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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의 캐릭터성이 어땠던가?
당당하고 재기발랄하고 기품이 넘치며 만인에게 사랑받는 한마디로 완벽한 귀족 영애.
그것 외에는 도드라진 묘사가 없었다. 게다가 워낙 오래전에 읽은 소설이라 여러모로 기억이 흐릿했다.
물론 분명히 떠오른다 한들 서사 대부분이 보르히아 가문의 음모와 이스케를 위시한 북부 기사 중심이었으니 프레이야의 자세한 성향을 아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루드베키아가 싸움을 걸어대도 매번 현명하게 대처했으며 소동이 일어날 듯하면 제일 먼저 나서서 중재했던 부분이 인상적으로 남았던 것 같다.
나아가 비록 우정 이상의 모습이 연출된 기억은 없지만, 주인공의 소꿉친구이자 에필로그 파트의 주역인 만큼 설령 그녀나 이스케가 피차 우정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다 해도 변수가 될 일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든 내쳐질 허울뿐인 아내이고 다들 그 사실을 확연히 알고 있으니까.
내가 원작처럼 그녀를 괴롭히거나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원작에선 루드베키아가 그리 못 잡아먹을 듯 굴어도 우아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뿐 반격할 가치도 없다는 양 행동하던 프레이야가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내가 거기서 길을 잃고 헤매거나 마물들과 마주칠 위험 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웬 덩굴 마물한테 습격당할 것까지야 예상 못 했겠지만.
그러니 그렇게 돌아가 곧바로 그런 거짓말을 하고서…….
아마 날 금방 찾을 거라고 예상하곤 그 많은 북부 귀족 앞에서 철부지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을 속셈이었을까.
도대체 왜?
처음부터 내게 적의를 품고 있던 것도 아닌 듯했는데. 그녀의 동생 놈이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신경 쓸 가치도 없다고 여겨왔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서 거슬리기 시작했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가 없었다.
뭐가 됐든 이런 식이라면 참으로 곤란한데.
별일 아니라 해도, 유치하고 사소한 일이라 해도 내 처지와 상황을 고려하면 결코 사소하다 할 수가 없다.
그 확신은 이튿날 프레이야가 몸소 나를 방문했을 때 굳어졌다.
“죄송해요, 부인. 제가 어리석었어요. 제가 먼저 부인께 시합하자고 조른 건데, 부인께서 변을 당하신 것 같다고 하니까 이스 반응이 너무 무서워서 저도 모르게 경황없이 둘러대고 말았어요…… 정말, 저 때문에 다투시게 되어 너무 면목이 없답니다.”
보라색 눈을 안타깝게 빛내며 거듭 머리를 숙여 보이는 프레이야는 진심으로 미안해 보였다.
내가 그들 관계를 잘 몰랐더라면 홀랑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가 이스케가 무서워서 그랬긴 개뿔, 그리고 정말로 미안하다면 뒤늦게라도 사실을 고할 것이지 왜 나랑 단둘이 앉아서 주절대니?
너 진짜 무서운 애구나.
여기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피차 속내를 간파하고 시작하느냐 마느냐가 되겠지.
물론 나는 계속해서 하찮게 보일 마음이었다. 특히 그녀에겐 유독 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런 사고가 일어날 줄은 영애께서도 모르셨잖아요. 전부 이해하니 마음 쓰지 마세요.”
“애초에 제가 그런 제의를 하지만 않았어도 부인께서…….”
“정말 괜찮아요. 비밀이지만 실은 조금 재미있기도 했어요. 저, 로마냐에선 한 번도 이런 적 없거든요. 그렇게 멋진 기사분들이 절 찾으려고 밤늦게까지 고생하신 게 죄송하기도 하지만 기분은 좋더라고요.”
철부지처럼 헤헤 해맑게 웃자 그녀는 잠시 묘한 눈길로 내 눈을 탐색하듯 빤히 들여다보더니, 이내 이해한다는 듯 따라 미소를 지었다.
순전히 기분 탓일지 몰라도 얼핏 가소롭다는 듯 보였다.
“뭔지 알겠어요. 그래도 부인께서 별 탈 없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앞으로 제가 도와드릴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문득 이때까지 왜 그녀로부터 아무런 적대감도 느끼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에게 있어 난 적대시할 만한 가치도 못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는.
내 무엇이 갑자기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게 만들었는지는 알 바 아니다.
하지만 프레이야는 이스케와 엘레니아의 오랜 친구이자 북부에서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입지의 인물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다들 그녀를 믿지, 나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 그나마 희망의 가닥을 걸어볼 상대가 최종 보스 남편 놈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한데…….
문제는 그날 밤 이후 그놈이 며칠째 머리털 하나 안 비친다는 사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칩거령까지 내려서 나는 다친 발목이 다 나은 뒤에도 저택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기사들은 이 상황이 매우 기껍다는 듯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지켜보았고, 우리의 엘레니아조차 내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지 지극히 방관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휴. 눈치가 너무 보여서 침소 밖으로 나가기도 뭐할 지경이다.
일단 얼굴이라도 봐야 사정을 하든 구워삶든 할 거 아니냐고!
이대로 저 혼자 생각 정리하고 일말의 감정 따위 버려버리고 날 집으로 돌려보내 버린다면 나는……. 차마 뒷일을 상상하기도 싫구나.
“곧 연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그래도 엘레니아는 제 오빠보다는 덜 매정했다.
친절하게도 나를 찾아와 잊고 있었던 이벤트를 일깨워줬으니 말이다.
태어나기도 쌀쌀맞고 무자비한 한겨울에 태어났을 듯한 남편 녀석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은…….”
“그냥 매해 하던 대로 진행할 예정이니 괜찮습니다. 참, 그때 맞추신 옷들 오늘 오후에 전부 도착할 겁니다.”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자 칼 같은 투로 대답하는 엘레니아였다.
하긴 이 상황에서 내가 나서봤자 도움은커녕 미운털만 더 박힐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더는 아무 토도 달지 않기로 했다.
엘레니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를 잠깐 바라보나 싶더니 곧 몸을 일으켰다.
“연회 전날까지는 제가 좀 바쁠 것 같습니다. 하녀장에게 필요하신 건 뭐든 바로 준비해 드리라 일러두었습니다. 그럼.”
그렇게 나는 당분간 나를 쫓아내고 싶어 안달인 가신들의 자비 아래 놓이게 되었다.
으앙! 엘렌, 왜 자꾸 나를 버리시나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챙겨주는 시늉이라도 하더니, 문제의 사건이 벌어진 밤 이후 내게 칩거령이 떨어지자마자 귀신같이 돌변하여 냉기를 풀풀 풍기는 사용인들의 모양이 매우 얍삽했다.
뭐가 필요해서 침대 곁의 줄을 당기면 거의 반나절이 다 지나서야 못마땅해하는 낯짝의 하녀가 나타나곤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일전에 내게 머리 장식을 받은 하녀가-이름이 루실이었나 뭐 그랬다-아예 입 닦기는 좀 그랬는지 거들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순식간에 폐인 꼴이 되었을 것이었다.
어쨌든 누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랐기에 뭔가를 부탁하기도 좀 그랬다.
특히 하녀장은 프레이야만큼이나 믿을 수가 없는 느낌이었다.
심보 꼬일 대로 꼬인 남편 놈의 기분을 어떻게 푼다.
생일 선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이런 비슷한 상황을 안 겪어본 건 아니지만, 워낙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를 놈이라 조심스럽다.
반나절 가까이 머리를 싸맨 끝에 그냥 경험에 의존하기로 했다.
어차피 집 밖으로 나갈 수도 누구에게 부탁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니 마련할 수 있는 거라곤 수 정도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정부 레이디 줄리아가 내게 결혼 선물로 준 자수함을 가져왔기에 망정이었다.
“자수를 즐기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종일 조용히 침소에 틀어박혀 있자 수상쩍다 여겼는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온 하녀장이 슬쩍 던진 말이었다.
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냥 흉내만 내는 거야.”
“공자님께 드리려고 만드시는 겁니까?”
“응, 그런데 오랜만이라 잘 될지 모르겠네. 어떤 게 가장 적절할지도 고민이고…….”
“미천한 것의 조언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버드나무 문양이 어떨지 싶습니다.”
“버드나무……?”
“예. 공자님께서 어리실 적 자주 올라가 노시던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지금은 베어버린 지 오래라 종종 아쉬워하시거든요.”
가늘게 눈웃음을 짓는 고동색 눈이 비열하게 반짝였다.
순간 소름이 약간 돋았으나 나는 내색하지 않으며 방긋 웃었다.
“와, 좋은 정보 고마워. 참고할게.”
물론 나는 버드나무 수를 놓을 마음이 없었다.
뭐, 종종 아쉬워해?
그놈이 그런 싸구려 감상에 빠질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건 둘째 치고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이딴 수작이라니 너무하다.
난 오메르타 남매의 어머니가 정확히 무엇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죽음으로 치달았는지는 몰랐지만, 그녀가 자살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뒤뜰의 버드나무에 목을 매달고 죽었다는 서술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더러 버드나무 수를 놓으라니.
버드나무 회초리로 맞아 죽으라는 심보가 틀림없다.
역시 첫날 밤 내 방 성화를 일부러 끈 건 저 여자가 틀림없어.
심증뿐이지만 아주 명백해지는 기분이라고, 이 나쁜 년!
넌 기어이 내가 소박맞고 쫓겨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모양인데 난 순순히 그래 줄 마음 없어, 이 못돼먹은 인간아!
첫날 밤 생각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마물들 생각이 났다.
특히 포포 마물 생각이. 내 말을 알아듣고 나를 도와주었던 기이한 마물…….
바보 같지만 혹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의혹이 일었다.
언젠가 체시아레가 나를 밀어 넣었던 지하실의 가고일도, 이곳에 온 첫날 밤 성화가 꺼진 틈을 타 나타났던 그것도 그렇고 궁전 연못에서 날 물속에 끌고 들어간 사랑의 마물도 그렇고 하나하나 돌이켜보니 왠지 느낌이…….
하지만 분명 루드베키아가 마물과 소통한다거나 무슨 친화력이 있다거나 하는 별난 능력은 없었는데.
아니, 이 세계관 자체에서 마수를 상대로 그런 별난 능력을 가진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포포는 나와 명확한 소통을 했고, 나 이외에 다른 사람 말은 알아듣지 못한다는 표현을 확실히 했었다.
일단은 좀 두고 확인해 봐야 할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섣불리 털어놓기도 뭣한 게 잘못했다간 마녀로 몰릴지도 모를 일이니 원.
이런저런 고민에 골똘히 빠진 채 며칠 종일 공들여 수를 놓았다.
오랜만이기도 하고 쉴 새 없이 그것에만 몰두해서 그런지 손가락 끝이 너덜너덜해졌지만 괜찮았다.
어느 정도 완성이 되어갈 때쯤 나는 루실에게 부탁해 편지지를 얻었다.
정성을 들여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편지를 쓰는 내내 그 성격 파탄자 놈이 그냥 찢어버리는 거 아닐까 좀 겁이 나긴 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