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페아놀 국왕이 입을 열었다.
온화하고 기품 가득한 인상의 북부의 왕께서는 적당히 사무적이고 호의적으로 느껴지는 어조로 말씀하셨다.
“먼 길을 오시느라 아직 여독이 채 가시지 않았을 텐데, 이리 자리를 빛내주어 고맙구려, 레이디 루드베키아.”
“저 역시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조카 녀석이 짐의 연회에 제때 등장하는 건 드문 일이오만, 오늘 보니 과연 사내놈들은 결혼하면 철이 드는 모양이오. 안 그런가, 이스케 경?”
보아하니 페아놀 왕은 그간 안하무인 조카에게 쌓인 것이 상당하신 모양이었다.
마찬가지로 나와의 혼사 건으로 외숙에게 쌓인 것이 상당할 이스케는 저 속 긁는 농에 퍽 정중한 태도로 대꾸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지 않습니까.”
인자한 전하의 존엄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진심으로 대로하여 일그러진 표정이 아니라 묘한 씁쓸함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그 소리 안 듣겠다고 여태 그 청승을 떨던 것 아니더냐.”
“뭐 누굴 탓하겠습니까, 제 발등을 제가 찍었으니 팔자려니 생각해야지요.”
듣는 사람이 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서늘한 냉소가 어린 음성이었다.
조금 전 나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
이스케는 저를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살피고 있는 내 쪽을 한 번 힐긋 쏘아보고는,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혀를 쯧 차며 그대로 폭풍처럼 퇴장해 버렸다.
저 녀석의 유아독존은 체시아레와 쌍벽을 이루는군.
여기저기서 숨죽여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네, 마음껏 비웃으시라고들. 남편이 버리고 가도 실실 웃고 있는 바보가 바로 나랍니다.
“내 저놈이 이시스 누님의 자식새끼만 아니었어도…….”
“진정하세요, 전하. 새신부께서 놀라시겠습니다.”
크게 한탄을 터뜨리려는 왕을 나긋이 진정시킨 왕비께서 내 쪽을 향해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풍성한 적갈색 머리카락. 눈가 아래 점이 돋보이는 레몬색 눈동자.
왕족으로선 보기 드문 옅은 커피색 피부가 눈에 띄었다.
동방의 노예 출신이라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맞는 모양이다.
“자아, 공주. 그렇게 쳐다보는 건 실례랍니다. 예를 갖춰 인사드려야지요.”
이제 예닐곱쯤 됐을까.
청록색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던 왕녀가 제 등을 살짝 밀치는 왕비를 올려다보았다. 길게 땋아 내린 적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앙그반 궁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레이디 루드베키아.”
“감사합니다. 아리엔 공주님.”
활짝 웃으며 마주 인사하자 재빨리 다시 왕비의 치마폭 뒤로 몸을 숨긴 왕녀가 어물거리며 눈을 빼꼼 내밀었다.
잔뜩 움츠러든 새끼 고양이 같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보니 원작에서 왜 이 왕녀의 존재가 그토록 미비했었는지 확 와 닿았다.
페아놀 왕은 이교도국 노예 출신 무희에게 왕관을 줄 정도의 사랑꾼이었지만, 어미를 닮아 이교도인의 특색이 짙은 딸에게 여느 공주와 같은 입지를 줄 순 없었다.
그건 왕이 아무리 노력한들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스케와 엘레니아 남매 같은 사촌을 둔 이상, 아리엔은 브리타냐의 귀족 사회에서 영원한 이방인일 것이다.
내가 지금 누굴 동정할 처지는 전혀 아니긴 했으나 그럼에도 약간 연민이 일었다.
젠장, 이 세계나 저 세계나 참.
어쨌든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나자 본격적으로 연회가 진행되었다.
악단들이 연주하는 곡과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웃음소리와 잔을 부딪치는 소리와 보석 장신구가 잘그락거리는 소리 등이 거대한 연회장 안을 가득 메웠다.
“소매가 특이하네요. 남부 유행인가 봐요?”
“아하하, 아직 새 드레스를 기다리는 중이라서요.”
“벌써 새 옷을 맞추신 거예요?”
“이곳 음식은 입맛에 맞으시나요? 전 예전에 로마냐 방문했다가 남부 음식이 안 맞아서 고생했거든요.”
엘레니아와 함께 만찬 테이블에 앉아 있자니 이런저런 질문들이 쏟아졌다.
제대로 망신을 당해놓고도 속 좋게 생글거리는 나를 연민 반 조롱 반 뒤섞인 눈길로 힐긋거리는 거야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 더 그렇게 보라고! 누굴 해칠 생각을 할 만한 것도 못 되는 바보 천치로!
“휴, 엘렌.”
“프리? 어디 다녀왔어?”
아까부터 행방이 묘연하던 프레이야가 마침내 다시 나타나 우리 테이블에 합류했다.
그 잠깐 사이에 승마라도 한 것처럼 싱그러운 혈색이 보기 좋았다.
프레이야는 엘레니아의 오른편에 앉으며 곧바로 나를 향해 말했다.
“죄송해요, 부인. 그 녀석 다시 데리고 들어와 보려고 했는데 이젠 제 말도 귓등으로 흘리더라고요. 하여간 기사도는 어디에 두고 왔는지…….”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오빠가 언제 우리 얘기 듣는 시늉이라도 하니.”
“그런가? 에휴. 부인, 승마 좋아하세요? 저랑 엘렌이 여름철마다 승마 모임을 주최하고 있거든요.”
“아주 잘 타진 못하지만 좋아하는 편이에요.”
“걱정 말아요, 좋아하기만 하면 되니까.”
실은 그 반대였다.
이전 삶에서 나는 꽤 실력이 좋은 편이었으나, 승마 자체는 좋아하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승마 클럽이 싫었던 것도 같다. 이곳에서는 이동 수단이 그것뿐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두 분 영애의 실력은 누구도 따라잡기 어렵죠. 이스케 경께서 도와주신 거니 당연하지만요. 부인께서도 남편분께 도와달라고 하시는 건 어떤가요?”
맞은편에 앉은 여식 중 하나가 나를 향해 생긋 웃으며 던진 말이었다. 가늘게 휘어진 회색 눈동자가 도발적으로 반짝였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프레이야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건 어릴 때 일이랍니다, 콘솔라시온 영애. 게다가 제 소질이 출중했던 것도 있다고요?”
“물론 그렇지요. 오해 말아주세요, 퓨리아나 영애.”
프레이야의 농기 섞인 타박에 콘솔라시온 영애는 선선히 사과하고는 주변 이들과 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즐거워 죽겠다는 눈빛이다.
왜 저런 애들은 어딜 가나 꼭 한 명씩 있는 거지?
“염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로 안 그래도 바쁜 분 시간을 뺏을 순 없죠.”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콘솔라시온 영애는 방긋대는 내 얼굴을 황당하다는 듯 멀거니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목을 가다듬으며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로 화답했다.
갑자기 흥이 사라졌니? 호호.
“그나저나 슬슬 여름도 끝자락이네요. 올해 검투 경기는 지난번보다 더 일찍 열릴 예정이라지요?”
“이스케 경께서 올 경기엔 참석하시려나요?”
“음, 기대되긴 하는데 이스케 경께서 참석하시면 우승자가 너무 뻔할 듯한데요.”
“올해는 또 어떨지 모르지요. 전 그것보다 이번 영광의 꽃이 누가 될지 궁금하네요.”
대화는 금방 다른 화제로 옮겨갔다.
검투 경기 얘기가 나오자 괜스레 속이 메슥거렸다.
이번 검투 경기 시즌에 체시아레가 방문해 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3년에 한 번씩 에렌딜에서 열리는 검투 경기는 대륙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최대 행사인 만큼 각국의 참가자들과 방문객들이 몰려오게 마련이었다.
사람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라 흉포하게 길들여진 마물들을 상대로 치르는 경기.
데스매치 그 자체인 무시무시한 대회임에도 오직 귀족 출신만이 참석 가능했으며, 파울 행위 식별과 만일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구성된 위원회는 전원 성직자들로 꾸려졌다.
그렇다. 체시아레가 오는 건 위원회 관할 핑계 겸 나를 보기 위함이었다. 젠장할.
“입맛이 없으십니까.”
언제나처럼 냉랭하고도 무심한 얼굴로 앉아 오가는 대화를 듣기만 하던 엘레니아가 불쑥 나를 향해 던진 질문이었다.
내가 술잔만 홀짝거리고 있다는 걸 관찰하신 것인가?
“그냥 술맛이 너무 좋아서요.”
“빈속에 술만 드시면 안 좋습니다.”
아, 네. 나는 반쯤 마신 술잔을 슬며시 내려놓고 앞의 접시에 놓인 레몬 파이를 야금거리는 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들 춤 대열에 합류하러 자리를 뜨는 분위기가 됐을 때쯤 화장실 핑계를 대고 슬쩍 빠졌다.
파이 부스러기를 토해내려는 건 아니었다.
이런 데서 토하다 누가 본다면 이상한 소문이 돌 우려가 심각하니 그저 발코니에서 잠깐 바람을 쐴 생각이었다.
확실히 빈 속에 술만 마셨더니 약간 어지러웠던 것이다.
“앗……!”
“이런, 실례했습니다.”
연회장을 나와 가장 가까이 보이는 발코니로 들어서려는데 맞은편에서 빠르게 튀어나온 누군가와 어깨를 세게 부딪쳤다.
이놈의 어깨는 오늘 수난 시대인가 보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나를 상대방이 손을 잡고 황급히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꽤 어리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어깨의 고통을 참기 위해 인상을 약간 찡그리며 고개를 드니 왠지 낯익은 느낌의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키는 컸지만 앳된 얼굴이었다. 이제 열다섯쯤 되었을까.
목덜미를 덮은 창백한 금발과 예쁘장한 얼굴선이 누군가와 많이 닮아 있었다.
“괜찮아요. 한데…….”
“아, 전 로렌초 반 퓨리아나입니다. 제 누님과 조금 전까지 함께 계셨지요?”
역시 프레이야의 동생이었구나. 어쩐지 닮았더라. 아니, 그런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연회장까지 부축해 드릴까요?”
“정말 괜찮아요. 막 바람 쐬러 나오던 참이었거든요. 팔라딘이신가 봐요?”
“이스케 경께서 들으시면 웃으실 겁니다. 아직은 종자일 뿐이거든요. 한데 연회가 지루하신 겁니까?”
연회야 언제나 지루하지요. 그런데 넌 왜 날 싫어하니?
눈앞에서 웃고 있는 소년은 꽤 친절하고 쾌활하게 굴고 있었지만, 녀석이 온몸으로 내뿜는 적의가 너무도 생생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가 그런 유의 기류에 예민한 것도 있었지만 눈빛에 깃든 혐오감이 지나치게 명백했다. 아마 나이가 어린 탓이리라.
이 새끼 봐라? 날 언제 봤다고 여기서 만난 인간 중 최고로 싫은 티를 풀풀 풍기니?
내 남편 녀석도 이 정도는 아닌데.
엘레니아로 말하자면 원체 종잡기가 어려운 신이 내린 포커페이스고, 프레이야는 막 만난 만큼 좀 애매하긴 했으나 적대감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그런데 이 프레이야의 동생 녀석은 왜 혼자 이 야단일까?
내가 말없이 미소를 짓고 바라보자 녀석 또한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지레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 죄송합니다. 부인을 이리 실물로 뵙게 되니 믿기지 않아서…….”
“제가 이곳에서 유명한 것처럼 들리네요.”
“부인의 존함을 모르는 이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교황 성하의 따님이신데.”
“그런가요? 제 오빠들이라면 모를까 전 그다지 유명할 일이 없는데, 좀 놀랍네요.”
짧은 침묵이 스쳐 갔다.
관자놀이를 긁적이는 시늉을 하며 뭔가 생각하는 척하던 로렌초가 이내 씩 웃으며 털어놓았다.
“실은 얼마 전까지 유행한…… 어떤 음유시인이 부른 부인에 대한 유명한 노래가 있거든요.”
“어머, 정말요?”
“금시초문이신 모양이군요. 한번 들어보시렵니까?”
“궁금하네요. 부탁드려요.”
“뭐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큼큼, 하고 과장스레 목을 가다듬은 녀석이 흥얼거린 노래는 바로 다음과 같았다.
“시스티나의 종달새는 취향에 들어맞는 사내를 찾을 수가 없다고 했지, 내 생각에 그녀의 배다른 오라비들은 괜찮을 거라네…….”
로렌초가 내게서 기대한 반응이 무엇이었든, 그것은 다음 순간 장엄하게 울린 파공음에 의해 영원한 미지의 존재로 남게 되었다.
뻑!
“아아악!”
“이 미친 애새끼가 진짜, 너 내가 혼자 개지랄 떨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어?!”
“아, 잠깐만요, 아아아악!”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옆 복도에서 무슨 바실리스크처럼 튀어나와 로렌초의 머리를 인정사정없이 후려친 뒤 마찬가지로 인정사정없이 귀를 잡아당기고 있는 기사는 다름 아닌 아이반 경이었다.
그 예쁘고 입 더러운 성기사분 말이다.
“주둥이 진짜 찢어버리기 전에 당장 사과드려!”
“하, 하지만…….”
“X발, 네가 존경한다고 지랄 떨어대는 이스케 저기 있는데 데려올까? 그 X같은 소리라면 학을 떼는 새끼가 네가 방금 지껄인 X같은 소릴 들으면 네 주둥이를 X같이 이쁘게 찢어주겠지. 그럼 넌 그 X같이 찢어진 주둥이로 오메르타 부인한테 사과하게 될 거고.”
이스케가 저 노래를 듣는다고 해서 프레이야의 동생의 입을 찢을 것 같진 않았지만, 어쨌든 로렌초는 이스케가 무섭긴 무서웠는지 혹은 고통에 굴복한 탓인지 아이반의 손아귀에 머리통이 푹 내리눌린 채 사과 비슷한 말을 웅얼거렸다.
“크게 안 하냐! 더 크게 짖게 해주랴?”
“저어, 전 괜찮으니 그냥 보내주세요.”
딱히 사과를 듣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애초에 화도 안 났다.
처연하게 미소 짓는 나를 한번 쳐다본 아이반 경이 이내 씨근덕거리며 손을 풀었다. 로렌초는 곧바로 줄행랑을 쳤다. 쯧쯧.
아이반 경은 이제 손을 탁탁 털며 마지막으로 낮게 욕설을 뇌까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사방에 꽃가루가 흩날리는 듯한 아리따운 미소를 띠며 나를 돌아보았다.
“지저분한 꼴 보여드려 송구합니다.”
“괜찮아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 애새끼가 지금…… 혼자 멋대로 이상한 망상에 빠져 있어서 맛이 간 것뿐입니다. 그런 불경한 노래는 저희 롱기누스 기사단 가운데 누구도…….”
“아이반 경, 정말 괜찮아요. 그런 소문이 있다는 사실, 처음 듣는 것도 아니거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이반 경이 조금 당혹스러워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다시 댐을 열고 있었다. 훌쩍훌쩍.
“부, 부인?”
“죄송해요. 전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제 남편이 혹 그런 소문을 믿으시는 거 아닐까 해서,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 자식은 애초에 남들이 떠드는 소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좀 필요한 경우에도 말이지요.”
“훌쩍. 정말로요?”
“그럼요. 뿐만 아니라 자길 귀찮게 하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는 고운 성정도 못 됩니다. 그래서 솔직히 아까 좀 놀랐습니다. 제 말은 부인께서 귀찮게 구셨다는 뜻이 아니라…….”
영광이라고 해야 하니? 쩝.
“그럼, 역시 이스케 경은 저를 막 싫어하시거나 혐오하시는 건 아니신 거죠?”
“절대 아닙니다! 그 새끼가 자기가 뭐라고 감히 부인 같은 분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냥 제멋대로만 살다가 처음으로 제멋대로 안 되는 게 생기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염병 떠는 것뿐입니다.”
“그럼 제가 마음껏 좋아해도 싫어하시지 않는 거 맞죠?”
“물론입니다. 아니 그래 주시면 그 새끼한테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응원 아닌 응원을 보내던 아이반 경은, 이내 내가 뭐 하는 건가 하는 자괴감에 젖은 표정이 되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이해해.
“큼, 저, 일단 연회장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저 어차피 바람 쐬고 싶어서 나온 거거든요.”
“그래도 혼자 계시면……. 알겠습니다. 만약 아까 그 애새끼가 다시 나타난다면 꼭 제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 풋내기가 다시 쫓아와서 날 울리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건가?
입은 더럽지만 기사도는 살아 계신 분이군.
홀로 발코니로 나오자 저녁 시간이었음에도 백야 현상으로 인해 대낮처럼 환한 풍경이 나타났다.
발코니 바깥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계단 끝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뜰과 예술적인 조각상들에 둘러싸인 호젓한 연못이 보였다.
머리도 복잡한데 구경이나 좀 할까 싶어 계단을 내려갔다.
드루몬디와 포플러가 우거진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연못 가까이 다가가는 참이었다.
하트 모양으로 머리를 맞댄 한 쌍의 백조 동상 옆, 아까 저 위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적갈색 머리채가 홱 하고 움직였다.
“아리엔 공주님……?”
백조의 꽁무니 뒤로 몸을 감추던 아리엔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앞으로 모아 쥔 손에 노란 여름꽃 한 다발이 들려 있는 채였다.
여기서 혼자 놀고 있던 걸까? 유모는 어디로 갔담?
“어, 어마마마한테 말하지 말아요.”
아, 네. 몰래 빠져나오신 거군요. 의외로 말괄량이셨군.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선선히 웃었다.
“말 안 할게요. 뭐 만들고 계세요?”
꼬마 공주님은 대답하는 대신 빼꼼 내민 눈으로 열심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 말이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나는 방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돌리고 연못가에 다가갔다.
꽤 거대한 연못 중앙에 우아하게 자리 잡은 다리가 눈에 띄었다.
“……혼자 거기 있으면 안 돼요.”
“네?”
“둘이 같이 있어야 사랑이 이루어진대요.”
어물거리며 내뱉은 아리엔이 동상 밖으로 몸을 완전히 뺐다.
‘사랑이 이루어진다’라.
궁전 안에 이런 연못이 있다니, 의외로 로맨틱한 사람들이로군. 하긴 왕부터가 한 로맨티시스트니.
“사랑이 이루어져요?”
“몰라요……. 유모가 그랬어요. 연못 속에 사랑을 이뤄주는 요정님이 산다고요.”
나는 몸을 굽히고 아리엔과 시선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이제 보니까 어린 왕녀는 다른 게 아닌 내 머리카락을 빤히 보고 있었다.
자기랑 머리 모양이 비슷해서 그런가?
“그건 꽃다발인가요?”
“……예뻐요?”
“네, 정말 예쁘네요. 누구 주려고 만드신 거예요?”
잠시 망설이듯 큰 눈망울을 또르르 굴리던 왕녀가 곧 머리를 끄덕이며 잘 알아듣기 힘든 톤으로 속삭였다.
“드릴게요.”
“네?”
“머리 만지게 해주시면 부인한테 드릴게요.”
응? 나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다 말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요?”
“지금 말고 나중에요.”
그러니까 내 머리카락을 인형 머리처럼 갖고 놀고 싶었던 거군요.
그럴 나이이긴 하다만, 이 꼬맹이 눈엔 내가 남부에서 온 거대한 인형쯤으로 보이나 보다.
뭐 인형이라면 인형이구나. 휴, 애들 눈은 무섭게 정확하다더니…….
“왕녀.”
에구머니나, 깜짝이야. 오늘따라 다들 왜 이렇게 사방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거야?
웃을 듯 입술을 오물거리며 꽃다발을 건네던 아리엔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 꽃다발을 받아들던 나 또한 잠깐 얼어붙었다.
오늘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예상치 못한 녀석이었던 것이다.
잿빛 은발이 반짝거린다. 우아한 조각상들 사이로 난 조그만 산책로를 성큼성큼 밟고 다가오는 이스케는 주변의 평화로운 풍경과 어우러져 더더욱 무시무시해 보였다.
내 치맛자락을 꼭 붙드는 아리엔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왜 그렇게 무서워하니? 네 사촌 오빠잖아.
이스케는 어쩌다 보니 바짝 붙어 있는 우리 앞 2미터쯤 떨어진 지점에 멈춰 서더니, 예의 한 점의 부드러움도 없는 무뚝뚝한 톤으로 툭 내뱉었다.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혼자 돌아다니시면 안 된다고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응?
다음 순간, 어린 공주는 내 손에 꽃다발을 던지듯 놓고는 새끼 고양이처럼 잽싸게 제 사촌오빠를 지나쳐 궁 쪽을 향해 뛰어갔다.
아무래도 자주 있는 일인 듯 이스케 또한 딱히 붙들려고 하지 않았다.
한결같은 남편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게슴츠레 치뜬 눈동자에 어이가 없다는 빛이 깃들었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그게 네가 할 소리냐?
나는 꽃다발을 그러쥔 채 살며시 몸을 바로 세웠다.
졸지에 여섯 살 먹은 꼬맹이랑 같은 취급을 받아 기분이 나빴으나 겉으로는 당연히 수줍게 살포시 웃었다.
“공주님을 찾고 계셨던 건가요?”
“아니. 너 찾고 있었다. 난 근위병이 아니야.”
뭐? 나를 찾아? 버리고 간 주제에 왜? 아무도 안 보는 데서 나 족치려고?
살짝 겁이 났으나 내색하지 않으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저를요? 진짜요?”
“……그래. 진짜.”
아까와 마찬가지로 무성의하게 툭 던진 녀석이 성큼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어머나, 진짜 때리시게? 좋아, 뭐 나중에 살려만 주신다면야…….
“뭐 해.”
“네?”
“눈 떠.”
나는 본능적으로 질끈 닫았던 눈꺼풀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바로 앞에 놈의 우람한 가슴팍이 보였다.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자 가관이 따로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들어왔다.
“로마냐의 공주님께서 맞고 자라기라도 하셨나.”
그걸 어찌 아셨는지요.
쳇, 너 같은 덩치가 그렇게 무섭게 다가오면 겁이 나는 게 당연하잖니.
대체 키가 몇이야? 2미터는 될 것 같은데.
“언제는 숨어서라도 보고 싶다더니.”
“그, 그냥 보는 것도 좋아요.”
“그래? 그럼 왜 이래? 입맞춤이라도 기대하셨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는 모습이 퍽 생소했다.
하던 대로 그냥 노려본다면 적응이라도 될 텐데, 붉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훑어보는 모양새가 더더욱 위험스럽게 느껴진다.
진짜 입맞춤 기대했다는 개소리를 한다면 넌 곧바로 꾸민 짓이라는 걸 눈치채겠지.
내가 어디 하루 이틀 이러고 산 줄 아니?
“그건, 아까 저 때문에 화가 나신 기색이 분명하셔서…….”
“그래서 내가 널 때리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그러신다면…….”
“그래서…… 너는 내가 널 때릴 걸 알면서도 좋다고?”
“안 되나요? 당신은 절 처음으로 지켜주신 분인걸요. 잘못된 점은 고치려고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미워하지만 말아주세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내가 양손으로 꽃다발을 꼭 쥐고 애절하게 눈을 반짝거리는 동안 이스케는 뭐라 종잡기 어려운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또 노려보기냐? 한결같은 것.
투박한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분명했으나 우리 둘 다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경! 이스케 경!”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던 남편 녀석이 그제야 고개를 힐끔 돌렸다.
헐떡이며 다가온 종자 차림의 소년이 우리를 보고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멈칫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흠. 팔라딘들이 자꾸 궁전 여기저기서 어슬렁대는 것도 그렇고,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여기서 잠깐 기다려.”
곧바로 몸을 돌리던 남편 녀석이 나를 향해 내뱉은 말이었다.
호오, 아직 내게 볼일이 남아 있는 거니? 별일이네. 머리에 꽃이라도 꽂고 기다려주련?
나는 멀어져 가는 녀석의 거대한 뒷모습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근처에 있는 판판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땋은 머리채가 흔들렸다.
그나저나 그 프레이야 동생이라는 애새끼가 대관절 무슨 망상에 빠져 있는 건지 궁금하네.
단순히 나에 대한 소문들 때문에 그토록 개인적인 적대감을 드러낸다고 보긴 어려운데.
존경하는 선배가 나 같은 여잘 아내로 맞게 되었다는 것 때문만이라고 보기엔 도가 지나치고…… 프레이야랑 뭔가 관련이 있는 건가?
한참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와중 문득 손에 쥔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보니까 루드베키아였다.
내 이름과 같은 꽃. 영원한 행복이 꽃말이랬는데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구나…….
등 뒤에서 불쑥 철벅, 하고 차가운 물이 튄 것은 그때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무언가가 내 몸통을 덥석 휘감고는 말 그대로 순식간에 물속으로 끌어당겼다.
비명을 지르거나 발버둥을 칠 틈조차 없었다.
풍덩!
물은 뼛속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잠시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이게 대체 무슨 허무한 엔딩인가, 하는 등의 생각이 들어야 마땅했으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웬 미친 연못 괴물한테 붙들려 있는 주제에 허무맹랑하다 할 수 있었지만, 지금 나를 꼭 끌어안고 있는 무언가는 나를 죽이려는 게 목적이라기보다는 그저…….
발버둥을 약간 치자 괴물 팔의 힘이 약간 느슨해졌다.
내가 이대로 뿌리치고 헤엄쳐 올라간다면 그대로 순순히 놓아줄 것 같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기분이 들었다.
뭐지, 얘는? 마치 나랑 장난이라도 치고 싶었던 것처럼…… 아니면 내가 너무 공포에 질려서 망상에 빠진 것뿐인가? 혹은 정신 공격 같은 것에 당하는 중이라든가?
허파의 산소가 점점 비어가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연못 괴물을 뿌리치고 올라가려고 했다.
물속에서 손을 움직여 내 허리를 휘감은 팔을 잡으려는 찰나였다.
어뢰라도 터진 것처럼 사방이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빛이 번쩍 내리쳤다.
몸을 붙들고 있던 감촉이 완전히 사라지나 싶더니 다음 순간, 이번엔 위쪽에서부터 무언가가 나를 붙들고 강한 힘으로 끌어 올렸다.
푸아하, 하고 막혔던 숨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머리가 온통 어질어질했고, 사방이 온통 시끌벅적했다.
“어떻게 이곳에서…….”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저놈들이 뭐라고 떠드는 거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간신히 눈을 뜨자 곧바로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무저갱의 사신처럼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남편 녀석이었다.
그런데 너 왜 키가 갑자기 작아졌니?
아, 네가 나를 들고 있구나.
뭐라 말할 수 없이 일그러진 홍옥 같은 눈동자가 나를 노려본다.
어떻게 된 건진 잘 몰라도 분위기를 보아하니 방금 그 연못 괴물이 마물이었던 듯한데, 설마 또 내가 일부러 일을 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지난번에 성화가 꺼졌을 때처럼?
“……와아앙!”
내가 순순히 당할 줄 알고. 한껏 공포에 겨운 울음을 터뜨리며 이스케의 목에 힘껏 매달리자 놈이 크게 움찔했다.
그러든 말든 나는 놈의 목을 졸라 죽일 기세로 매달리며 엉엉 서럽게 울음을 토해냈다.
“흐아아앙, 무서웠어요! 저를 또 지켜주셨군요, 역시 당신뿐이에요!”
일순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진 가운데 이스케가 내쉬는 한숨 소리만이 커다랗게 울렸다.
퍽 암담하게 들리는 한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