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36)

* * *

모임이 열리는 기를레요 호수 기슭은 활달하고 소란스러운 분위기로 북적거렸다.

가벼운 승마복 차림의 사람들과 일대를 엄호하는 기사들까지 한데 뒤섞여 말을 타고 시시덕거리고 야외 테이블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 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나의 처지와 입장만 완전히 제거하고 보면 아름답고 낭만적인 풍경이다.

……물론, 그 낭만적인 분위기는 머지않아 와장창 박살이 났다.

“……워, X발, 저거 대체 뭐야?”

“야, 너도 보이냐?”

“어 나도.”

“환각 아닐까?”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남편아, 네가 성기사는 무슨 차라리 마수 대마왕 쪽에 가깝다는 사실은 나만 느끼고 있는 게 아닌 것 같구나.

네 친구들이 금방이라도 검을 뽑고 다가올 기세인걸.

다짜고짜 욕을 하거나 환각 타령을 해대는 이들은 양반이었다.

한 남자는 우릴 보느라 안장에서 떨어져 버렸으며 어떤 커플은 사이좋게 벌어진 입 밖으로 주스를 줄줄 내뿜고 있었다.

남들 좋은 분위기를 완전히 초토화해 버린 셈이 되었으나 이스케에게 머쓱해할 줄 아는 양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스케는 지체 없이 말을 몰아 한 무리의 여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가까이 다가갔다.

엘레니아가 있는 곳이었다.

경악 그 자체인 주변 이들의 표정과 대조적으로, 엘레니아는 특유의 무심한 듯 새침한 얼굴로 차분히 인사를 건넸다.

“오빠가 웬일이야.”

“네가 벌인 일 수습은 언제나 내 몫이지.”

야유하듯 받아친 녀석이 안장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더니만 이것들이 그대로 가족 싸움을 벌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봐요들…….

“이걸 내 탓으로 돌리지 마.”

“네 탓으로 돌리는 거 아니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너더러 어째 달라고 한 기억 없는데.”

“차라리 처음부터 확실히 하든가.”

“그랬으면 네가 뭐 어쩌게.”

“빈정대지 좀 마. 난 적어도 고마워하고 있다고. 아버지랑은 달라.”

“네가 우리 집안의 유일한 양심이라는 사실은 나도 알지. 그러니 그만 싸움 걸지 그래?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거든.”

이 안하무인 남편 녀석은 그렇다 쳐도 위엄 기품 그 자체인 엘레니아는 왜 갑자기 저러는 거야.

이러니까 내가 분란의 씨앗 그 자체 같잖아.

엘레니아의 곁에 앉아 있던 프레이야가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프레이야는 꼿꼿이 앉아 있는 엘레니아와 안장을 쥐고 오만하게 서 있는 이스케 사이에 서서 보라색 눈을 걱정스럽게 빛냈다.

“그만해, 너희 둘 다. 이렇게 다툴 일도 아니잖아. 이스 너도 그만하고 부인이랑 같이 놀다 가. 응?”

소꿉친구의 다정한 장난기가 밴 타박에도 불구하고 개차반 남편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엘레니아 역시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꿈쩍도 하지 않고 제 오빠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기…….”

가볍게 뛰어내리려다 너무 능숙하게 보이긴 좀 그래서 살며시 몸을 기울이는 찰나 이스케가 팔을 홱 뻗어 나를 붙들었다.

어찌나 빨랐는지 나는 그만 안장에서 떨어지다 놈의 육중한 팔뚝에 가까스로 기댄 형국이 되어버렸다.

아아, 이거 싫어. 병아리 신세는 불안하다고.

술렁임이 일었다. 짜증 나게 수군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바보처럼 헤실 웃었다.

“싸, 싸우지 마세요.”

“뭐?”

“저 때문에 화내시지 말아요. 잘생긴 얼굴 망가져요.”

한결같은 이스케는 잠시 말없이 나를 빤히 노려보았다.

사탄의 화신처럼 번득이는 눈길이 매우 살벌하다. 여차하면 던져 버릴 것을 대비해 몸을 꼼지락대며 힘을 주는데 놈이 마침내 으르렁거렸다.

“나 화 안 났어, 젠장할, 엘렌 너 화났냐?”

“그건 아니고.”

곧바로 툭 대답한 엘레니아가 내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뭐 이런 싱거운 남매가 다 있어.

어이가 없었지만 당연히 내색하지 않으며 활짝 웃었다. 발이 평평한 잔디 위에 닿자 좀 살 것 같았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오늘을 두고두고 잊지 않을 거예요.”

“…….”

“일기도 쓸 거예요. 그래도 되나요?”

“……마음대로 해.”

성의 없는 투였으나 그런대로 무난한 반응이다.

흥미로운 극성팬 노릇 하기 힘들구먼.

마찬가지로 흥미롭다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던 프레이야가 빙긋 살갑게 미소를 지었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부인. 다들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빈말이라도 고맙군요.

고분고분히 테이블로 다가가 앉는데 하필이면 찻잔 손잡이가 보석 눈알이 박힌 거북이 모양 장식이었다.

오늘 진짜 강행군이군.

“저어, 엘렌…….”

“추한 꼴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저흰 원래 항상 이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사무적인 톤으로 자르듯 내뱉은 엘레니아가 핑거 푸드가 담긴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것까진 좋았는데, 글쎄, 접시에도 거북이 머리 장식이 달려 있었다!

최대한 장식들을 안 보려고 애쓰며 차만 열심히 들이켰다.

내 옆자리에 앉은 프레이야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저대로 그냥 둬도 괜찮을까?”

“내버려 둬.”

엘레니아는 매정했다. 어느덧 남편 녀석은 말을 끌고 저만치 가버리고 있었다.

놈 주위로 기다렸다는 듯 다가가는 장정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힐끔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아, 네. 감사합…….”

“엘모스항에서 쓰러지셨다는 소문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피까지 흘리셨다면서요?”

나는 끙 하고 신음을 삼켰다. 하긴 그때 거기 있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소문이 퍼지는 것도 무리도 아니긴 하다.

그렇다고 내가 볼썽사납게 코피를 다 터뜨렸다는 걸 꼭 이 자리에서 지적해야 해? 응?

콘솔라시온인지 뭔지 하는 영애님. 그쪽도 지난번부터 참 한결같군요.

“맞아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뭐예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이 방긋 웃자, 콘솔라시온 영애는 찡그리는 건지 미소 짓는 건지 애매한 표정을 짓더니만 다시 시도했다.

“부인께선 몸매에 굉장히 신경 쓰시나 봐요.”

“네?”

“이미 상당히 마른 편이신데 지난번부터 뭔가를 드시는 모습을 못 보아서요. 혹 이곳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신 건가요?”

회색 눈동자가 진심으로 염려스럽다는 듯 반짝인다.

겨우 두 번 봐놓고는 뭘 못 봤다고 장담이야. 먹는 걸로 지적질이라니 못됐군.

“그리 보이시나요? 제가 원래 입이 짧은 편이거든요.”

“저런, 남부 유행은 어떨지 몰라도 이곳 기후를 견디시려면 건강이 필수랍니다. 아시다시피 워낙 별일이 다 일어나는 곳이라 서로 민폐가 되지 않게끔 처신하는 편이거든요.”

그렇군요. 저 같은 귀부인은 민폐로군요. 웃기시네.

그럼에도 나는 한결같이 해맑게 웃으며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아, 염려 감사드려요. 지난번부터 정말 다정하신데, 앞으로 제가 이것저것 상담해도 괜찮을까요? 아시다시피 제가 이곳에 아는 분이 거의 없어서 뭔가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거든요.”

“……뭐, 언제든지요.”

“진짜요?”

“……그러세요.”

떨떠름하게 중얼거린 콘솔라시온 영애가 고개를 새침하게 돌렸다.

왠지 짜증스러워 보이는 기색이다.

알아, 이해해. 모욕도 말이 통해야 긁는 맛이 있지. 걱정 말렴, 나도 너희가 좋아서 백치 짓 하는 게 아니거든.

“루비.”

“네……?”

“카스텔라가 맛있습니다.”

……네, 카스텔라가 맛있군요. 먹으라는 건가?

오늘의 엘레니아는 왠지 모르게 무서웠기에 나는 슬그머니 샛노란 카스텔라를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이놈의 거북이만 좀 안 보여도 좀 괜찮을 텐데.

“기분 풀어. 그러게 왜 별일도 아닌 걸로 갑자기 다투고 그래? 그렇게 우애도 좋은 것들이.”

“우애가 좋은 건 너희지.”

“우리? 로렌은 착하긴 한데 워낙 말썽꾸러기라. 나도 좀 든든한 오빠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장난스럽게 말끝을 흐린 프레이야가 내 쪽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부인께서도 예하들과 우애가 몹시 좋으시다 들었어요.”

우리 가족 중 예하는 하나밖에 없었다. 엔죠는 기사이지 추기경이 아니었으니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냥 평범해요. 오빠들이 제 어리광을 많이 참아주는 편이죠.”

“부럽네요. 전 제가 어리광을 받아주는 쪽이라서…… 많이 보고 싶으시겠어요.”

“솔직히 별로 생각도 안 나요. 벌써 여기가 너무 좋아져 버려서요.”

프레이야는 이스케와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 중 하나였다.

비단 그녀가 아니라 해도 나에 대한 그렇고 그런 소문이 팽배한 이상 말을 조심해야지…….

“발렌티노 추기경께서 올해 에렌딜에 방문하실까요?”

일전에 로마냐로 여행 갔다 음식이 입맛에 안 맞아 고생했다고 떠들었던 영애가 눈을 반짝이며 던진 질문이었다.

윽, 소문이랑은 별개로 체시아레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잊고 있었네.

제발 오지 마라. 제발 오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이미 온다는 걸 알고 있으니 괴롭구나.

“잘 모르겠어요. 전 아직 아무 소식도 못 들었거든요.”

검투 경기가 늦가을 무렵이니 놈이 오려면 아직 몇 달 남은 건데, 벌써 눈앞이 깜깜하다.

안하무인으론 체시아레나 이스케나 막상막하이니 양쪽 다 맞추려면 이 몸이 죽어 나가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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