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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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휘장을 두른 마차가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를 달린다.

잘 닦인 전용도로 위로 파티를 향해 달리는 고급 탈것이라는 점에서 나의 이전 생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시대가 다르고 세계가 다르다 해도 사람들이 사는 모양은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차라리 많이 달랐다면 좋았을 텐데.

“이스 오늘도 빠지면 전하께서 노발대발하실 텐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쩌겠니. 알아서들 하겠지.”

내가 기억하는 대로라면 프레이야와 오메르타 남매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어머니들끼리 가까운 사이였고, 따라서 그들도 자연스럽게 친하게 자라왔다 했다.

그런 만큼 오가는 대화와 분위기에서 자연스러운 그들만의 유대감이 느껴졌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잘 알아온 이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것.

“이곳 연회가 부인 눈에 너무 촌스럽게 보일까 살짝 걱정이 드네요. 아시다시피 로마냐에 비하면 소탈하기 그지없는 동네라서.”

“그럴 일은 없으리라 생각해요. 제가 보기엔 오히려 에렌딜이 더 흥미진진한 곳 같은걸요.”

사교성 뛰어난 인상답게 프레이야는 내게도 이것저것 말을 붙였고 나는 나대로 최대한 겸손하게 호응했다.

으레 그렇듯 다분히 형식적인 대화였다.

몸에 밴 친절함과 호기심으로 호의적으로 대해주고 있긴 했으나 탐색하고 있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프레이야는 이스케와 엘레니아의 오랜 친구였고, 따라서 나 같은 평판의 여자가 친구의 아내가 됐으니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엘레니아 또한 나를 챙겨주고 있는 편이었으나 그것도 딱히 내게 호감이 생겨서라고 볼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한결같은 모습만 쭉 보여줘야겠지.

특히 이 두 사람은 남편 녀석 다음으로 중요한 이들이니까.

휴, 남편이 최종 보스라니 내 처지도 참.

앙그반 궁전에 도착하니 하늘을 향해 드높이 치솟은 브리타냐의 자랑거리, 달의 탑의 풍경과 앞서 도착한 귀족들의 인파가 우리를 맞이했다.

긴 소매가 달린 얇은 드레스 차림의 여인들과 짙은 연미복 차림의 남자들.

간혹 갑옷 차림 그대로 온 기사들도 눈에 띄었다.

대부분 팔라딘이었는데, 마물들이 판치는 동네에서 사제들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존재인 만큼 예법에 어긋난다고 눈총 사는 일은 없는 듯했다.

그런 팔라딘 중에서도 최고의 기사를 오빠로 둔 엘레니아는 단연 사교계 최고의 꽃이었다.

거기에 오메르타 가문의 위세, 국왕의 질녀라는 이점과 그녀 자신의 엄청난 미모, 흠잡을 데 없는 기품이 맞물려 다들 동경하면서도 조심하는 기색이 확연했다.

그리고 그런 오메르타 남매의 절친이자 퓨리아나 후작가의 여식 프레이야 역시 단연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속사정과 성질은 달랐지만, 왠지 로마냐 사교계에서의 나와 가족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연줄을 대려 나에게, 혹은 아버지의 정부 레이디 줄리아에게 온갖 호의를 베풀던 사람들.

떠도는 소문이나 세간의 악평이 뭐가 됐든 체시아레는 남녀 가리지 않고 엄청난 추종자를 두었고, 엔죠 역시 종류는 좀 달랐으나 마찬가지였다.

내 속사정이 뭐가 됐든 나는 마냥 만인의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전 삶에서도 그랬듯이.

나의 비참하기 그지없는 속사정이 드러난다면 다들 나를 어떻게 여길까. 어떤 식으로 짓이겨질까.

우습게도 그게 가장 두려울 때가 있었다.

그나저나 이 모델 같은 두 여인 사이에 끼어 있자니 꼬꼬마가 된 기분이구나.

젠장, 여기서도 단신이라니 꼭 안 좋은 것만 전생이랑 똑같다.

“어머, 저분이…….”

“이분께서…….”

“안녕하세요.”

엘레니아와 프레이야에게 인사를 건네려 다가오면서 슬쩍 내게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이 많은 인파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호기심과 경멸과 적의와 부러움 등등의 기류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나 익숙한 일이었으므로 괜찮았다.

아, 안면근육이 당긴다.

간간이 마주친 갈색 스카풀라를 걸친 성직자들은 대놓고 다가와서 호들갑스럽게 인사하며 내 아버지와 큰오빠의 안부를 물었다.

성하께선 요즘 건강하신가, 발렌티노 추기경께선 언제 에렌딜을 방문하실 예정이신가 등등.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화려한 돔 연회장에 다다랐을 때였다.

“저 인간이 진짜…….”

엘레니아가 나직이 중얼거린, 그녀 입에서 나오리라 상상도 못 해본 말투에 나는 절로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머, 이스?”

프레이야의 놀란 목소리가 아련하게 울린다.

그랬다. 저만치 소형 무대 근처, 시커먼 판금 갑옷 차림으로 어슬렁거리며 저들끼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팔라딘들 가운데, 늦을지도 모른다는 핑계는 둘째치고 참석 여부 자체가 불투명했던 우리의 무시무시한 남편 녀석이 있었다.

쟤 저기서 뭐 해?

본격적으로 나를 망신 주기 위해 꾸민 짓이라면 참으로 가상하다 하겠는데.

원래 그런 데 노력을 기울일 만한 성정이던가?

“이스!”

프레이야가 반갑게 외치는 소리에 이스케는 동료 녀석과 진지하게 대화하다 말고 이쪽을 힐끔 돌아보더니, 제 누이와 소꿉친구 사이에 끼어 있는 나를 보고 멈칫하며 한 번 노려보고는 다시 외면해 버렸다.

쯧, 한결같은 것. 그래 봤자 내겐 아무런 데미지도 없단다.

“하여간…… 부인, 우리 가서 잔소리 좀 퍼부어줄까요?”

“귓등으로 흘려들을 텐데 뭣 하러.”

프레이야의 제안에 엘레니아가 한탄스럽게 핀잔을 던졌다.

그럼에도 나는 용감하게 한결같은 남편 놈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루비?”

홍해처럼 갈라지는 사람들의 흥미진진한 표정들이 인상적이다.

뭘 기대하고 있는지 뻔하지만 원하는 걸 보지는 못할 것이야.

내가 첫날밤부터 소박을 맞았다는 것, 이스케가 나를 아예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 등은 이미 만연하게 퍼져 있었다.

다들 당연히 그러리라 여기기도 했기에 내가 이 자리에서 뭘 하든 이스케가 책을 잡히거나 면을 구길 일은 조금도 없었다.

이런 문제에서 망신을 당하는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위압적이고 근엄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팔라딘들 가까이 다가서니 자연스레 눈길들이 쏟아졌다.

당혹감이 만연한 눈빛들.

왜, 내가 여기서 남편 따귀라도 칠까 봐? 손도 안 닿을 것 같은데. 훌쩍.

“아, 레이디 루드베키아?”

아, 당신은 그때 연무장에서 내게 아는 체를 했던 예쁘고 입 더러운 기사분 아니신가.

나는 그를 향해 생긋 웃어 보인 뒤 그 맞은편에 선 남편 녀석을 향해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요. 오늘도 멋있으세요.”

일순 주변이 고요해졌다. 무표정한 낯짝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이스케를 황홀하기 그지없는 낯짝으로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목이 좀 아파 왔다.

쓸데없이 발육만 좋은 자식.

잠시 후 녀석이 내게서 눈길을 돌리며 툭 내뱉었다.

“부인은 눈치도 없고 체면도 없나 보군. 보시다시피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멋대로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명 성가시게 하지 않겠다고 들은 것 같은데.”

“기, 기억하시는군요. 역시 제 말을 들어주셨던 건가요?”

“……뭐?”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절대 안 성가시게 할게요. 숨어서 보기만 할게요.”

하고 슬슬 꽁무니를 빼려는 찰나였다.

황당함 그 자체인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녀석이 불쑥 도망치려는 내 어깨를 붙들었다.

이건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나조차 좀 놀랐다.

술렁임이 일었다. 남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이스케는 나를 붙들고 바로 돌려세워서 자신을 보게 했다.

녀석의 거대한 손아귀에 잡혀 있자니 독수리 발톱에 꿰인 병아리가 된 기분이었다.

나 때리려고?

뭐 죽이지만 않으신다면야 상관없다만…….

“다시 말해봐. 숨어서…… 뭘 한다고?”

“수, 숨어서 보기만 한다고요. 따라다녀도 당신이 모르게…….”

“죽고 싶은가?”

협박치고는 꽤 묘하게 들리는 말투였다.

당연히 죽지 않기 위해 이러고 있는 것인 고로 나는 빠르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럼 왜 그런 짓을 하는데?”

“그, 그야…… 당신을 보고 싶지만 성가시게 굴면 안 되니까…….”

하찮은 팬답게 말이지. 설마 연약한 처자인 내가 널 암살하려 엿보겠니 그럼?

팔라딘을 암살하려는 인간은 자살기도자뿐이라는 말도 있는데. 하여간 싱거운 녀석.

최대한 그렁그렁한 눈빛을 지어 보이려 애쓰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내 눈을 빤히 쏘아보던 남편 녀석이 불쑥 한숨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관자놀이를 짚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왠지 멍해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를 지켜보던 아이반 경이 슬그머니 헛기침을 했다.

“레이디 루드베키아, 그건 대단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네?”

“제 말씀은 저 새끼가 부인을 암살자로 착각할 만큼이나 모자란다는 뜻이 아니라…… 아시다시피 북부는 위험한 곳이라 남부에서 자라고 훈련한 기사들과 체질이 좀 다릅니다. 지난번처럼 신전 연무장이나 안전한 사가라면 모를까, 만일 저희끼리 마기를 추적하느라 검기와 신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맛 간 상황에서 부인께서 근처에 계신다면 이미 맛이 간 저희는 마물과 부인을 구분 못 하고 죽이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렇군요. 당신들이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약 흡입한 것처럼 눈 뒤집힌 과도흥분 상태가 된다는 걸 누가 몰랐을까 봐요.

당연히 안전이 보장된 곳 외에 쫓아다니는 척할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반응을 보니 내가 정말로 광팬처럼 보이긴 하는가 보군. 착각해 줘서 고맙다, 이 도끼병 환자들아.

“아…… 폐를 끼칠 뻔했군요. 죄송해요, 제가 워낙 남부 촌 계집이라…….”

“그리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모르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안 그래?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한결같은 이스케는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입술 끝을 짓씹으며 묘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성가셔 죽겠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나는 최대한 반성하는 풀죽은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저어, 걱정 마세요. 절대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

“일정이 변경됐으면 미리 알려주지 그랬어.”

냉하게 울린 목소리는 엘레니아의 것이었다.

엘레니아는 어느덧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와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제 오빠를 바라보았다.

“엘렌 말이 맞아. 집에 들렀어도 됐잖아. 이런 미인들이 기다리는데 감사한 줄도 모르고 말이야.”

여전히 나를 노려보시느라 정신없는 이스케의 팔께를 프레이야가 부채 끝으로 장난스럽게 살짝 때리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흔히 벌어지는 일인 듯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으레 ‘미인이 어디 있냐’는 식의 대꾸가 들려올 법한 분위기였으나, 이스케는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함으로써 애써 명랑해지려는 분위기를 도로 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참고로 놈의 우람한 손아귀는 여전히 내 어깨를 그러쥐고 있는 채다. 속 좁은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도 이 반응은 좀 흥미로운걸. 지난번처럼 그냥 무시하고 가버리거나 할 줄 알았는데…….

“너…….”

“국왕 전하께서 드십니다!”

놈이 마침내 입을 염과 동시에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참으로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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