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36)

* * *

춥다.

이가 저절로 딱딱 부딪히는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깼다.

이곳은 여름이라 해도 새벽에는 좀 춥다고 들었지만, 그냥 좀 추운 수준이 아닌 것 같다.

담요를 꼭 붙들고 덜덜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나는 이윽고 맞은편 벽난로의 불이 까맣게 꺼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물들이 집중적으로 분포된 북부 지대의 귀족가에서 밤마다 곳곳에 밝히는 녹색 불꽃은 단순한 보온용이 아니었다.

정식 수도사 이상부터 축성을 통해 만들 수 있는 귀한 성화였다.

해가 지고 나면 그림자처럼 곳곳에 스며들어 인간의 정기를 노리는 몽마나 언데드 등을 퇴치하는 용도라고 할까.

사람이 일부러 끄지 않는 이상 저절로 꺼질 수가 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유치한 짓을 한 걸까.

설마 아까 그 하녀장이?

“에취!”

그냥 다시 잠을 청하려 해보아도 너무 추워서 도저히 견딜 재간이 없었다.

나는 오들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벽난로 앞으로 비척비척 다가갔다.

혹 불씨가 남아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이런 식의 골탕 먹이기는 유치하다고…….

쉬쉬쉭, 하는 음산한 쇳소리에 목덜미가 쭈뼛 곤두섰다.

처음에는 그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벽난로 앞에서 반쯤 얼어붙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람 따위가 아니었다.

로마냐에서는 마물들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남부의 어지간한 귀족이라면 평생 마주할 일이 없을 것이었다.

비명의 숲과 극소수의 외곽 일대만 제외하면 교황령은 청정구역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내가 그런 곳에 갈 일도 없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물이라는 존재를 접했던 건 첫 결혼 취소를 치른 해의 늦겨울 어느 날엔가였다.

그때 체시아레가 내게 뭘 보여 준다면서 미술관의 지하실로 데리고 갔다.

그때 뭐가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지하실에서 나는 금방이라도 사슬을 부수고 나를 찢어발길 듯한 가고일과 밤새 내내 갇혀 있었다.

그때 난 공포에 질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녹색 안광을 뿜어대며 끔찍하게 울부짖는 가고일이 거북이보다는 덜 징그럽게 생겼다는 생각을 다 했으니까.

저리 가, 움직이지 마, 하는 부질없는 비명을 내뱉으면서도.

그때 그 괴물이 어느 순간 발작하기를 멈추고 얌전히 웅크려 앉아 밤새 내내 나를 쳐다보기만 한 건 공포에 질린 내가 만들어낸 환각일 터였다.

아니면 단순한 우연이었거나.

“오, 오지 마…….”

닫힌 창틀 사이로 그림자처럼 꾸물꾸물 흘러들어온 검은 날개가 허공에 동동 떤 채 나를 가소롭게 노려보았다.

대왕 박쥐처럼 거대한 날개 사이에 붙은 녹색 불씨가 눈알이 맞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내가 비명을 지르거나 발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한다면 순식간에 덮쳐올 것 같았다.

무릎이 딸깍거리는 와중에도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가까이 오지 마.”

북부의 치한 마물께서는 내 발악을 가상히 여기는 듯했다.

양 날개를 축 늘어뜨리고 떠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이 상당히 기괴하다.

저게 공격 자세인가? 좀 자신 없어 보이는 모양새인데.

“저리…….”

“마님, 일어나셔야…… 꺄아아아악!”

그때 막 문을 밀고 들어서던 하녀가 목청이 찢어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어찌나 웅장하고도 기나긴 울림이었는지 나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말았다.

축 늘어뜨렸던 검은 날개를 다시 섬뜩하게 펼친 마물이 비명을 질러대는 하녀 쪽으로 달려드는 찰나였다.

“루비!”

엘레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푸칵, 하는 파열음 비슷한 굉음과 동시에 번개라도 친 듯 시야가 번쩍 물들었다.

이윽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나는 머리를 감싼 팔을 내리고 눈을 크게 떴다.

꼭두새벽의 침입자는 이제 죽은 나방처럼 바닥에 떨어진 채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천천히 증발하고 있었다.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검을 들고 서서 멀뚱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방금 일어난 일 탓인지 예기치 못한 첫 대면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살기 탓일까?

푸른 빛이 도는 은발과 선명한 적색 눈동자, 미끈한 턱선과 반듯한 이목구비가 엘레니아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단 분위기는 상당히 달랐는데, 엘레니아가 고고하고 냉철한 얼음공주 같다면 이쪽은 훨씬 야만적이고 위험한 느낌이었다.

나를 게슴츠레 노려보는 눈빛이 오금이 지릴 정도로 위압적이다.

아니, 왜 그렇게 노려보는 거요?

“이유가 뭐야.”

“네?”

“저거 끈 이유가 뭐냐고.”

만약 내가 스스로 성화를 끈 범인이었다면 곧장 자진해서 이러쿵저러쿵 변명을 늘어놓았을, 무시무시한 음성이었다.

지금 내가 일부러 이 소동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제가 그런 게…….”

“굳이 이러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이목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면 나중에 써먹을 구실 중 하나인가?”

내가 벌써부터 파경 구실을 궁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날 싫어할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이미지가 최악이라니, 갈 길이 구만리구나.

문가에 조용히 서서 우리를 지켜보던 엘레니아가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엘레니아는 나를 등지고 제 오빠를 마주 본 자세로 차분하게 말했다.

“성급하게 몰아붙이지 좀 마, 오빠. 아직 누가 그랬는지 모르잖아. 설령 올케가 그랬다 해도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겠지. 로마냐에선 딱히 성화 피울 일도 없었을 테고.”

사랑해요, 엘렌. 내가 죽더라도 당신은 꼭 살리고 죽을게요.

나는 엘레니아의 등 뒤에 숨은 모양새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보아하니 잠옷이 아닌 평상복이었다.

둘이 바로 나타난 것도 그렇고 남매끼리 차라도 마시고 있던 모양이다.

“저는 그저 너무 추워서 깼다가…….”

“뭐라고? 크게 좀 말해.”

박애주의와는 거리가 상당한 놈이군.

나는 호흡을 짧게 몰아쉬었다.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는 건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내 목소리가 오들오들 떨리는 건 단순한 연기만이 아닐 것이다.

검을 갈무리하며 삐딱하게 나를 노려보고 선 남편 놈은 무저갱에서 막 올라온 사탄 같았다.

쳇, 체시아레와 맞먹는 놈이 바로 여기 있었다니.

“잠깐 깼는데 불이 꺼져 있길래…….”

“그렇담 다른 누가 꾸민 짓이라는 거네. 그게 누굴까? 내 누이? 아니면 나?”

“오빠.”

“미안해요.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제가 잠결에 너무 더워서 끄고 잤나 봐요. 소동 일으켜서 미안해요. 생각이 짧았어요.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훌쩍거리며 애처롭게 쏟아붓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엘레니아가 내 어깨를 살며시 쓰다듬는 동안 이스케는 입술 끝을 짓씹으며 나를 탐색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내 얼굴 뚫리겠다.

“내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아니. 됐다.”

그것으로 그는 마지막으로 쯧 하고 혀를 차며 방을 나가버렸다.

싱거운 녀석. 뭘 물으려고 했던 걸까?

* * *

예기치 못한 첫 만남 뒤, 남편 녀석은 다시 밖으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

그렇게 나는 엘레니아와 단둘이 조반을 들었다.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엘레니아는 특유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식사에 집중했고 나는 아까 일을 의식해서 최대한 주눅이 든 모습으로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렸다.

어차피 먹어봤자 다 토해낼 거 좋은 구실이…….

“아까 같은 일은 다시는 없을 겁니다.”

“네?”

“추워서 깨시는 일 말입니다.”

나는 포크를 살며시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엘레니아는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버섯 수프를 휘젓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떤 녀석이 장난쳤다는 사실을 알아채신 거로군.

당신이 그런 유치한 짓을 할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지만.

“고마워요.”

“나흘 뒤에 궁중연회에 참석하시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래, 연회가 있었지.

이 결혼에 왕실이 중매 노릇을 했으니 국왕께 인사드리러 가는 것이 마땅했다.

동시에 국왕 부부의 결혼 기념 연회이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엘렌, 괜찮으시다면 제게 재봉사를 좀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재봉사요?”

“네. 아시다시피 제가 가져온 옷들은 남부 유행들뿐이라, 너무 눈에 띌 것도 같고 또 이곳 여름은 굉장히 짧다고 들어서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심스럽게 미소 짓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레니아가 이윽고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쩐지, 당혹스럽게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미리 생각하고 준비해 둬야 했는데, 면목이 없군요.”

괜찮아요. 미처 생각 못 한 게 당연하죠. 제기랄, 다들 내가 언제 로마냐로 돌아갈까 내기하는 마당인걸요.

게다가 내 기억대로라면 원래의 루드베키아는 북부 관습 따위 신경도 안 썼다.

“제 전속 재봉사를 불러드리겠습니다. 나흘 안에 새 옷을 맞추기는 어렵겠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지요. 고마워요.”

“제 드레스라도 빌려드리고 싶지만 루비한테는 너무 클 것 같군요. 솔직히 루비는 너무 말랐습니다. 에렌딜의 겨울을 견디려면 좀 더 잘 드셔야 합니다.”

하긴 키 차이도 그렇고, 내가 엘레니아의 옷을 입는다면 아마 언니 옷 훔쳐 입은 철부지처럼 어색해 보일 것이 틀림없었다.

서글프군.

어쨌든 내가 이곳 주요 인사들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일 날이니, 마음먹은 대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신중을 다해야겠지.

정작 가장 중요한 인물인 남편 양반은 제멋대로 최악의 인상을 받은 모양이지만.

“그럼 그날 이스케 경께서도…… 그러니까 제 말은…….”

“오늘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셨으면 합니다. 오빠가 안전에 유독 예민한 사람이라 과민반응한 것뿐입니다. 대개 성화가 잠깐 꺼졌다고 해서 마물이 저택 안까지 침입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지라, 저희 또한 많이 놀랐습니다.”

엘레니아는 내가 이스케한테 몹시 겁을 먹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던가?

당신의 안전에야 예민하겠지요. 휴, 이상적인 남매 같으니라고.

“마음에 담아 둘 리가요. 전 단지…… 저를 너무 안 좋게 오해하고 계신 것 같아서 조금 슬플 뿐이에요. 물론 충분히 싫어하실 만도 하지만…….”

“오빠는 루비를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빈말식의 위로치고는 꽤 진지한 말투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나를 향해 엘레니아가 건조한 시선을 보냈다.

“정말로 싫은 사람을 피해 다니는 평범한 인물은 못 됩니다. 말려 죽이려 든다면 모를까.”

그것참 비범하고도 독특한 심보로군요. 생각보다 더 꼬인 녀석이군.

“그렇지만…….”

“그저 지금 처한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만사를 삐딱하게 보고 있는 것뿐입니다. 어찌 들으실지 모르겠으나 저 또한 오빠가 결혼하는 것을 상상도 못 해본지라…… 루비가 아닌 다른 누구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다지 와닿는 말은 아니었다.

상대가 나, 루드베키아 보르히아가 아닌 어느 평범한 가문 여식이었다면 오늘 아침처럼 벌써 파경 궁리를 하고 있다고 오해하진 않았을 테니까.

쳇, 상대가 그 소꿉친구라는 여식이었다면 더 친절하게 굴었겠지.

그럼에도 이스케의 평범치 못한 심보에 대한 엘레니아의 증언이 약간이나마 사실이라면, 조금은 가닥이 잡힐 것 같았다.

그가 나와의 결혼을 못마땅히 여길 이유가 무궁무진하다 해도, 그의 적의가 순전히 나 개인에게 향해 있는 게 아닌 이상 약간은 희망이 있었다.

이놈을 앞으로 어떻게 구워삶는다? 일단 성향 파악부터 해야…….

“엘렌, 제가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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