.”

“넌 왜 여기 있냐.”

“이 새끼는 진짜 축하하러 와줘도 지랄이야.”

왁자지껄. 한 무리의 남녀가 즐겁게 떠들며 연회장 중심부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오늘도 시커먼 갑옷 차림인 팔라딘 여러 명과 아가씨 둘.

낯익은 얼굴들이 섞였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저놈들은 팔라딘 자부심이 참 굉장한 것 같다.

우아한 푸른 드레스 차림으로 성기사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는 엘레니아는 여신 같았고, 같이 맞춘 듯한 디자인의 분홍색 드레스에 창백한 금발을 우아하게 늘어뜨린 프레이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무어라 웃으면서 은발 기사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때렸다.

이스케 녀석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에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퍽 즐거운 듯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이전 삶의 고등학교 시절 어느 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댄스파티가 열린 밤, 파트너에게 버려진 채 정원에 숨어서 나와는 전혀 다른 백인 학생들을 구경만 하던 그때로…….

연회장 문이 서서히 닫혔다.

쿵, 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돌아가야겠다. 이런 꼴을 하고서 나타나 봤자 망신만 살 뿐이었다.

게다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하녀장이 내게 약을 판 건 아닌 것 같았다.

어느덧 소낙비가 그쳤다.

나는 기둥 뒤에 잠시 쪼그리고 앉아 아픈 허리를 달랬다.

돌아가자. 어차피 선물도 젖어서 망가진 것 같고, 이딴 걸 줄 순 없잖아.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하면 되겠지.

씨이, 괜히 헛고생했어. 저놈이 얼마나 야박한 놈인지 잠시 깜박해버린 내 잘못이다.

그래, 아무리 못돼먹은 하녀장이라 해도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건 너무 간 거지.

가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새 계획이나 짜야겠다. 여차하면 놈이 집에서 잠든 사이에 슬쩍…… 이건 너무 갔나.

“에취!”

다시 덤불이 우거진 길로 돌아가는데 재채기가 나왔다.

훌쩍, 갑자기 소낙비라니 운도 더럽게 나쁘다. 아프면 나만 손해인데 본의 아니게 미련한 년이 되어버렸어…….

가만, 이 길이 아까 내가 온 그 길이 맞나?

정신 차려, 멍청아. 나는 주먹을 들어 내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근데 너무 세게 때린 바람에 눈물이 찔끔 났다.

이마를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니 정처 없이 걷다가 건물 뒤쪽으로 빠진 듯했다.

혼자 빙빙 돌고 뭐 하는 거야.

그새 누가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기를 바라며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모퉁이를 도는데 무언가에 어깨를 세차게 부딪쳤다.

아프다. 오늘 왜 이래, 진짜.

매캐한 연기 냄새가 났다.

성화 냄새인가? 비가 내려도 끄떡없는 걸로 아는데.

갑자기 포포가 보고 싶다. 입안에 시체 담고 다니는 마물이긴 해도 걔처럼 나한테 친절한 녀석은 없었다고. 피나지 말라고 나뭇잎도 붙여줬는데…….

“부인?”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당신이 누구인진 모르겠으나 오늘 본 나의 미련한 모습은 부디 잊어주길. 휴, 허리가 끊어질 것 같군.

“부인. 레이디 루드베키아.”

끈질긴 놈이군. 그냥 넘어가 주면 어디가 덧나나?

짜증을 참으며 고개를 힐끔 돌리자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목덜미를 덮은 창백한 금발. 동그랗게 치뜬 짙은 보라색 눈동자.

아, 너구나. 하필 너한테 걸리다니 오늘 나 참 운이 더럽게 없어.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나는 잠시 로렌초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재미있다는 눈빛이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그 누나에 그 동생이군. 이런 놈은 또 왜 어딜 가나 한두 명씩 꼭 있는 거야.

“그냥 욕하셔도 돼요.”

“예?”

“저한테 그냥 편하게 욕하셔도 돼요. 제 꼴 보면 아시잖아요. 그때처럼 굳이 그런 노래 부르는 수고는 안 하셔도 돼요.”

“그 무슨…….”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꼬리를 끌어당기는 모양새가 우습다.

왠지 당황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딴 역겨운 노래까지 불러대면서 싫은 티 팍팍 내놓고는 왜 이래. 나는 눈을 끔벅이며 방긋 웃었다.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신 건지…… 제가 대체 언제…….”

“괜찮아요. 다들 저 싫어하시는 거 알아요. 저 이래 봬도 주제 파악 잘하거든요.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고 쥐 죽은 듯 지낼 테니까 걱정 마세요.”

목소리가 흐려지면서 시야가 따끔거렸다.

내가 이 애새끼를 붙들고 뭐 하는 거람. 아무래도 대자연의 공격 때문에 판단력이 평소보다 약간 떨어진 것 같다.

뭐라 해봤자 소용없는 군상들이지만, 그 와중에 욕설을 퍼부어주는 대신 무해함을 어필하는 내 메소드 연기력 참 칭찬해.

그래, 마음껏 청승맞은 백치로 보라지. 가서 네 누나한테 내가 얼마나 하찮은지나 좀 일러주련?

난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그러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어.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슥슥 문지르고는 로렌초로부터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제야 바로 앞쪽에 뭐가 있었는지가 보였다.

순간 환영이 아니지 싶었다.

이놈들이 왜 여기 나와 있는 걸까?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연회장에…….

뜻밖의 장면에 내가 잠시 놀란 사이 자부심 대단한 북부의 팔라딘들은 나보다 더 놀란 것처럼 보였다.

각각 잎담배를 손에 쥔 채 얼어붙은 표정으로 멀거니 쳐다보는 모습이 왠지 우스꽝스럽다.

매캐한 연기 냄새의 정체가 저거였어?

특히 아이반 경은 어찌나 얼이 나갔는지 담뱃불이 제 손가락을 지지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 못 채고 있는 것 같았다.

성냥갑을 들고 선 앤디미온은 한술 더 떠서 진작 새까맣게 타버린 성냥을 계속해서 긋고 있었다.

나도 알아요, 내 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 그래도 창피해 죽겠는데 내가 방금 내뱉은 청승맞은 소리까지 전부 들어버린 모양이다.

아아, 쥐구멍, 쥐구멍!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동료들과 상당히 비슷해 보이는 얼굴로 서서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던 이스케가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내가 멋대로 방을 나온 것도 모자라 염치도 없이 아무나 붙들고 청승을 떨어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결같이 야박한 놈 같으니.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프레이야의 동생이 보는 앞에서 혼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주춤거리며 몸을 돌렸다.

일단 내 침소로 돌아가 있자. 적어도 저놈이 화가 났으니 뭘 하러든 오기야 하겠지. 그러면 그때…….

“부인?”

부디 몸이 잘 버텨주길 바라는 심정이 무색하게도 허리가 너무 아픈 탓인지 그만 뭐에 발이 걸려 볼품없이 풀썩 넘어져 버렸다.

새 옷인데 진흙이 잔뜩 튀어버렸다. 아까워라.

낑낑 열심히 바로 서려는데 불쑥 몸이 허공에 홱 들렸다.

안 돼! 여기서는 안 된다고 이놈아!

“너…….”

“잘못했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뭐?”

“전 그냥, 생일 선물 드리고 싶어서, 전달만 해드리고 바로 다시 가려고 했는데, 히끅, 멋대로 나와서 죄송해요. 이런 꼴 보여드리려던 거 아니었어요.”

너무 창피스러워서 눈물이 나는 걸 꾹 참았더니 대신 딸꾹질이 나왔다. 이런 망할.

창피해. 일전에 코피가 터졌을 때보다 더 창피하다.

너무 창피해서 자꾸만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혀를 꾹 누르려는데 놈이 솥뚜껑 같은 손아귀로 내 손을 잡아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응?

나는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커다랗게 벌어진 홍옥 같은 눈동자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저더러 연회에 참석할 필요 없다 하셨다고 들어서, 그래도 선물은 드리고 싶어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뭐라고?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해?”

아니야?

아닌 거였어? 역시 하녀장이 내게 약을 판 거였어!

이 사악한 인간! 분노가 이는 동시에 안도감 역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다행이다. 역시 그 정도는 아니었구나.

아, 살았다. 지푸라기가 돌아왔어. 개고생한 보람이 있군!

나는 재빨리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고서 활짝 웃었다.

“그럼 저 아예 보기 싫어하신 거 아닌 거죠? 선물 드려도 돼요?”

야박한 남편 놈은 나를 안아 든 채 잠시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뭘 잘 알았더라면, 왠지 무력감이 어려 보인다고 표현할 법한 이상한 눈빛이었다.

이런 괴물 같은 놈한테 무력해 보인다니 걸맞은 표현은 아니겠지만…….

놈의 표정은 정말로 이상했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또 한없이 무력해 보이기도 하는, 완전히 뒤죽박죽이었다.

“너는 대체…….”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녀석이 이내 이를 꽉 악물었다.

왠지 힘겨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정작 아픈 건 난데 왜 네가 힘들어하니? 꼬인 녀석.

놈의 우람한 어깨 너머에서 때아닌 소동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이 새끼 너, 너……! 너 이 미친 애새끼가 설마 또 나 몰래 주둥이 흥얼거린 거냐?!”

“아, 아닙니다! 전 진짜 그때 한 번만…… 아아악!”

“너 이 X발 내가 한 번만 더 그딴 X같은 노래 씨불이면 어떻게 한다고 했냐?! 어?!”

“그게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란…… 아악! 잠깐 제 말 좀!”

이거야 원 내가 본의 아니게 로렌초에게 크나큰 엿을 먹인 셈이 되었군. 별로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는구나.

대로한 우리의 아이반 경이 로렌초 녀석의 귀를 쭉쭉 당기는 모습을 고소하게 흘긋거리고 있자니, 멀거니 나를 응시하던 이스케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노래?”

모든 소리가 뚝 멈췄다. 그저 얼빠진 낯짝으로 현장을 지켜보던 팔라딘들뿐만 아니라 살벌한 욕설을 퍼붓던 아이반 경과 비명을 질러대며 부정하던 로렌초까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딱 다문, 독특하기 그지없는 정적이 내렸다.

이스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격 파탄자답지 않게 굉장히 온화한 톤이라 되레 더 음산하게 느껴지는 음성이 울렸다.

“무슨 노래?”

아, 맞다. 얘 개차반인 것도 모자라서 비범한 금욕주의자였지.

앤디미온 전에 있던 종자가 외설적인 노래를 불렀다고 쫓겨났다 했을 정도이니 다들 말을 잃은 게 이해가 간다.

로렌초에게 엿을 더 주고 싶은 심정과는 별개로 나는 그 노래를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딴 역겨운 노래를 이 야박한 남편 놈이 듣는 것 또한 바라지 않았다.

난 이미 오늘 수치를 당할 만큼 당했다고.

어떻게 좀 해봐, 이 자부심 흘러넘치는 놈들아.

투명 드래곤도 때려잡는다는 팔라딘들이 왜 갑자기 수줍은 사춘기처럼 눈치만 보는 거야!

“에취!”

결국 슬쩍 아무 말이나 해보려는 찰나 재채기가 나왔다.

손으로 입을 막으며 재채기를 하는데 놈이 나를 안은 팔을 추슬렀다.

“괜찮아?”

이런 말이 다 나올 줄이야.

생일은 생일이라 관대한 기분이 다 드시는 모양이다.

나는 남편 놈이 관대한 기분에 젖은 틈을 타 잽싸게 눈을 반짝였다.

“당신은 정말 다정해요.”

“…….”

“이젠 화 풀리신 거예요? 저 더 이상 안 미워하세요?”

한결같은 이스케는 아무래도 내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떠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몸을 안은 팔에 힘이 바짝 실리나 싶더니 다음 순간 녀석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만들 들어가지.”

저기 잠깐만요. 이게 아닌데.

저기요, 남편 놈아, 우리도 이대로 들어가는 거니? 내 꼴이 퍽 망신스럽다는 건 나도 잘 아는데.

확실히 우리는 남 좋은 분위기 망치는 데 일가견이 있구나.

“루비?”

시끌벅적한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엘레니아가 곧바로 다가왔다.

그녀답지 않게 꽤 당혹스런 기색이었다.

“이게 어찌 되신…… 어쩌다 이리되신 겁니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오빠?”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얘 옷부터. 네가 같이 가서 확인하고 다시 데리고 와.”

아이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내 저놈 꼬인 심보 좀 알게 되는 날이 좀 있었으면.

나는 그렇게 엘레니아에게 이끌려 연회장 위층에 딸린 어느 방에 들어갔다.

하녀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소매 속에 넣어둔 손수건과 편지는 꼭꼭 싸맨 덕인지 다행히 젖지 않았다. 그것들은 실크 주머니에 따로 챙겨 넣었다.

엘레니아는 내 이마에 손을 한 번 짚더니 묘한 한숨을 내쉬었다.

“루비, 하녀장이 전하길 루비가 몸이 너무 안 좋아 도저히 참석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아까 제가 확인하러 갔을 때만 해도 깊이 잠드셔서 정말 아프신 줄 알았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저도 그게 궁금하군요. 하녀장한테 물어보시는 게 어떤가요?

“월경통이 좀 있긴 한데 괜찮아요. 저는 오늘 연회에 참석할 필요 없다 하셨다 들어서…….”

“네?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하녀장은 엘레니아의 유모이기도 한 만큼 섣불리 모함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엘레니아는 이미 답을 눈치챈 듯했으니 뭐.

“후…….”

고개를 다시 힐끔 드니, 냉랭한 얼음 조각 같은 얼굴에 복잡한 빛이 서려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일단…… 약은 드셨습니까? 아직도 아프신가요?”

“아까 진통제 먹었는데 크게 효과는 없는 것 같아요.”

“거기 너, 가서 진통제 좀 가져와. 일반 진통제 말고 오빠가 쓰는 거.”

이스케 녀석이 쓰는 거?

머리를 갸웃하며 쳐다보자 엘레니아가 안심하라는 듯 내 어깨를 한번 쓸었다.

“병자는 아닙니다. 그냥 일할 때 쓰는 거예요.”

아하. 팔라딘 전용 진통제 뭐 그런 거 말씀이시구나. 그게 나한테 효과가 있을까?

잠깐 의혹을 품었던 것이 황송하게도 눈깔사탕처럼 생긴 파란색 진통제는 효과가 대단했다.

언제 그리 아팠던가 싶을 정도였다.

허리와 골반을 작살 내는 듯한 고통도 싹 가시고 옷도 보송보송한 새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자 훨씬 살 것 같아졌다. 슬슬 운이 풀릴 조짐일까? 부디 그렇다면 좋을 텐데.

화장도 살짝 하고 아직 덜 마른 머리를 차분히 빗질하는 일까지 마친 뒤 엘레니아와 함께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시선들이 쏟아지긴 했으나 의외로 예상했던 질문 세례는 없었다.

“루비, 일단 뭣 좀 드십시오. 종일 아무것도 못 드셨을 듯한데.”

지난번부터 느낀 건데 엘리니아는 자꾸 내게 뭘 먹이려고 하는 것 같다. 마음 써주는 건 고맙지만 안 그래도 되는데.

“엘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스는 갑자기 왜 저러는 거고?”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일단 내가 가볼 테니까 네가 나 대신 잠깐 봐줘.”

내가 애냐?

나 너희랑 동갑이라고.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만. 왜 갑자기 슬퍼지는 거지.

나는 레몬 케이크를 깨작대는 척하면서 엘레니아가 향한 곳을 힐긋거렸다.

기둥 뒤편 복도 쪽이 상당히 소란스러운 느낌이었다.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가 않다.

대체 무슨 일일까? 안하무인 남편 녀석이 갑자기 또 뭘 어쨌길래?

다시 데려오라고 자기가 말해놓고는 또 쌩하니 놔두고 가버리다니, 한결같이 야박한 놈이다.

“부인, 괜찮으신 거예요? 편찮으시다 들었는데 어찌…….”

왜 여기 멀쩡히 나타났냐는 말이었다.

“그게, 사정이 좀 복잡한데 이젠 괜찮아요.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다행이네요. 아까 정말 깜짝 놀랐어요. 혹 이스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글쎄요. 나는 나도 상황을 모르겠다는 의미로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프레이야는 내 곁에 마지못해 있긴 했지만 시선은 끊임없이 저쪽을 힐긋대는 것이 얼른 가보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저 정말 괜찮으니 다른 일 보셔도 돼요. 인사 나눌 분도 많으실 텐데.”

“아…… 혹 어디 안 좋으시면 바로 누구한테든 말씀하세요. 아셨죠?”

내가 대관절 누구한테 어디가 안 좋겠다고 호소하겠나.

그나저나 남편 놈은 날 굳이 왜 다시 데려오라 한 걸까.

설마 이 자리에서 나랑 파경을 선포하기라도…… 아냐, 아냐! 부정적인 망상은 하지 말자.

“부인.”

프레이야가 사라진 뒤 나 홀로 부정적인 망상을 날리려 애쓰며 과일 칵테일을 고르는 참이었다.

왠지 아래쪽에 들리는 자그만 목소리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아리엔 공주님?”

“오늘 안 나오시는 줄 알았어요.”

적갈색 머리칼을 양 갈래로 묶은 귀여운 소녀. 아리엔 공주였다.

“그럴 리가요. 제가 사정이 좀 생겨서 약간 늦은 것뿐이랍니다. 공주님께서는 누구랑 오셨어요?”

“저랑 유모랑 왔어요. 어마마마는 이런 데 잘 안 오시거든요.”

그렇구나. 알 만했다. 오메르타 남매는 국왕의 조카이지 노예 출신 왕비의 조카가 아니니까.

어찌 됐든 어린 공주를 이렇게 참석시킨 걸 보면 왕이 성격 파탄자 조카 놈을 꽤 신경 쓰긴 하는 모양이다.

아리엔의 옆에는 엇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또 한 명 있었다.

결 고운 담황색 고수머리와 반짝이는 담록색 눈동자가 인형처럼 귀여운 아이였다.

내가 그쪽에 말을 붙이려는 찰나 소녀가 먼저 말했다.

“부인 남편께서 팔라딘이시죠.”

“네, 영애.”

“저희 오빠도 팔라딘이에요.”

“어머, 그렇군요. 혹 제가 아는 분일까요?”

“아마도요. 저희 오빠도 꽤 유명하거든요. 얼굴은 봐줄 만한데 입이 너무 더러워서요. 어머니 말씀으론 걸레를 물었대요.”

음. 누구인지 바로 알 듯한 이 기분은 뭘까. 그러고 보니 머리 빛깔이랑 눈 색도 비슷한데. 게다가 왠지 말투도 낌새가…….

“저희도 그거 마셔도 돼요?”

“이런, 안 돼요. 대신 여기 있는 주스 고르시면 돼요.”

“예전에 부인 남편께서 저 목말 태워줬어요.”

정말? 그 이스케가? 진짜로? 설마.

게다가 그놈이 그런 스타일이었다면 아리엔은 왜 그렇게 그놈을 무서워할까?

내 의심에 가득 찬 표정에 소녀가 혀를 귀엽게 쏙 내밀었다.

“오빠가 억지로 올린 거긴 하지만요.”

아아, 역시 그런 거였군. 그럼 그렇지. 그 냉혈한에게 그런 자상한 구석이 눈곱만큼이라도 존재할 리가 없어.

“근데 공주님이 그랬는데 부인께서 머리카락 만져도 된다고 했대요. 진짜예요?”

“진짜야. 근데 지금은 안 돼. 여기서는 안 돼.”

“왜애 지금은 안 돼요?”

“사람들이 보잖아, 레아.”

“전 지금 만져보고 싶은데요.”

수줍음을 꽤 타는 아리엔과는 대조적으로 아이반 경의 누이동생은 당돌한 말괄량이 느낌이었다.

핏줄의 힘일까, 환경의 힘일까. 어쨌든 둘 다 진짜 귀엽구나. 부디 상처 없이 잘 자랐으면 좋겠군.

“전 지금 만지셔도 상관없는걸요. 남들이 보면 좀 어때요.”

“맞아요, 남들이 보면 어때요.”

생긋 웃으며 뒤의 층계참에 걸터앉자 레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손을 뻗었다.

이에 아리엔 역시 머뭇대면서도 슬그머니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손가락들로 배배 꼬고 땋고 난리가 났다…….

“뭐 하냐.”

너어는 진짜 남들 좋은 분위기 파투 내는 데 일가견이 있어, 이놈아.

나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두 소녀가 내 양어깨에 딱 달라붙어 버린 바람에 그냥 그대로 앉아서 헤실 웃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니. 나는 이 연회의 주인공이다.”

이 대답은 뭐야. 자랑하는 건가? 아니면 주인공이라서 어디 다녀올 수가 없다 뭐 이런 건가?

아까는 잘도 나갔다 온 주제에. 그래, 너 잘났다.

잘나신 남편 놈은 잠시 그대로 위풍당당하게 서서 나를 내려다보나 싶더니, 이내 시선을 두 소녀 쪽으로 옮겼다.

그렇게 못마땅한 티 팍팍 내면서 노려보지 좀 마, 이놈아. 네가 그러니까 애들이 널 무서워하지!

불쌍한 아리엔이 오들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괜찮아, 내 네 심정 이해해.

“아앗, 역시 부인께서 같이 놀아주고 계셨군요. 레아, 너 인사는 제대로 했냐?”

“오빠 욕은 조금만 했는데.”

“뭐야?”

이스케를 뒤따라 성큼 다가온 입에 걸레를 문 아이반 경은 어느덧 아까 본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진중하고도 유쾌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역시라뇨. 그거 무슨 뜻이죠.

“아하하, 공주님이랑 영애께서 저와 놀아주고 계셨어요.”

“맞아요.”

“맞아.”

애들아, 그리 진지하게 맞장구치지 말아주련?

나 안 그래도 여섯 살 공주랑 수준 똑같다고 남편 놈한테 구박받았단 말이야.

슬슬 눈치를 살피며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이스케가 불쑥 한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걸까?

역시 생일이라고 관대한 기분임이 틀림없다. 냉큼 잡자 몸이 단번에 홱 일으켜 세워졌다.

“한 번 더 해주시면 안 돼요?”

“…….”

“미안해요. 귀찮게 안 할게요.”

그러니 파경 선포만은 제발. 최대한 애절하게 눈을 빛내며 방긋거리는 나를 놈이 또 뚫어져라 빤히 응시했다. 왜 또 그렇게 노려보는 거야.

한때는 체시아레 기분 맞추는 게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어, 네놈 배배 꼬인 심보 이해하는 게 제일 힘들어!

가만. 혹시 그것 때문인가?

“아참, 저 생일 선물 드릴게요.”

얼른 들고 있던 실크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적이자 놈이 기다렸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속물 자식.

솔직히 홀 한쪽에 쌓인 번쩍번쩍한 선물 더미를 보고 나니 영 내 선물을 꺼낼 기분이 안 들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 상황이 그랬던 걸 어떡해.

“저어, 별건 아니지만 제가 열심히 밤새워 놓은 거예요.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

“생일 축하드려요. 당신이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튼 간에 선물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열성 팬답게 열렬하게.

이스케가 내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해바라기 수를 놓은 손수건과 곱게 접은 편지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초조함에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찢지만 마라, 찢어버리지만 마라, 아니야 찢어도 되니까 파경 선포만은 넣어두렴.

왜 사방이 갑자기 고요해진 것 같은 기분일까.

이윽고 그가 다시 시선을 천천히 올려 내 눈과 마주했다.

어째서인지, 문득 아까 밖에서 본 그것처럼 뒤죽박죽인 표정 같았다.

왜 그렇게 힘들어 보이는 거야? 설마 고작 이런 선물 받기가 너무 힘들다는 건 아니겠지?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실실 웃고 있는 입가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나 개의치 않고 덧붙였다.

“앞으로 절대, 절대 말썽 안 피울게요.”

“…….”

“그러니까 미워하지만 말아주세요.”

뭐라고 대꾸를 좀 해보든가 받기라도 하든가 해주렴. 팔이 아프단다.

마침내, 드디어 녀석이 손을 움직였다.

애써 수놓은 손수건과 편지가 놈의 솥뚜껑 같은 손아귀 안에서 힘없이 오그라든다!

“이건…….”

“그, 제가 쓴 진심 어린 반성문이에요.”

“…….”

“마음에 드세요?”

진심 어린 편지라고 말하려다가 그러면 왠지 저대로 작살날 것 같아서 반성문이라고 했다.

단어를 잘 고른 모양인지 다행히 애써 쓴 편지가 종잇조각이 되어 흩날리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근데 왜 그렇게 세게 움켜쥐는 거니. 편지가 다 구겨지겠어.

“들어.”

“네?”

“마음에 들어.”

“진짜요?”

“그래. 진짜.”

꽤 평온한 톤으로 내뱉은 녀석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는 내 손을 붙들었다.

고인 피처럼 붉은 시선이 내 너덜너덜해진 손가락을 훑고 지나간다.

“……미련하기는.”

분명 하찮게 여기는 말이거늘, 왜 괴롭게 들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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