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끙…….”
머리가 무거웠다. 마찬가지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데 사방이 온통 어둡고 고요했다.
새하얀 달빛이 뿌옇게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마지막에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
“……헉!”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낑낑 몸을 일으키는 도중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저게 눈이라는 가정하에 말이다.
그것은 내 머리맡에 서서 멀뚱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긴 걸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검고 거대한 괴물 토끼, 혹은 너구리 같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펭귄 같은 몸통 꼭대기에 솟은 양 귀는 토끼처럼 뾰족했고, 눈알로 보이는 한 쌍의 녹색 불빛은 어둠 속에서 표표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배까지 뚫려 있는 저 거대한 구멍이 입이라면 난 이대로 죽을 운명임이 틀림없었다.
악어처럼 삐죽삐죽 무시무시하게 솟은 이빨들은 둘째치고 저 안에 대체 뭐가 든 거지? 시체들 아닌가?
“으흣…….”
등골이 소름이 쫙 돋았다.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혀를 깨물며 후다닥 뒷걸음을 치는데 놈이 움직였다.
펭귄 날개에 발톱이 달린 것 같은 괴상한 팔을 파닥파닥 움직이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포, 포…….”
“가, 가까이 오지 마…….”
“포, 포, 포, 포…….”
……위협적으로 느껴져야 마땅하건만 왠지 우스꽝스럽게 들리는데.
팔을 열심히 파닥거리는 모습 또한 좀 생긴 거랑 안 어울리는 모양이었다.
“저리…….”
“포, 포.”
“다가오지…….”
“포, 포, 포.”
나의 필사적인 발악에도 불구하고, 정체불명 마물은 포포인지 뽀뽀인지 알아먹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뒤뚱뒤뚱 내게 다가왔다.
쩍 벌린 입속의 풍경이 끔찍해서 눈을 질끈 감는데 몸이 허공에 번쩍 들렸다.
멀리서부터 기괴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누군가가 구슬프게 통곡하는 듯한 소리였다. 단지 내 마음의 소리일 뿐일지도 몰랐다.
아아, 신이시여, 소녀 이대로 죽기는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남편 놈한테 안 죽으려고 발악 중인데 웬 포포거리는 뚱보 마물한테 잡아먹히는 엔딩이라니요!
포포 마물은 짧은 팔로 나를 번쩍 집어 들고는, 이미 아무도 없는데 더 으슥한 곳을 찾는 모양인지 뒤뚱뒤뚱 걸음을 옮겼다.
달랑달랑 들려서 끌려간 곳은 근처의 으슥한 바위 뒤였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내가 비명을 지르는 즉시 놈이 내 머리통을 맛있게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어떤 스산한 한기에 숨이 다 막혔다.
달각달각, 세찬 말발굽 소리 같은 것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리를 내려 하는데 왠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본능적으로 기척을 내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직감이 들었다고 할까.
슬쩍 보니 포포 마물은 양팔로 나를 꼭 붙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달각달각 달각달각.
마침내 그것이 눈앞에 보이는 곳까지 다다랐다.
“흡!”
달빛이 비추고 있지 않았더라면 난 그것이 그냥 기사라고 생각하고 비명을 지르든가 했을 것이었다.
어딘가 창백한 느낌의 검푸른 말 위에 앉아 있는 그것은 확실히 기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저 목이 잘려나간 상태일 뿐이었다.
잘려나간 머리처럼 보이는 것은 그것의 옆구리에 끼어 있었다.
저게 바로 듀라한인가 하는 그건가.
이렇게 실체를 보고 있자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공포스러웠다.
듀라한은 잠시 말을 세운 채로 그대로 가만히 있더니, 나와 포포 마물이 숨이 막혀 죽기 일보 직전이 됐을 때쯤에야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후우…….”
“포.”
발이 지면에 닿았다.
포포 마물은 나를 살포시 내려놓고는 다시 뒤뚱뒤뚱 걸어갔다.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는데 문득 그제야 아까 내가 쓰러져 있던 지점에 흩어진 잔해가 눈에 띄었다. 굵은 비단뱀 같은 덩굴이 조각조각 잘린 잔해였다.
발목이 욱신거렸다.
손을 들어 턱을 타고 뚝뚝 흐르는 땀방울을 훔쳤는데, 손바닥을 보니 땀이 아니라 피였다.
“포, 포.”
거대한 나뭇잎 하나를 주워든 포포 마물이 뒤뚱거리며 도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것을 내 이마에 찰싹 붙이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기…….”
“포.”
“혹시, 네가 나 구해준 거니?”
“포.”
녀석이 거대한 몸뚱이를 앞뒤로 흔들어댔다.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 같았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
“포.”
“사람 말을 알아듣는 거야?”
이번에는 녀석이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부정의 의미 같았다.
내가 사람이 아닐 리가 없으니 내 말만 알아듣는다는 뜻인가?
“있잖아…… 나 한 번만 더 도와줄 수 있니?”
“포.”
“내가, 집에 돌아가야 하거든. 그런데 여기서 나가는 길을 모르겠어.”
숲 깊숙이 얼마나 끌려 들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달이 뜬 걸 보니 꽤 오랫동안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피까지 흘리고 있는데, 이대로 혼자 헤매면 비단 마물이 아니라 그냥 산짐승에게 잡아먹힐 판이었다.
포포 마물은 잠시 나를 빤히 보는가 싶더니, 이내 귀를 축 늘어뜨리며 몸을 다시 앞뒤로 흔들었다.
저기, 왜 갑자기 풀이 죽어 보이는 건데? 입안에 시체 조각들 담은 주제에 뭐 하는 거야.
“잠깐…….”
“포.”
포포가 다시 나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높이 들어서 머리 위까지 갖다 댔다.
올라타라는 의미 같아서 나는 고분고분히 녀석의 머리통에 앉아 길쭉한 귀를 살며시 잡았다. 의외로 감촉이 부드러웠다.
붕!
몸이 홱 쏠리는 바람에 나는 귀를 잡은 손에 힘을 꼭 주었다.
포포는 나는 건지 달리는 건지 구분할 수 없는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뚱이와 들어맞지 않게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바람이 너무 세차게 얼굴을 때려 눈을 꼭 감아야 할 지경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마침내 포포가 달리기를 멈추고 내 발을 툭툭 쳤다.
조심스럽게 다리를 내리자 미끈거리는 퉁퉁한 팔이 내 발을 받치고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포.”
사방이 시끄러웠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녹색 불빛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색 중인 듯했다.
“저어, 고마워.”
“포.”
포포는 이번에는 인사하듯 한 팔을 파닥파닥 흔들더니, 다시 뒤돌아 어두운 숲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나대로 수풀을 헤치며 불빛이 보이는 곳을 향해 절뚝절뚝 걸어갔다.
“……왁!”
“꺄악!”
우거진 덤불을 헤치고 몸을 빼자마자 웬 녀석이 기겁하며 기함하는 바람에 나 또한 깜짝 놀랐다.
“부부부부부, 부인?!”
“애, 앤디미온 경?”
“차, 찾았습니다! 공자비께서 무사하십니다! 제가 공자비를 찾았습니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아직 종자에 불과한 앤디미온까지 나를 찾느라 진을 제대로 뺀 모양이었다.
일대가 소란스러워지면서 횃불을 든 팔라딘들이 하나둘 달려왔다.
안도감이 일어야 하는 상황이건만, 갑자기 초조해지면서 불안감에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나 원 참 맙소사…….”
“레이디 루드베키아께서 무사하시다!”
“무사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이건…….”
몸을 굽히고 나를 살피던 앤디미온이 문득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이마에 붙은 대왕 나뭇잎을 떼어냈다.
그 와중에 저게 안 떨어졌던 게 신기하다.
피에 흠뻑 젖은 나뭇잎이 팔랑팔랑 날아갔다.
“앤디, 저리 비켜라. 부인, 이쪽으로 오십시오.”
다른 팔라딘들을 헤치고 다가온 아이반 경이 내게 한 팔을 내밀었다.
처음 보는 무서우리만치 굳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내 부인께선 하루라도 말썽을 안 부리면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군.”
표표하게 울리는 살 떨리는 음성에 나는 아이반 경의 팔을 붙들다 말고 움찔 굳었다.
멍한 표정으로 나를 살피던 앤디미온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경, 부인께서…….”
“입 닥쳐라.”
앤디미온은 곧바로 입을 닥치고는 왠지 가엾게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럴 만도 한 게 지금 이스케의 모습은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핏빛 눈동자가 지옥의 불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양새가 조금 전에 본 듀라한 따위 맥도 못 출 것 같았다.
“이딴 식으로 관심 끌 필요 없다고 이미 말한 것 같은데.”
“폐,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었…….”
“어쩔 수가 없어?”
피식, 하고 녀석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기가 막힌다는, 냉기가 뚝뚝 흐르는 조소였다.
그럼 내가 그 상황에서 어쩌란 말이더냐, 이 한결같은 놈아!
설마 내가 일부러 마물에 끌려가기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는 찰나 아이반 경이 끼어들었다.
“이스, 일단 진정해라. 이쪽 말도 들어봐야 할 거 아니야.”
응? 이쪽 말을 들어? 왜 갑자기 쎄한 기분이 이는 거지?
“듣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다고.”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고…….”
“이 빌어먹을 광대극 오늘로 때려치워 주지.”
씹어 뱉듯 던진 녀석이 곧장 내 목을 조를 듯한 무시무시한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비켜.”
“야, 이스…….”
“비키라고.”
나를 반쯤 감싼 모양을 하고 있던 아이반 경이 홱 떨어져 나갔다.
이어 그답게 ‘아 X발, 나도 몰라 X발 새끼야!’ 하는 찰진 욕지기가 울렸다.
그러든 말든 이스케는 나를 한쪽 어깨에 짊어지다시피 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남편 놈아, 이번엔 또 무슨 배배 꼬인 심보인 거야!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간 던져 버릴지도 몰랐기에 일단 얌전히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이스케는 나를 숲 밖에 세워둔 말 등에 태우고는 곧장 올라타 박차를 가했다.
말이 흔들리면서 다친 발목이 심히 욱신거렸으나 애써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오빠?”
공작저는 온통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이루 형언할 수가 없는 낯짝의 기사들을 지나 홀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엘레니아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녀답지 않게 엄청난 동요가 서린 얼굴이었다.
프레이야 역시 무사한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
흠뻑 젖은 손수건을 쥐고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번들거렸다.
“아아, 부인,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얼마나…….”
“루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상처는 어찌 된 거고요?”
그게 말이지요. 내가 주춤대며 입을 열려는 찰나 남편 놈이 나를 방해했다.
“세르게이나 불러. 넌 이리 와.”
“하지만 오빠…….”
“너흰 따라오지 마라.”
어찌나 살벌한 기세였는지 엘레니아조차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두 아가씨를 다독이는 하녀장의 표정이 아주 득의만면해 보인다.
고소해 죽겠다는 시선들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절뚝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남편 놈의 살기 풀풀 날리는 뒤태를 졸졸 따라갔다.
훌쩍, 이렇게 따라가야 하는 거 싫어, 진짜 무섭단 말이야.
열심히 쫓아가 도착한 곳은 어떤 서재 같은 장소였다.
이스케는 내가 따라 들어서자마자 문을 세차게 닫았다. 쿵 하고 울리는 소리가 대단히 섬뜩했다. 겁이 나서 눈물이 찔끔 솟았으나 꾹 참았다.
“앉아.”
나는 쭈뼛거리며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려는 듯 잠시 짓눌린 한숨을 내쉬는 이스케는 이제 보니까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제복은 흙먼지투성이였고, 목덜미까지 온통 땀범벅에 은빛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좋아.”
그가 마침내 몸을 바로 세우고 팔짱을 끼며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치미는 열기로 이글거리던 눈동자가 어느덧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봐.”
이놈이 웬일이지?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황급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같이 말을 타다가 퓨리아나 영애께서 같이 기슭 반대편까지 시합하자고 하셔서, 알려주신 길을 따라 먼저 출발했는데, 수풀 속에서 갑자기 뭔가 튀어나와서 제 발목을 잡고 끌어당겼어요. 저는, 저는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머리가 부딪히는 바람에……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떨리는 숨을 고르면서 내가 포포 마물을 만났다는 사실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놈의 표정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게슴츠레 치뜬 눈으로 내 눈을 물끄러미 노려보는 것이 마치…….
“프레이야 말로는 네가 멋대로 시합하자며 숲 안쪽으로 달려가 버렸다더군. 안 된다고 만류했는데도 말이야.”
“네? 그게 무슨…….”
“아니면 프레이야가 우리한테 거짓말을 했다 이건가? 그게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고?”
치미는 열기를 누른 목소리가 싸늘하게 이글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쎄한 느낌의 정체가 바로 이거였어?
왜? 왜 그런 짓을 해? 단지 책임을 지기 싫어서? 먼저 시합을 제의했다고 말하기 무서워서?
아니, 아니야.
분명 오늘까지만 해도 아무 적의도 없어 보였는데, 왜 그런 짓을 하지?
내게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뭐가 거슬린 거야?
내가 마물한테 납치당할 줄이야 예상 못 했겠지만, 엉뚱한 길을 알려준 건 확실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 덕분에 이스케는 나를 오해하고 있었다.
프레이야는 이곳에서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입지의 인물이었고, 이스케가 나보다 그녀를 믿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한번 낙인찍히고 나면, 그리고 앞으로 또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면 나는 애써 열심히 연기해 온 것이 무색하게도 엉뚱한 오명에 휩쓸려 애물단지로 전락해 진창에 처박힐 것이었다. 그건 경험이었다.
왜 이런 식으로 나를 건드리는 거지? 백치 호구 짓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내 안전 길을 방해하는 건…….
잠깐 넋이 나가버린 나를 묵묵히 훑어보던 이스케가 불쑥 확 가라앉은 톤으로 내뱉은 것은 그때였다.
“너, 그냥 돌아가.”
“네……?”
“로마냐로 돌아가라고. 아무 조건 없이 깨끗하게 보내줄 테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스케가 나와의 결혼에 동의한 건 오직 엘레니아가 엔죠와 결혼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파경 날 거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단 아버지나 체시아레라 해도 이번만큼은 내키는 대로 파혼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유예 중인 것이었고, 반면에 브리타냐 왕실 입장에선 나는 쉬이 놓아줄 수 없는 인질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아무 조건 없이 결혼을 취소해 주겠다니.
아무리 개차반 안하무인이라 해도 왕의 조카이자 차기 오메르타 공작인 그가 할 만한 결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이 상태로 로마냐로 돌아간다면…… 가족들에 대한 내 개인적인 공포는 둘째 치고, 내가 있든 없든 엘레니아는 반년 뒤에 도리아스의 왕자와 혼약을 맺게 될 텐데, 엘레니아가 암살당하는 건 누가 막지?
내가 아니더라도 여기 있는 아버지의 첩자들이 일을 꾸밀 텐데, 그렇게 엘레니아가 죽는다면…….
나는,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나는…….
“어차피 너도 좋아서 나랑 결혼한 것도 아니고, 이곳에 계속 있어봤자 피차 좋은 꼴 못 볼 테니 네 집으로 돌아가. 너도 느꼈을 테지만 여긴 네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야.”
칼로 베듯 냉정한 어조였다. 감정이 싹 빠져나간 차분한 목소리가 무서우리만치 단호했다.
내가 제 소꿉친구를 이간질하려 한다고 생각해서 폭발했다기엔 너무 예상 밖이었다.
원작의 루드베키아가 그토록 프레이야한테 악독하게 굴어도 이런 식의 상황은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대체…….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스케는 이제 짧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넘기며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의원이 도착하려면 좀 걸릴 테니까 그때까지…….”
“시, 싫어요.”
“뭐?”
쿠당탕!
나는 의자에서 떨어지다시피 하며 그에게 매달렸다.
정강이가 얼얼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가 놈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일단 이놈을 풀어야 한다. 거짓말을 한다고 더 맞는다 하더라도…….
“지금 대체 뭐 하는…….”
“싫어요. 돌아가기 싫어요. 잘못했어요. 제가 전부 잘못했어요. 제발 이렇게 버리지 말아주세요…….”
울면 짜증을 돋우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선 다른 수가 없었다.
나는 끅끅 흐느끼며 무릎을 제대로 꿇고 앉아 양손을 맞잡았다.
이스케는 오늘 아침 마구간에서 본 그것과 비슷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제가 영애께서 하시는 말을 잘못 알아들었나 봐요. 제가 어떻게 감히 영애께서 거짓말을 하셨다고 꾸며낼 수가 있겠어요. 여, 영애께 사과드릴게요. 다른 분들한테도 전부 사과드릴게요. 앞으로 아무 짓도 안 하고 집에만 얌전히 있을게요.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제발 용서해 주세요.”
“…….”
“하, 하라고 하시는 대로 다 할게요.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게요. 제가, 제가 잘못한 만큼, 화 풀리실 때까지 달게 맞을 테니까…….”
반쯤 얼이 나간 듯 보이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져 갔다.
다음 순간 그가 내 양어깨를 붙들고 일으켜 세웠다. 뺨을 칠 듯싶어 눈을 질끈 감는 찰나였다.
“나는 네가 너무 싫다.”
송곳처럼 귀를 찌르는 음성에 히끅, 하고 딸꾹질이 나왔다.
나도 잘 알고 있다고 이놈아!
이미 잘 아는 사실임에도 그가 내게 이런 식으로 결연하게, 들끓는 감정을 생생하게 한껏 담아 말한 적은 처음이었기에 순간적으로 반쯤 얼이 빠져 버렸다.
이스케는 타오르는 불꽃 같은 눈으로 내 눈을 쏘아보면서 한 자 한 자 힘주어 으르렁거렸다.
“나는 네가 너무 짜증이 나.”
“히끅…….”
“내가 뭣 때문에 이 밤까지 그 야단을 떨었는지, 어디서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닌 걸 네가 대체 뭐라고 이따위로 신경을 쓰게 만드는지……. 네가 하는 짓이라곤 더럽게 불쾌한 것들뿐인데 빌어먹을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알 수가 없어서 미치도록 짜증 난다고. 차라리 출신답게 도도하게 콧대나 세우고 돌아다닐 것이지 왜 계속 이따위로 굴어서 사람을! 대체 네가 뭐라고, 네가 떠드는 소리라곤 전부 헛소리뿐인데 왜 내가, 이 내가 매번 네 말을 곱씹고 있는 건지……!”
뭐……?
“알 수가 없어서 미치겠어. 그래서 네가 너무 싫고 짜증이 나.”
숨이 막혀왔다. 그로부터 뒤죽박죽 흘러나오는 감정의 파도가 너무 격렬해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동안 우리 둘 다 서로를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글거리는 그의 시선이 매섭기 그지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눈을 뗄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문득 서늘한 안도감이 심장을 치고 지나갔다.
단지 프레이야 때문에 나를 보내려던 게 아니구나. 그런 게 아니었어. 그걸로 내게 질려버린 게 아니었어.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십년지기 소꿉친구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내 말에 조금이나마 흔들렸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암담한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쳐드는 듯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조각이 연민이든, 흥미든, 다른 무엇의 응집체이든…….
이렇게 강렬한 이상 내게는 아직 희망이 있었다.
미상의 작자가 말했듯이 푸른 수염과 빛나는 기사님은 같은 사람이라는 거, 이미 알고 있으니까.
“제가, 히끅,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뭐든 다 할게요. 뭐든 다 할 테니 제발 버리지만 말아주세요.”
이스케가 천천히 내게서 손을 뗐다.
훌쩍이며 떨고 있는 건 나인데, 기분 탓인지 왠지 붉은 눈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내가 다시 입을 여는 찰나 그가 먼저 몸을 돌렸다.
문이 쿵, 하고 닫히는 소리가 멍멍하게 울렸다.
북부 최고의 기사는 그렇게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