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36)

Chapter 1 푸른 수염과 빛나는 기사

“이 아비가 드디어 네게 꼭 맞는 신랑을 찾아냈단다, 아가.”

아버지가 입을 닦던 냅킨을 내려놓으며 저 말을 했을 때, 나는 첫째 오빠 체시아레의 무릎에 앉은 채 어서 침소로 돌아가 위 속에 가득 채워진 음식물을 토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냄새만 맡아도 역겨운 크넬을 매우 맛있게 처먹고 있던 둘째 오빠 엔죠가 포크를 사납게 내려놓으며 묻지도 않은 이의를 피력했다.

“아니, 또요? 아버지, 이번이 대체 몇 번째입니까?”

“엔죠.”

“쟤 아직 파혼한 지 석 달도 안 됐다고요! 아무리 동맹이 좋다 해도 얘 기분은 좀 생각해 줘야 할 거 아닙니까?”

“네 갑작스러운 속 깊은 오라비 노릇에 심히 적응이 안 되는구나. 그럼 네 녀석이 브리타냐의 지원군 대신 저 야만인 놈들을 물리쳐 주겠느냐?”

“못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 미개한 야만인 놈들 따위, 이 남부 최고의 기사가…….”

“염병 그만 떨거라.”

남부 최고 망나니 기사는 입안에 남은 크넬을 털어 넣고 우적우적 씹는 것으로 불평을 대신했다.

나는 그저 올 것이 왔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떤 분인가요, 아버지?”

명랑하게 질문하자 못마땅한 얼굴로 엔죠를 노려보던 아버지가 다시 나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띄웠다.

“브리타냐의 총아란다. 국왕이 아끼는 조카이자 북부 최고의 기사로 유명한 자이지. 아주 잘 생겼더구나. 너도 마음에 들 게야.”

“뭐요? 아니, 아버지, 그 자식 평판이 얼마나 더러운데!”

“너만 하겠느냐?”

엔죠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 아주 잘생긴 북부의 기사께서 훗날 처가댁을 몰살시킬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아, 이 세계의 사위들이여.

“루비?”

잠깐 망설이는 시늉을 하고 있자니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고 있던 체시아레가 나직하게 불렀다.

정수리를 예리하게 더듬는 손길이 소름 끼쳤다.

차가운 뱀이 저 아래에서부터 꿈틀거리며 타고 올라오는 듯한 감각이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체시아레와 눈을 마주했다.

탐색하는 듯한 서늘한 청금석색 눈동자를 한 번 본 뒤 불만스레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엔죠 쪽을, 그다음엔 언제나처럼 생글거리고 있는 레이디 줄리아와 그녀 옆의 아버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감사해요, 아버지. 이렇게라도 아버지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정말 기뻐요.”

활짝 웃는 나를 따라 푸근하게 웃는 교황의 얼굴은, 내가 원한다면 별도 따다 줄 딸바보의 그것 자체였다.

체시아레 역시 드물게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착해, 우리 꼬마 천사.”

그리고 나는 어서 가서 토하고 싶었다.

실컷 토한 다음 앞으로의 생존 전략을 고민해 봐야지. 북부 최고 기사분의 살생부엔 나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 * *

때아닌 헬기 사고 덕에 지긋지긋한 인생을 마침내 끝내버리고 안식을 찾나 싶었는데 웬 시대극 속의 아가씨가 되어 있다면, 그것도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 속의 인물이라면, 더 나아가 지긋지긋했던 삶과 상당히 비슷한 환경의 소유자라면 얼마나 끔찍한가?

이왕 소설 속 인물로 새 삶을 시작하는 거 좀 괜찮은 가족들이면 어디가 덧나나?

“후으으…….”

쓰디쓴 위액과 눈물이 동시에 줄줄 흘렀다.

남들이 모르게 토하는 건 워낙 능숙했기에 하녀들에게 들킬 걱정은 없었지만 할 때마다 괴로운 건 똑같았다.

내 예전 삶과 이곳에서의 삶의 공통점 중 또 한 가지가 이놈의 거식증이었다. 흔히들 섭식장애라고 하더라.

루드베키아 데 보르히아가 되기 전의 나, 그러니까 죽기 전의 나는 스페인 상류층 집안의 입양아였다. 아니, 자선 자녀라고 할까.

아주 어릴 때 입양돼서 내가 태어났다는 한국이라는 곳은 잘 모른다.

마드리드의 부유한 댁 자제들이 으레 그렇듯 교복을 입는 명문 사립 학교에 다녔고, 발레 스쿨과 테니스 클럽, 승마와 자선 파티들로 채워진 삶을 살았다.

내가 주변 아이들과 다르다고 느끼게 된 계기는 4학년 때인가, 어떤 남학생이 나를 향해 씩 웃으며 양손으로 눈가를 찢는 시늉을 해보였을 때였다.

처음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그냥 다른 아이들이 웃는 대로 따라 웃었다.

내 눈은 남들처럼 둥그런 편이었기에 그게 날 흉내 내는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소위 말하는 인종차별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어느 정도 견딜 만했다.

날 입양해 준 가족들은 겉보기에는 화려함과 선량함 그 자체였지만, 속은 말할 수 없이 썩어 있었고 나는 언제나 외부인이었다.

부모님은 각각 애인을 따로 두고 있었고, 유망주 테니스 선수였던 작은오빠는 약물 문제와 난잡한 사생활로 심심하면 미디어를 탔으며 가족 중 유일하게 내게 가끔이나마 잘해줬던 언니는 스물한 살 나이에 자살했다.

그나마 정상으로 알려진 큰오빠는 아버지와 같은 괴물이었다.

명랑하고 똑똑하고 순종적이며 감사할 줄 아는 딸을 연기하는 건 자연스러운 습관으로 굳어졌다.

조금이라도 가족들을 부끄럽게 하거나 비위를 거스르면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까.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완전히 죽기 전의 짧은 백일몽을 꾸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웬 아름다운 백인 소녀 같지가 않을 테니까.

내가 루드베키아 데 보르히아라는 걸, 십 대 시절 어느 소설 사이트에서 읽은 판타지 시대극 ‘소돔과 성배’의 인물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며칠 걸렸다.

르네상스 시대를 모티브로 한 세계관에 실존했던 역사 속 인물들을 각색해서 만든 소설이었다.

내용은 대충 부패한 교황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대에 몇몇 선량한 성직자들과 북부를 위시한 각국의 가문들이 연합하여 교황과 그 일가, 보르히아 가문을 처단하는 권선징악물이었다.

소돔은 당시의 로마냐 상태를 뜻했고 성배는 교황청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성물을 뜻했다.

거기서 나, 루드베키아는 교황의 딸이었다.

그렇다. 곧 죽을 운명인 것이다.

그것도 결혼했던 남자의 손에.

루드베키아는 아버지와 큰오빠의 야심에 따라 정치적 장기말로서 여러 혼사를 치렀는데, 세 번의 파혼과 한 번의 혼인 무효 끝에 결혼한 인물이 브리타냐 왕국의 이스케 반 오메르타였다.

실력은 출중하나 금욕주의자 그 자체인 이스케가 6개월 만에 끝난 결혼 뒤에 왜 갑자기 미쳐서 장인댁을 말살시키기로 마음먹었느냐 하면 루드베키아가 그를 미치게 만든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사랑에 미치게 했다는 게 아니라 분노로 미치게 했다. 그의 누이동생을 독살했으니까.

이스케가 그 정도로 눈이 돌아갈 줄 예상치 못했던 것이 체시아레의 불찰이었다.

내 감상으론 누이의 죽음에 대한 분노보다는 제 뒤통수를 친 아내를 직접 죽이고 말겠다는 심정이 더 컸던 듯했지만.

아무튼 루드베키아는 체시아레의 지령에 따라 그랬던 것이 분명했으나, 대강 떠오르는 대로라면 루드베키아 역시 꽤 만만치 않은 성격이었다.

안 그래도 교황의 스파이에 난잡한 악녀라는 낙인이 찍혀 좋은 눈총 못 사는 판에 북부의 관습을 깡그리 무시하고 안하무인으로 군 데다 주위 여인들을 하녀처럼 취급했던 걸로 기억한다.

남편이 각별히 아끼는 누이동생과 소꿉친구도 포함해서.

루드베키아로 산 지 3년이 지난 지금은 그녀가 왜 그런 성격 파탄자가 되었는지 새삼 이해가 가지만 말이다.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로나먀의 공주님.

시스티나의 종달새.

모두 잘 꾸며진 연극일 뿐이었다. 내 이전 삶이 그러했듯이.

“루비?”

둔탁한 노크 소리에 나는 민트 캔디 주머니를 황급히 서랍 안에 쑤셔 넣고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처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오빠.”

체시아레, 즉 발렌티노 추기경은 저녁 식사 때 입었던 검은 수단을 아직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부친과 빼닮은 검은 머리와 청금석색 눈동자, 수려한 이목구비가 악마 같은 아름다움을 자랑했으나 내 눈에는 그냥 악마로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나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까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서. 걱정돼서 들렀어.”

다정하기도 하셔라.

“후우, 역시 오빠는 날 너무 잘 안다니까.”

“혼담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솔직하게 말해도 돼.”

흑표범 같은 자태로 천천히 다가오던 체시아레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협탁 위에 놓인 거북이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 곱게 놓인 것이 퍽 마음에 드는 눈치다.

내가 거북이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사실은 나만 아는 비밀이 되어버렸다.

“꼭 그런 건 아닌데…… 모르겠어, 그냥 북부가 너무 멀게 느껴져서인 것 같아. 거기선 오빠를 자주 볼 수 없을 거고, 혼자 외로울 것 같아서.”

“왜 외로워, 남편이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할 수만 있다면 오빠처럼 주님이랑 결혼해서 오빠랑 평생 같이 살고 싶다고.”

“로마냐 최고의 미인께서 오직 나만 좋다니 영광이구나.”

화장대 곁으로 다가와 내 머리에 손을 얹는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원하던 대답을 내가 맞춘 모양이었다.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나는 아기 고양이처럼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언제 난폭하게 돌변할지 모를 손길이다.

비록 그런 일이 일어난 지는 꽤 되었으나, 나를 둘러싼 안전한 보호막이 무너져 내리는 건 삽시간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다.

하여간 웃기는 놈이었다.

그토록 내게 집착하면서도 나를 다치게 하거나 자신의 야심에 이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완전히 제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서일지도 몰랐다.

3년 전, 내가 열다섯 살의 루드베키아가 되었다는 사실에 막 적응해갈 무렵, 렘브란트 왕국의 공작과의 혼담이 거론되었을 때 나는 원하지 않노라 말했었다.

렘브란트의 공작은 나와 혼례를 치르고 머지않아 ‘신체적 불능’이라는 치욕적인 명목으로 혼인 무효화를 당할 인물이자 훗날 우리 가문의 몰락에 관여할 인물 중 하나였던 것이다.

새 ‘가족들’이 내게 너무 잘해주었기에 어떻게든 파국을 막고 싶은, 미래의 적들과 척을 지는 것을 막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내가 거부 의사를 표하자마자 평소의 인자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싸늘하게 굳는 교황의 모습에 나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날 저녁 나는 체시아레에 의해 침소에 갇혀서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맞았다.

몇 차례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이곳에서의 삶과 나의 전 삶이 그다지 다를 바 없음을 이해했다.

아마 거기에는 루드베키아가 교황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도 기여했을 것이다.

나를 낳자마자 죽은 여인, 그러니까 교황의 두 번째 공식 정부였던 카르멘은 교황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수태한 상태였으니까.

다들 마지못해 쉬쉬하는 의혹이라지만 독자였던 나는 그게 진실이라는 걸 안다.

가족들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는 것도, 매시 가면을 쓰고 연기하듯 살아야 한다는 것도 내 본래 삶과 똑같았다.

루드베키아의 몸으로 들어온 이후 잠시나마 멎었던 거식증세도 다시 발현했다.

“나도 널 보내는 게 끔찍하게 괴로워. 마지막이라는 거 알면서도.”

“거긴 마물도 많다고 그러고…….”

“뛰어난 기사들이 목숨을 바쳐 널 수호할 텐데 뭐가 걱정이니. 할 수 있는 한 자주 보러 갈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 나름 재미있는 곳이라니까. 반년 정도 피서한다고 생각해.”

“반년? 정말 반년만이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놀란 척 반색했다.

낮게 웃음을 흘린 그가 내 머리칼을 한 아름 쥐고 코끝에 가져다 댔다.

“그래. 반년만 참으면 돼…… 어차피 그놈은 네게 손대지도 않을 테니 걱정 말고.”

어련하시겠나. 내가 걱정하는 건 그런 문제가 아닌데 말이야.

“진짜 나 자주 보러 올 거지?”

“그럼.”

부탁이건대 제발 그러지 말아다오.

난 내 남편 될 기사 양반이 날 죽이지 않을 길을 모색하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남편의 누이동생을 독살하지 않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 한들, 내가 안 하면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죽일 것이 뻔한 데다 다들 내가 했다 믿을 것도 뻔했다.

그러니까 나는 약 반년의 시간 동안 남편의 누이가 암살당하는 것을 막는 것에 앞서, 일단 나를 무지무지 싫어할 남편과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무해한 사람이라는 걸 인지시켜야겠지.

어쩌면 지금과 같이. 예전과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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