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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케 반 오메르타.
부친의 전성기를 뛰어넘는 무예 실력을 인정받아 15세에 성기사 서임을 치르고 17세에 마물들을 상대로 벌이는 검투 경기에서 역대 최연소 승자가 된 남자.
이후 팔라딘으로서 각종 무용담을 떨치며 북부 영양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으나 개차반인 성격과 오는 혼담마다 걷어차는 비범한 금욕주의로 부친의 골머리를 썩였다.
그나마 가까이하는 여성이라곤 누이동생 엘레니아 반 오메르타와 남매 모두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내온 소꿉친구 프레이야 반 퓨리아나뿐이라고.
대강 떠오르는 대로라면 그가 그렇게 된 건 모친의 죽음 이후부터였다.
젊은 공작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던 왕녀, 오메르타 공비는 자식들이 어릴 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것이 남매에게 여러 면에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자살한 영혼은 신의 저주를 받아 구울로 전락한다는 세계관에서 무려 기수 가문의 공비가 그러했으니 여러모로 금기가 된 화제이기도 했고.
너무 오래전에 읽은 소설이라 기억의 많은 부분이 흐릿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좀 더 자세하게 떠올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쨌든 국왕조차 혀를 내두르는 안하무인께서 어쩌다 루드베키아와의 혼담에 순순히 응했느냐 하면, 그가 걷어찬다면 대신에 엘레니아가 교황의 차남과 결혼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엔죠랑 말이다.
현재 교황청은 로마냐 국경 지대에서 소란을 피우는 야만인들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내분 중인 리미니 진군으로 인원이 모자란 교황군은 지원이 필요했다.
뛰어난 기사들의 보유국으로 유명한 북부의 브리타냐로부터 지원을 받는 대가가 바로 이 혼담이었다.
아버지가 내 다섯 번째 혼담을 거론한 저녁 식사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막대한 지참금과 예물을 실은 배가 떠난 뒤 머지않아 브리타냐의 사절단이 도착했고, 나는 대리인으로 온 기사와 대리 결혼식을 치른 뒤 로마냐를 떠날 채비를 했다.
* * *
3년이면 익숙해질 법도 되었건만, 아직도 간간이 거울을 볼 때마다 거기에 있는 낯선 소녀의 모습에 흠칫 놀라곤 한다.
구불구불한 금실 같은 머리카락과 호수처럼 커다란 푸른 눈.
복삿빛이 도는 통통한 뺨과 아이처럼 유순한 입매.
원래의 나의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점을 찾자면 장발이라는 것과 작은 체구 정도일까.
한창 예민하던 십 대엔 남들과는 다른 내 모습이 싫기도 했었는데,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금은 우습게도 종종 그리운 기분이 일었다.
“아주 예쁘구나, 우리 딸.”
내 아버지 되는 교황 성하께서 흡족한 얼굴로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내 나이 열여덟, 이곳 기준대로라면 이미 성숙한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다섯 살 어린애 다루듯 하는 짓엔 변함이 없었다.
그건 체시아레가 내킬 때마다 나를 무릎에 앉히고 쓰다듬는 것과 비슷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신부라니. 온 북부가 너와 사랑에 빠질 게다.”
“아버지…….”
“이런, 벌써 서운한 모양이구나. 울지 말거라, 아가.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잖니.”
난 이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라면 소원이 없겠는데 말이지요.
눈물을 흘리는 건 매우 자연스러웠다. 내게 있어선 일도 아니었다.
나는 애잔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 눈가를 문지르는 아버지를 향해 생긋 웃었다.
“가족들이 너무 그리울 거예요.”
“우리도 네가 그리울 게다. 불쌍한 것. 네 오라비더러 동반하라 하고 싶지만 상황이 녹록지가 않구나.”
녹록지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개인적인 감정은 둘째 치고 여기 온 이래 내내 우리 남매를 꺼림칙한 눈초리로 관찰하는 북부인들이 무섭다.
체시아레와 나에 대해 어떤 소문들이 떠도는지 아버지는 관심도 없는 걸까?
“아우우, 속 터져. X발 진짜 나만 속 터지는 모양이군. 아우우!”
“오빠.”
“후우…… 이리 와, 멍텅구리야.”
여전히 이 혼담이 불만스러운 듯 혼자 발을 굴러대며 쌍소리를 내뱉던 엔죠가 대뜸 탄식을 내뱉으며 나를 힘껏 껴안았다. 오빠답게 평범하게.
부친의 편애를 앞세워 오만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데다 충동적이고 거친 사고뭉치이긴 했지만, 적어도 엔죠는 나를 다치게 만들거나 숨 막히게 하진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 가족 중 유일하게 정상 축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보고 싶을 거야.”
“난 너 안 보고 싶을 거다, 바보야.”
툴툴대면서도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는 엔죠였다.
그가 나를 너무 오랫동안 껴안고 있는 바람에 묵묵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체시아레가 슬슬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적당히 해라, 엔죠. 얘 숨 막히겠다.”
앞으로 반년.
그 이후로 어찌 될지는 아직 불투명했으나 확실한 건 체시아레가 죽는다 해도 하나도 안 슬플 것 같다는 거였다.
보르히아 가문이 모조리 잿더미가 된다 해도 그다지 슬플 것 같지 않다.
“루비.”
눈물 젖은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체시아레의 손길이 등골에 싸늘한 감각을 흘려보냈다.
내 눈을 다정하게 내려다보는 청금석색 눈동자는 종달새를 옭아맨 뱀의 그것 같았다.
노래하지 않으면 독니를 박아넣겠노라 압박해 오는 뱀.
그래서 종달새는 노래를 멈출 수 없다.
그는 아주 많은 면에서 내 원래 삶의 큰오빠를 떠올리게 했다.
“오빠, 꼭 나 보러 와야 돼. 알았지?”
“물론이지. 꼭 보러 갈게. 그때까지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어야 한다.”
생존본능이란 얼마나 강력하고 우스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 죽고 싶어 하다 마침내 죽었는데, 지긋지긋했던 삶과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삶에 사로잡혔는데도 살고자 기를 쓰는 나는 얼마나 우스운가.
* * *
많은 남부인의 오해와 달리, 북부 지대의 국가라 해서 사시사철 비와 눈으로 우중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잦은 백야 현상으로 종일 햇볕이 쨍쨍한 북부의 여름철은 남부의 여름처럼 과하게 습하지도 덥지도 않았다.
1년 중 유일하게 햇빛을 구경할 수 있는 시기가 여름뿐이라는 게 문제지만.
연무장의 풍경은 3년마다 마물들을 상대로 열리는 검투 경기장을 방불케 했다.
볕 좋은 여름 주말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신음하는 장정들의 모습은, 그다지 청춘에 알맞은 감상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여 아이반 경은 불쌍한 동료들을 향해 한심해 마지않는 눈길을 던져준 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바라보았다.
“잠깐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검을 바닥에 내리꽂고 투구를 벗던 기사가 힐끔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턱선과 유달리 긴 속눈썹이 음유시인처럼 미려했으나 형형하게 번득이는 시뻘건 눈동자.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만면.
흙먼지를 뒤집어쓴 시커먼 판금 갑옷.
거기에 2미터에 준하는 신장까지 더해져 방금 막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가 따로 없었다.
“아니.”
“왜?”
“엘렌이 부탁한 기색이 훤해서.”
“그걸 아는 놈이 이러고 있으셔? 대체 왜 네가 이럴 때마다 내가 귀찮아져야 하는지…….”
“네가 내 누이한테 약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주제도 모르는 새끼야.”
여기서 펄쩍 뛰며 무슨 소리냐고 부정한다면 꼴만 더 우스워진다.
그래서 아이반은 좀 더 세심히 말을 골랐다.
“네가 이렇게 염병을 떠는 동안 네 신부께서 도착하셨단 말이다. 네가 마중 가는 거야 바라지도 않았다만, 얼른 들어가서 식사라도 같이하고 첫날밤을…….”
“떠드는 꼬락서니가 나 대신 마중 나간 놈들이 꽤 되는 것 같네.”
아이반은 그만 낮게 신음을 흘렸다.
투구를 한쪽으로 아무렇게나 던진 이스케가 이제 건틀렛 끈을 풀며 그를 향해 피식 웃었다.
“아니야?”
“나는 어디까지나 북부를 수호하는 팔라딘으로서 보르히아의 스파이를 감시하러…….”
“개소리 집어치우고.”
“……X발, 그래, 궁금해서 갔다 왜. 그 유명한 교황의 따님께서 실물은 어떨지 궁금해서. 그게 잘못이냐? 배알 꼴리면 네가 직접 가지 왜? 진짜 주제도 모르는 새끼가 누군지 알아? 바로 너야, 이스케 반 오메르타 너라고 이 X 같은 새끼야!”
“…….”
“미안하다. 말이 거칠었군. 잠깐 좀 흥분한 바람에.”
“그래.”
꽃의 기사라 불릴 정도로 곱상한 외양과 달리 아이반은 도화선이 상당히 짧은 편이었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맞는 말이다.
“더 안 물어봐?”
“뭐를.”
“상화랑 비슷했냐, 성격은 어때 보였느냐, 뭐 그런 거. 안 궁금해?”
“별로.”
“하긴, 어차피 네 부인인데 직접 만나는 게 좋지. 그런 의미에서 어서 가서 남편의 의무를 다할 준비나 하라고, 난 네가 렘브란트의, 그 누구냐, 아무튼 그 양반처럼 국제적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꼴 절대 못 본단 말이다.”
“만약 교황이 노움더러 고자라고 선포한다면 우리가 이를 가는 노움의 번식력은 자아분열로 불리겠지. 넌 이 광대극이 얼마나 갈 것 같냐?”
현실적으로 이 결혼이 영원하리라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부의 경력도 경력인 데다 신랑 또한 만만찮은 상대다.
벌써부터 주 단위로 내기하는 놈들이 있는 마당에 오죽하랴.
아이반은 그러게 차라리 진작 프레이야와 결혼해 버리지 그랬냐고 말하려다 입술 끝을 깨물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으니까.
어차피 저 새낀 이해하지도 못할 거고.
농담처럼 떠들고 있었으나 아이반 또한 수수깡으로 칼싸움하던 시절부터 어울린 악우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까 전 엘모스항에서 오메르타 성까지 루드베키아 보르히아를 호위하러 다녀온 뒤부터 기분이 복잡했다.
대리 결혼을 치르고 온 에반스테 경의 증언에 따르면 신부가 항해 내내 뱃멀미에 시달렸다 했다.
그럼에도 밝게 미소 띤 얼굴로 하선하여 마차에 오르던 여인은 과연 소문대로 아름다웠다.
금사 같은 아마빛 금발과 유독 크고 맑은 푸른 눈, 햇살을 담아 빚은 유리 인형처럼 작고 섬세한 이목구비가 한눈에 봐도 발군인 미인이었다.
동시에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연약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이유 모를 죄책감이 일 정도로.
“작았어.”
“뭐?”
“작았어. 진짜 요만했다니까.”
“난쟁이라는 거냐.”
“네 더러운 눈매로 눈깔 부라리면 그대로 죽을 것 같이 생겼다 이 말이다. 내가 네 심정 모르는 건 아니다만 그쪽 입장도 좀 생각해 봐, 여기서 인질이나 다름없는 처지인데 혼자 얼마나 외롭고 무섭겠냐고.”
막 바닥에 꽂아둔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려던 참인 이스케는 그대로 멈칫한 채 아이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대체 누구냐?”
“북부의 기사다. 그것도 팔라딘. 교황 성하의 여식, 시스티나의 천사께서 전우의 신부가 되신다는데 마땅히 모셔야…….”
“언제는 교황 죽이고 싶다며.”
“참, 너 결혼한다는 소식 듣고 내 누이가 울더군. 나쁜 새끼야.”
아이반의 누이동생은 아직도 목말 타길 좋아하는 여섯 살배기였다.
“나 같은 놈은 잊으라고 전해줘.”
“이미 그렇게 말했더니 친구 질투하는 못난 오라비가 되었다.”
“영애가 오라비를 잘 파악하고 있구나.”
“아무튼 내 말의 요지는 네 신부가…….”
“보르히아 족속들이 외모 하나는 번지르르하다더니, 딱 외모 보고 반해서 나라라도 팔아먹을 기세이십니다?”
등 뒤에서 쨍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는, 들리는 그대로 꽤나 무례하고 불손했다.
퍽 짧은 도화선의 소유자인 아이반은 당연히 대노하여 몸을 홱 돌렸다.
그와 동시에 쏜살같이 이쪽으로 다가온 상대가 냅다 검을 뽑아 들었다.
잘 벼린 날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한창 연상인 선배들에게 이런 짓이라니, 한창 겁대가리를 상실할 나이라는 점과 믿는 구석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심히 무모한 행위였다.
마찬가지로 한창 연상인 기사들 쪽은 한창 어린 친구를 좀 관대히 대할 줄 몰랐다.
“아아아악!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아아악!”
“이대로 귀 아예 떼주랴? 어?”
“아아아악! 제, 제바알!”
사정을 모르는 이의 눈에는 그저 두 성격 파탄자 기사가 불쌍한 어린 종자를 괴롭히는 것으로 보일 터였다.
그러고도 한참 더 비명이 퍼져나간 뒤에야 아이반은 열다섯 풋내기의 귀를 놔주고 손을 탈탈 털었다.
“좋아. 넌 또 왜 지랄이냐, 로렌초.”
눈물을 찔끔대며 양 귀가 제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하던 로렌초는 흠칫 마른침을 삼켰다.
팔짱을 끼고 서서 자신을 멀뚱히 내려다보는 이스케는 막 마굴에서 빠져나온 서리 늑대 같았다.
이런 작자한테 검을 들이댈 배짱을 부렸다니,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졌다.
“제 누님이…….”
“뭐?”
“제 누님하고…… 저는 경께서 지금 결혼 끝나고 난 다음 제 누님과 결혼하신다 해도 좋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당분간 제 누님한테 아는 척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스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잘 못 들은 것 같았다.
따라서 손을 털며 으르릉대던 아이반이 대신 버럭 했다.
“좀 알아먹게 떠들어라! 하여간 요즘 애새끼들은…….”
“죄, 죄송합니다. 제 말은, 이스케 경께서 지금 결혼이 끝나시기 전까지 당분간 제 누님을 멀리해 주십사 하는 겁니다. 안 그러면 보르히아의 마녀가 제 누님을 괴롭혀 죽일지도 모르니까요.”
“너 진짜 주둥이 조심 안 하냐?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벌써부터 편견에 가득 차서…….”
“펴, 편견 아닙니다! 편견이라면 어째서 좀 전에 오메르타 성에 다녀온 제 누님이 방에 틀어박혀서 울기만 하신답니까?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네 누이가 어딜 갔다고?”
“오메르타 성 말입니다. 그 마녀…… 레이디 루드베키아께서 도착하실 무렵 공녀님이랑 차를 들고 있었거든요.”
아하. 아이반은 루드베키아와 마주치고 온 프레이야가 눈물을 흘릴 만한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인간적이며 합리적인 이유를 수십 가지도 더 댈 수 있었다.
이 쓸데없는 정의감만 충만한 애새끼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대체 어떻게 하면 결론이 그렇게 나는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여전히 로렌초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만 갸웃대고 있던 이스케가 불쑥 등을 돌린 것은 그때였다.
낭창낭창하게 멀어져 가는 자태가 몹시 자연스러워 아이반도 로렌초도 잠시 붙잡을 생각을 못 했다.
“이스케 경?”
“야, 이스케! 너 어디 가? 야!”
“이스케 경, 제 용건 아직 안 끝났습니…… 아아악!”
“안식일이잖냐. 난 너희 모른다.”
기도문 한 줄도 제대로 못 외우는 새끼가 안식일은 왜 그리 못 잃나.
동료들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는 저딴 핑계라니, 아이반의 황망한 눈길이 주변에 흩어진 전우들에게 향했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모든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팔라딘들 또한 음울한 미소로 응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