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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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이곳 땅을 밟게 되었던 장소, 엘모스항구는 신선한 바닷바람과 더불어 탁 트인 선착장의 풍경, 등대와 인근의 여관들과 술집 등이 한데 어우러져 평화롭고도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장소였다.

그러나 현재 사방팔방에 도시 경비대 완장을 찬 경비대원들과 시커먼 갑옷 차림의 팔라딘들이 뒤섞여 서성거림으로써 아름다운 항구의 풍경을 왠지 모르게 삼엄하고도 으스스하게 만들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분위기가 꽤 진지한데, 같이 정찰하면서 회담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누구 중요한 사람이라도 도착하는 걸까?

이쯤에서 외국 귀빈이 찾아온 기억은 없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를 세워놓고 걸어가니, 낮은 돌담 너머 바로 보이는 한 술집 주변 계단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대낮부터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는 한 무리의 경비대원과 팔라딘들이 보였다.

아니, 이봐요들…… 쟤들 진짜 성기사 맞아?

나는 돌담 뒤에 몸을 감춘 채 눈을 빼꼼히 내밀고 분주한 항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 나 이러니까 진짜 스토커라도 된 것 같잖아. 살아남기 힘들다.

과연 이스케는 그곳에 있었다.

무시무시한 남편 놈은 붉은 턱수염을 기른 우락부락한 외양의 경비대원과 퍽 진지해 보이는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며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찾아내서 다행이었다.

자, 이제 어떻게 접근해 볼까나?

“도도한 것…….”

“누구 말씀이십니까?”

오 신이시여 제발. 하마터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터져 나올 뻔한 비명을 꾹 억누르며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그러고는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와 나와 똑같은 모양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웬 소년을 보게 되었다.

가만, 얘 어디서 봤는데……. 아, 맞아. 그 망할 연못가에서 이스케 찾으러 왔던 그 종자 아닌가?

내가 잠시 빤히 바라보고 있자 종자가 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맑은 호박색 눈동자였다.

반듯한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칼이 문득 체시아레를 떠올리게 했지만, 체시아레의 머리는 이런 갈색빛의 흑발이 아니었다.

“아,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부인께서 왠지 모습을 감추고 계시는 듯해서 저도 모르게…….”

그래서 너도 모르게 따라 했다고? 얘도 좀 독특한 녀석 같군.

그래도 그 로렌초인지 하는 애새끼처럼 괴상한 적대감을 풀풀 풍겨대진 않으니 다행이다.

“괜찮아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궁전에서…….”

“괜찮으니 이러고 있지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방긋 웃으며 대답하자 독특한 종자분은 잠시 내 얼굴을 빤히 마주 보더니, 이내 어정쩡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속삭이는 톤으로 말했다.

“전 실은 이스케 경의 종자입니다.”

오오, 그것참 놀라운 사실이군요.

“그러신 것 같았어요. 얼마나 되셨어요?”

“실은 얼마 안 됐습니다. 제 전에 있던 다른 종자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운 좋게 꿰찬 거거든요.”

“사고요?”

“예. 경 계신 자리에서 눈치도 없이 외설적인 노래를 불러댔지 뭡니까.”

으음. 설마 그 노래가 내가 아는 그 노래인가 하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로렌초가 불러준 그……. 얘도 나더러 궁금하냐고 떠보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한데 부인께선 왜 이렇게 숨어 계시는 겁니까? 이스케 경을 만나러 오신 거 아닙니까? 제가 가서 모셔 올까요?”

“아니요, 그건…… 전 만나려고 온 게 아니라 그냥 보고 싶어서 잠깐 들른 거라서요.”

“아, 이해합니다. 멀리서 감상하는 게 제일 좋은 분이긴 하지요. 그래도 부인께는 꽤 상냥하신 편 아닙니까? 그냥 가신 거 알면 서운해하실 텐데요.”

이 녀석의 사전에 쓰인 상냥함이란 대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지는군.

그럼에도 나는 슬쩍 눈을 수줍게 내리깔며 던졌다.

“그리 보이시나요?”

“예. 원래 여인더러 자길 기다려 달라고 애원할 분이 아니십니다.”

“…….”

“아, 제가 이 말 했다고 말씀하지 말아주십시오. 저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이쯤이면 이 녀석 이스케한테 하도 처맞고 살아서 나사 몇 개가 빠진 게 아닐까 싶어지는데. 나는 그만 다른 화제로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여기서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궁전 연못 사건도 그렇고 최근 들어 갑자기…….”

“다음부터는 차라리 납작 엎드리지 그래?”

머리 위에서 불쑥 울린 공포스러운 으르렁거림에, 열심히 속닥이던 우리 두 사람 모두 히익 하고 소스라쳤다.

아, 진짜 내 심장아.

“경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맞아요, 맞아. 역시 완벽하세요.”

이스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맑게 웃으며 열심히 맞장구를 치는 우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녀석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움찔거렸다.

어머나, 무섭기도 하셔라.

“아아, 역시 부인이셨군요. 저흰 또 앤디미온 저놈이 누구랑 숨어서 우리 욕을 하나 싶었습니다.”

지은 죄가 많으신가 봅니다, 그런 걸 다 걱정하시게.

그나저나 요 종자 녀석 이름이 앤디미온이었구나.

나는 쪼그리고 앉은 몸을 슬며시 일으켜 세웠다. 현기증이 약간 일었지만 괜찮았다.

“안녕하세요, 아이반 경.”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제 많이 놀라셨을 듯해서 걱정했습…… 야, 앤디, 넌 얼른 꺼져라. 눈치도 없냐 새끼야?”

장미꽃잎이 휘날리는 듯한 환영이 보일 정도로 예쁘게 웃으면서 저런 말이라니, 아이반 경도 보면 볼수록 인물이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 당연한 거지요. 그나저나 이 흉포한 새끼 만나러 오신 겁니까?”

그 흉포한 새끼는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는 제 종자를 향해 무시무시하게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런 다음 다시 나를 노려보았다.

넌 어쩜 얘가 이렇게 한결같니?

“죄송해요.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어제 일을 감사드리고 싶어서…….”

“그건 이 새끼가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부인. 제 주제에 부인을 구하는 영광을 누렸으니까요. 안 그러냐, 새끼야? 양심이 있으면 대답 좀 하지?”

물론 이스케에게 양심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이스케는 친구의 이죽거림을 깡그리 무시하며 제 할 말만 내뱉었다.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무, 물론 그렇지요. 제가 죽으면 다들 입장이 난처해지니까요.”

“뭐?”

“자자, 부인, 그러지 마시고 저희랑 같이 가서 점심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 새끼도 좋아할 겁니다.”

우아하게 끼어든 아이반 경이 이스케의 우람한 어깨를 무지막지하게 꽉 움켜쥐었다. 어이쿠, 간도 크셔라.

“정말 제가 끼어도 되나요? 혹 친한 분들끼리 얘기 나누시는 데 방해될까 봐요.”

“예?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희 별로 안 친합니다. 애초에 친해지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엘렌이랑 그, 퓨리아나 영애께서 불편하실 것 같은데…… 전 그냥 이만 집에 돌아가서 쉬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내가 질투와는 조금의 접점도 없는 순수한 팬 그 자체라는 점을 한껏 어필하려는데 두 성기사 같잖은 놈들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예? 그거야……. 부인?”

응?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왜 부르니?

나는 순진하게 머리를 갸웃거렸다. 한데 두 놈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아이반 경은 둘째 치고 이스케 저놈까지 왜 저렇게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는 거지? 적응 안 되게…….

주르륵.

코 밑으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감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나는 당황했다. 아니, 잠깐, 설마 내가 남편 놈과 남편 놈의 친구 앞에서 멍청하게 콧물 흘리는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인 거야?

천만다행으로 그건 콧물이 아니었다. 곧바로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며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액체는 검붉은 색이었다.

콧물이 아닌 게 어디겠냐마는 그래도 갑자기 코피라니!

몸 상태가 연례행사 중이라 해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

“부, 부인,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창피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아무리 극성팬 연기 중이라 해도 그렇지 볼썽사납게 코피라니!

반사적으로 손등을 올려 뚝뚝 흐르는 피를 훔치려는데 머리가 휘청했다.

비틀거리는 내 어깨를 누군가가 빠르게 붙들었다.

“너…….”

돌담 너머로 건틀렛 낀 육중한 팔을 뻗어 나를 붙든 이스케가 문득 멈칫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봐, 이 한결같은 자식아, 너의 한결같이 삐딱한 심보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만 내가 일부러 코피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너, 왜 이렇게 뜨거워?”

응? 뜨거워? 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연례행사 중이라 뜨거운 고행에 시달리는 중이긴 한다만 네가 그걸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잖니.

속이 타는 것 같으면서 바늘로 온몸을 콕콕 찌르는 듯한 후끈거림이 좀 전보다 심해지긴 했으나 으레 겪는 현상이었다. 코피가 터진 건 처음이었지만.

아무래도 나의 극성팬 연기가 메소드의 경지에 다다른 듯한데.

“미안해요. 일부러 이런 꼴 보이려던 게 아니…….”

창피함을 무릅쓰고 씩씩하게 잇는 내 말을 놈이 툭 끊었다.

홍옥 같은 눈동자가 전에 없이 생소한 빛을 띠고 있었다.

“너 여기 누구랑 왔어.”

“당연히 혼자 조용히…….”

“진짜 미치겠군. 지금 이 꼴을 하고서 혼자 나왔다고?”

몸이 허공으로 홱 들리는 바람에 다시 현기증이 일었다.

이스케는 내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고는 무슨 짐짝 들 듯 가볍게 들쳐 안았다.

아, 독수리 발톱에 꿰인 병아리가 딱 나 같은 기분일 거야.

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던져버릴 것 같아서 참았다.

황급히 손수건을 건네는 아이반 경의 담록색 눈동자가 심각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부인, 누가 의원을 부르러 갔습니까?”

나는 연례행사 중이었고, 의원을 부르러 간 이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다른 병이었어도 아무도 안 갔을 테지만.

“의원을 부를 만한 일이 아닌걸요. 죄송해요, 그냥 햇볕을 좀 쬐었더니 어지러워서 이렇게 된 것뿐이에요.”

“아이반, 손수건 이리 줘봐.”

“어느 정도야?”

“정도가 무슨 상관이야, 제기랄, 펄펄 끓는 냄비가 따로 없는데.”

“아니, X발…… 죄송합니다, 부인. 야, 언제부터 너희 집에 버러지들만 모여 일했냐?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도 몰랐다는 게 말이 돼?”

말이 되긴 했다. 나의 연례행사는 남은 아무 증세도 못 느끼는 괴상하기 그지없는 고통이었으니까.

저명하다는 의원들조차 머리를 갸웃대기만 한지라 그저 남의 몸에 들어온 부작용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남편 녀석이 내가 끓는 냄비처럼 뜨겁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혹스러우면서도 신기했다.

그리고 어질어질했다. 시야가 가물거리면서 곧 맥없이 안긴 몸이 축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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