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36)

* * *

“뱃멀미로 고생하셨다 들었습니다.”

장기간 항해의 좋은 점은 식사를 들지 않든 토를 하든 뱃멀미라는 핑계를 댈 수 있다는 거였다.

가족들과 멀어져 가고 있다는 점 또한 좋았다.

기나긴 항해 끝에 브리타냐의 수도 에렌딜에 다다른 뒤 환영단의 호위 아래 오메르타 공작성에 도착한 현재, 나는 고풍스럽고 차가운 느낌의 홀 안에서 나의 시누이 엘레니아 반 오메르타와 단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이렇게 긴 여행은 처음이라서요. 창피한 말씀이지만 남부를 벗어나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창피해하실 것 없습니다. 저도 에렌딜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지라.”

나붓이 말하는 엘레니아는, 솔직히 말해서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생길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 전생 또한 아름다운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으나 엘레니아에게 댈 것은 못 되었다.

모델처럼 길고 늘씬한 골격과 대리석 조각 같은 이목구비, 은색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빛을 반사하여 푸르스름하게 반짝였고 아름답게 열린 눈은 붉은 스피넬 같았다.

머리 빛깔도 그렇지만 눈동자가 너무 신기했다.

빨간 눈을 실제로 보면 무서울 법도 한데 조금도 무섭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냉랭하고 절제된 분위기와 어우러져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이토록 아름다운 피조물이 그토록 허무하게 암살당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범죄다. 암.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신지요.”

내 넋을 빼놓은 북부의 미녀께서 머리를 한쪽으로 우아하게 기울였다.

루드베키아, 그러니까 나와 동갑이라 들었는데 모든 면에서 훨씬 성숙하게 보인다.

나는 나를 대하는 사람의 사소한 표정이나 기색 등을 읽는 데 예민한 편이었지만, 엘레니아는 신이 내린 포커페이스 그 자체라 도통 종잡기가 힘들었다.

“속이 좋지 않으실까 하여 일부러 가볍게 내오라 하였습니다만.”

“아니요, 다 너무 좋아요. 제가 좀 많이 긴장했나 봐요. 염려 감사합니다.”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 무어 있을까.

버찌 잼을 바른 얇은 빵과 양파 수프, 정체 모를 소스에 버무린 생선 살의 풍미가 더할 나위 없이 유혹적이다.

나는 언제나 미친 듯이 배가 고픈 상태였다.

가능한 상황에선 아예 안 먹었지만 어쩔 수 없는 자리에서는 먹고 토해냈다.

그런 면에선 무도회 같은 자리가 오히려 더 편했다.

누가 뭘 먹고 말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내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었다.

애처럼 웃는 나를 잠시 가만히 응시하던 엘레니아가 이내 차를 내오라 일렀다.

잠시 후 식사가 치워지고 향긋한 차와 간단한 디저트가 나왔다.

“아시겠지만 이곳 에렌딜은 여름철마다 아라크네들이 기승을 부리는지라, 오빠가 좀 늦을지도 모른다 미리 양해 부탁했습니다. 아버지께선 영지 문제로 월말에야 수도로 돌아오실 예정입니다. 환대가 조촐하여 송구스럽습니다.”

“아…… 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 저택 안살림은 제가 맡아 관리해 왔습니다만, 바라신다면 부인께서 선호하시는 대로 바꿔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거나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녀장을 통해 지시하시면 됩니다.”

부, 부인이라. 그것참 낯설고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호칭이로군요.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어설프게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시늉을 했다.

“배려 감사합니다만 당분간은 원래대로 지내는 편이 좋겠는걸요. 전 아직 이곳 관습에 익숙지 않은 데다 여러모로 경험이 부족한지라, 주제넘게 나섰다가 누를 끼칠까 걱정되어요.”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은 엘레니아가 다시 나를 바로 응시했다.

“걱정하실 것이 무에 있습니까. 누구도 감히 부인을 그리 생각지 못할 텐데요.”

형식적인 말. 사무적인 반응.

그럼에도 약간 의외라는 듯, 떠보는 듯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 천진한 미소를 짓고는 말을 돌렸다.

“그것보다. 제가 공녀께 따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무엇이든 편히 말씀하십시오.”

“당분간은 저를 그냥 루비라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엘레니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시늉을 했다.

“아시다시피 전 여기서 온통 낯선 분들뿐이고, 못난 소리라 여기시겠지만 솔직히 어떻게 적응해갈지 막막하고 겁이 나거든요. 내키지 않으셔도 조금만 친근하게 대해주시면 큰 용기가…….”

“좋습니다.”

“정말요?”

“예.”

“와, 고마워요!”

활짝 반색하며 몸을 기울여 손을 마주 잡자 움찔하는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손을 놓고 바로 앉으며 민망한 체 더듬거렸다.

“미안해요. 제가 채신머리가…….”

“괜찮습니다.”

“저어, 그럼 저도 엘렌이라고 불러도 괜찮나요?”

“피차 편히 대하는 것이 좋겠지요.”

누군가를 편히 대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 가는 냉미녀께서 차분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더니만 불쑥 한숨을 쉬듯 덧붙였다.

“너무 움츠러들어 계시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과한 겸손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니까요.”

나를 염려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헛수작은 통하지 않으니 본색을 감추고 있다면 서로 편하게 빨리 드러내라는, 은연중에 떠보는 암시였다.

나 또한 그녀가 벌써부터 나에 대한 경계를 풀리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저리 떠보는 걸 보아하니 의외의 인상을 준 데는 성공한 것 같다.

나는 엘레니아를 포함한 이곳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내 목적은 최대한 무해한 존재로 각인되는 것이었다.

보르히아 일가답지 않은, 세간에 떠도는 소문과는 다른 순해 빠진 바보로.

“오해받는 일엔 익숙한걸요. 열심히 노력해서 누구한테도 누가 되지 않도록 할게요.”

다시 한번, 엘레니아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불현듯 언니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마른 손목에 엉겨 붙었던 핏덩이가.

“앞으로 지내실 곳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 *

커튼이 젖혀진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수평선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노을빛이 이곳까지 뻗어와 온통 새하얀 방 안을 따스하게 색칠했다.

저만치 유유히 흘러가는 조각배를 홀린 듯 바라보고 선 내 뒤로 엘레니아가 다가왔다.

“재주껏 단장한다고 애를 썼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내일 아침 저택 안내를 해드릴 테니 혹 다른 방이 마음에 드신다면 언제든…….”

“아니요, 이대로 정말 좋아요. 전망도 마음에 들고요. 전 언제나 바다가 보이는 방이 가지고 싶었거든요.”

엘레니아는 이번에는 내가 손을 잡아도 움찔하지 않았다.

대신에 무언가 걸린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맞닿은 손에 시선을 주더니, 조금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실 터이니 일찍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만일 오빠가 예정보다 늦는다면…….”

“신경 쓰지 말아요, 엘렌. 저도 마침 그냥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거든요.”

첫날부터 소박맞을 거란 건 당연히 알고 있었기에 마음 상할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안심이었다.

어쨌든 내 목표는 그의 사랑을 얻는 게 아니니까. 연민이라면 모를까.

생긋 웃는 나를 묵묵히 바라보는 엘레니아의 어깨 너머로 장대처럼 키가 큰 하녀장이 보였다. 정확히는 그녀의 표정이.

조롱과 경멸이 뒤섞인 눈빛이었지만 상관없었다.

하찮게 여겨지는 거야 익숙한 일인 데다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