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9화 (128/128)

외전 9화

“아아악! 으악!”

나는 사지를 휘저으며 깨어났다. 하녀가 놀라서 달려왔다.

“어머, 공작 부인! 대체 무슨 꿈을 꾸신 거예요? 목숨 걸고 결투라도 하시는 줄 알았어요. 괜찮으세요?”

나는 여전히 헐떡대며 일어나 앉았다.

눈앞 창문 너머로 익숙한 설산이 보였다. 초가을 하르펠령의 풍경이었다.

커다란 침대. 내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조금 구겨진 이불과 베개가 누구의 것인지, 기억이 천천히 돌아왔다.

나는 엎드려 킁킁대며 내 옆자리 이불의 냄새를 맡았다.

“맙소사. 그야!”

“공작……부인?”

하녀는 나를 마치 세상에 없는 변태 보듯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변태였고, 수치심보다는 기쁨이 컸다.

“꿈이었어!”

“예, 꿈이지요. 늦잠 주무시니까 악몽 꾸고 그러시죠.”

그러나 내 심장은 아직도 카이런을 도망쳐 보낸 그 시각처럼 급히 뛰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정신을 수습했다.

이곳은 하르펠성, 나는 카이런 공작의 아내, 우리는 부부…….

정말 꿈이었을까?

차라리 꿈이라면 좋았겠다. 두 번째 빙의라니, 남자들이 군대에 또 끌려가는 악몽을 꾸는 기분이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건 군대 꿈과는 달랐다. 그와 다시 사랑에 빠진 것만은 싫다고 할 수 없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 악몽은 아니었어.”

“얼른 일어나셔요. 공자님이 기다리셔요. 오늘 소풍 약속하셨잖아요.”

“응?”

하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에요, 못 들은 걸로 하셔요. 지금 의원을 불러올게요, 공작 부인. 지금 소풍 갈 때가 아니네요.”

“으아아……?”

내 아들. 통통한 살이 접히는 게 숨이 막히게 귀여운 아들. 까르르 웃음소리가 심장마비를 불러일으키는…….

“데리언과 소풍 가기로 했는데! 도시락은?”

“준비 끝났지요. 공작님도 초소 점검 마치고 곧 오실 거고요. 이제 의사는 안 불러도 되겠네요.”

나는 얼른 침대 밖으로 나와 잠옷을 벗었다.

그러자 시중을 들던 하녀가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다른 시녀도 몸을 돌리고 쿡쿡거리는 게 다 들렸다.

그들을 흘겨보는데 곁눈으로 거울이 들어왔다.

“헉…….”

내 목과 가슴에 붉은 꽃잎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북부에 자라지도 않는 벚꽃잎 같은 민망한 자국들이…….

어젯밤이 새록새록 기억났다. 절대 아무에게도 말 못 할 영상이.

저 이불들이 멀쩡하게 침대 위 있는 건 내가 필사적으로 다시 정리하고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무지 그런 걸 드러내는 걸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생긴 건 그렇게 금욕적으로 잘생겨서는, 한번 봇물이 터지더니 도무지…….

하녀가 웃음을 꾹 누르고 말했다.

“어머, 부끄러워하실 것 없는데……. 참 두 분은 식지도 않고 불타셔요?”

평소라면 뻔뻔하게 대답해주었을 텐데, 오늘은 좀 기력이 달렸다.

나는 잠자코 준비를 마치고 데리언의 방으로 갔다.

“엄마!”

“데리언!”

나는 통통하고 말캉한 살을 꼭 안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당연했다.

내가 이런 아이를 남겨두고 또 다른 몸으로 빙의된다던가 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데리언은 숨이 막힌다고 나를 밀치며 바동거렸다.

“엄마, 숨 막혀. 엄마.”

“응응, 알았어. 데리언. 우리 아들 숨 막히게 해서 미안.”

“엄마, 도시락! 도시락!”

데리언에게 소풍이란 들판에 나가는 행위가 아니라 식탁이 아닌 곳에서 도시락을 먹는 행위를 말하는 것 같았다.

“응, 나가서 도시락 먹자. 아빠도 오실 거야.”

그러자 데리언이 까르르 웃었다. 행복감에 숨이 차올랐다.

❄❅❄

시커먼 털가죽 아머로 무장한 북부 기사의 든든한 호위를 받아 성 밖 들판에 도착했을 때, 들개풀이 보랏빛 꽃을 가득 피우고 있었다.

정말 돌아왔구나.

내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데리언이 아장아장 걸어가 냄새를 맡았다.

“냄새 좋다! 엄마!”

데리언은 들개풀 꽃 한 송이를 따서 내게 내밀었다.

“어머나, 고마워라.”

내가 쪼그려 앉아 그것을 받아들려고 하자 데리언이 꽃을 뒤로 숨겼다.

“안 돼.”

“응?”

“그만.”

‘그만’은 내가 데리언이 심한 장난을 칠 때 중지시키는 말이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데리언은 꽃을 내 귓등에 꽂아주었다.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야. 세상에 여자란 엄마뿐이니까.”

그것은 하르펠이 가끔 내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였다. 이런 거랑 저런 걸 하고 싶은 날, 분위기 잡을 때 말이다.

대체 그걸 언제 주워듣고, 저 녀석이……!

“데, 데리언?”

나는 데리언의 입을 막으며 호위 기사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비싯비싯 웃으며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소문은 이래도 나고 저래도 날 것이다. 하녀들도 내고 기사들도 내고…….

나는 체념한 기분으로 도시락을 먹을 준비를 했다.

두꺼운 천을 깔고 위에 누우니 새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 좋게 소스라칠 만큼 차가운 바람도 좋았다.

카이런과 내가, 우리가 함께한 뒤로 저 하늘에는 불길한 기운이 드리운 적이 없었다.

카이런은 하르펠을 재건하고 북쪽 방벽을 지켰다. 북부는 지금까지 어느 때보다 살기 좋았다.

재해가 사라지자 사람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부가 쌓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결같은 북부의 수호자, 그리고 나의 남편이자 연인이었다.

“훗…….”

멀리서 그가 오고 있었다.

데리언이 발딱 일어나 두 팔을 마구 흔들었다.

“아버빠!”

데리언에게 얼마 전부터 아빠라고 하지 말고 아버님이라고 부르라고 했더니 저렇게 되고 말았다.

카이런은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데리언을 안아 들었다. 말투는 차가웠지만 눈에는 이글이글, 아들에 대한 애정이 불타고 있었다.

“요놈, 방금 뭐라고 했지?”

“아빠. 아버……빠.”

“하나만 해. 하나만.”

그러자 데리언은 엄청난 목청으로 외쳤다.

“아빠! 아빠아!”

나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동물들 놀라겠다. 데리언.”

카이런이 데리언을 내려놓자, 나는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언제나 그러듯 내 허리를 안아 몸을 들어 올리며 내가 그에게 공중에서 입 맞추게 해주었다.

입술이 닿았을 뿐인데, 화라락, 불길이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의 기억뿐 아니라 어젯밤의 감각들도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인 것이 분명했다. 우리의 입맞춤은 갑자기 격렬해졌다.

“엄마. 배고파.”

기다리다 못한 데리언이 내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칭얼대었을 때야 우리는 정신이 들었다.

여전히 나를 향해 눈을 이글거리고 있는 카이런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돌아왔어.’

그러나 나는 딴청을 피우며 그의 가슴을 슬쩍 밀었다.

“어머, 애 보는데.”

그러자 카이런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이상하게 부인을 아주 오래 못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새벽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이제 좀 낫군.”

“…….”

정말 악몽이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와 나의, 우리 가족의 소중한 시간이었으니까.

“데리언, 도시락 먹을까?”

“응!”

우리가 이른 점심을 즐기고 있을 때 멀리서 말 한 마리가 다가왔다.

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체이어스 경, 식사 같이 해요!”

그러나 체이어스는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괜히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공작 부인. 공작님만 쳐다보실 거면서.”

그러자 카이런이 삐딱하게 말했다.

“그럼 그녀가 누굴 보란 말이지?”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람 무시당하는 기분이 드니까…….”

그때 데리언이 빵 한 조각을 체이어스의 입에 넣어주었다.

“체이어스 경! 이거.”

“아앙.”

체이어스는 그것을 과장된 동작으로 받아먹었다.

하르펠 공작의 책사 체이어스 마론이 ‘아앙’이라니.

“오오, 정말 맛있습니다. 공자님!”

“체이어스 경도 결혼하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대요. 엄마가 그랬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당혹하여 손을 흔들다가 그냥 먼 산을 바라보았다.

체이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카이런에게 말했다.

“남부 놈 하나가 하르펠가의 기사가 되겠답니다. 실력을 보일 기회를 달라고 난동을 부리고 있는데, 난동 실력을 보니 솜씨가 나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카이런이 코웃음을 쳤다.

“흥. 남부 놈? 미쳤군.”

이제 프라일령과 하르펠령은 공식적인 원수 사이나 다름없었다. 남부 일대 대부분이 프라일령인 걸 고려하면 ‘남부’라는 말 자체가 북부에서는 추방령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하르펠가의 봉록을 아무나 받는가.

체이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일어났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큽니다. 그놈 끌어내려면 병사 몇은 다칠 테니 배상금이 조금 지출될 겁니다.”

카이런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그를 외면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예요?”

“리오넬이라고 했습니다.”

“헉.”

“혹시, 아시는 자입니까?”

내가 가장 아끼는 세 남자―데리언까지 포함해서―가 내 입으로 시선을 모았다.

내가 아는 남부인이라면 필시 프라일가의 사람일 것이 분명하니 저러는 것이었다.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나는 울상을 하고 카이런에게 말했다.

“부탁해요.”

카이런은 이를 갈 듯이 말했다.

“역시 프라일가 놈인가?”

“부탁해요, 카이런.”

내게도 필살기 하나 정도는 있었다.

‘부탁해요, 카이런’. 이 말이면 어지간한 일은 해결되었다. 물론 조심해서 써야 했지만.

나를 빤히 바라보던 카이런이 마침내 손을 휘휘 저었다.

“가둬놔. 후작이 보낸 첩자인지도 모르니 심문해봐야겠어.”

체이어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돌아갔다.

카이런은 체이어스가 멀어지자마자 나를 추궁하며 쏘아보았다.

나는 긴장해서 대답했다.

“그에게는 신세를 크게 졌어요.”

“대체 언제?”

“엄마, 언제?”

아이를 앞에 두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음……. 카이런을 앞에 두고도.

“그 사람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 함께 있지 못했을 거예요!”

“무슨 말이지?”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꿈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없잖은가.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좀 밉상이겠지만……. 그래도 부탁해요.”

카이런은 내가 울상을 하자 허, 하고 웃었다.

우리가 함께 겪어온 고난 뒤에는 언제나 불가사의가 있었다.

그 가혹한 기적들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작은 인연 하나가 더 있다는 것 정도는, 이제는 그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키가 그렇게 크면 아머는 특별 주문해야겠군.”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들판을 지나는 바람이 실어다 주는 들개풀 향과 그의 어깨의 든든함.

그리고 내 작은 아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니 이 세상이 완벽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외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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