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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8화 (127/128)

외전 8화

“말도 못 타는 자의 손에 잡히는 마물이라면, 우리 마을의 다리 저는 거위만도 못하겠구만!”

리오넬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려서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는 지난번 카이런에게 한 방에 나가떨어진 원한 때문에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원작에서처럼 내 말이 실제로 잘못 이해된 것이 속상하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리오넬에게 ‘거위 말고 네 다리를 분지르고 싶다!’ 생각하면서.

레오르트는 내가 만들어낸 상황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지만 짚고 넘어갔다.

“앞으로 별채 쪽으로는 가지 말거라.”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크게 끄덕거렸다.

“그럼요, 아버님.”

레오르트 후작은 카이런을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에게 조금도 불쾌한 기색이 없는 것이 오히려 후작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 분명했다.

프라일가 기사들은 여전히 말이 어쩌고 마물이 어쩌고 떠들었고, 체이어스와 하르펠가의 기사들은 나를 틈만 나면 몰래 쏘아보았다.

실내는 난장판이었지만 우리 둘은 퍽 편안하게 식사를 마쳤다. 카이런과 나는 말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내가 술을 몇 잔이나 마셔버린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뒤늦게 취기를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주연으로 넘어가면 적당히 미리 일어나는 것이 여자들의 예의였다.

“아버님, 즐거운 저녁 보내세요.”

“그래, 루엘라.”

하지만 내 상태는 별로 예의 바르지 못했다.

취기 때문인지, 심장이 뛰어 견디기 힘들었다.

❄❅❄

카이런 일행은 한참 후에 연회장을 떠났다.

내가 복도에 딸린 발코니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자 체이어스가 카이런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카이런은 체이어스의 팔을 지그시 밀었다.

“공작님.”

체이어스가 낮게 항의했지만 카이런은 턱짓으로 먼저 돌아가라는 신호를 했다. 그러나 하르펠가 기사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북부인들은 자기가 아니다 싶은 짓은 하지 않는다. 레오르트 후작의 딸이라니, 주인이 지금 미친 짓을 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카이런이 사납게 중얼거렸다.

“꺼지라고 했어.”

“근처에 있겠습니다.”

체이어스는 못마땅하게 말하고 다른 기사들과 멀어졌다.

나는 카이런의 소매를 붙잡아 발코니 구석으로 데려갔다. 경계를 서는 병사들, 복도를 지나는 하인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자리였다.

카이런은 지금 내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 나를 매섭게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에 그의 얼굴이 환하고도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프라일 양. 무슨 짓입니까?”

나는 그에게 오늘 내가 한 말 모두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꼭 오늘 밤이 가기 전에.

그런데 나와 단둘이 은밀한 장소에 있는 것이 몹시 불편하다는 그의 표정에, 나는 빈정이 상하고 말았다.

전엔 이런 거 좋아했으면서! 아니, 만날 자기가 먼저 했으면서!

“왜요, 더 비난해드려요?”

내가 뾰족하게 말하자 카이런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가 낮게 웃었다.

몹시 어이없다는 듯이, 그리고 조금 즐겁다는 듯이.

“직접 겪어보니 프라일가의 평판은 틀린 것이 없는데 단 하나만 사실과 다르군요. 프라일가의 영애 말입니다.”

어차피 내 아버지도 아닌데 후작을 욕하거나 말거나.

취기가 오른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쏘아보았다. 눈으로 내 손이 그의 뺨에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내 손도 그의 멋진 얼굴과 함께 달빛을 받아 더 하얗게 보였다.

‘미쳤나 봐. 아직은 안 되는데. 안 된다고…….’

마침내 내 손이 카이런의 뺨에 닿자 그가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조롱이 낫겠군요. 프라일 양.”

취기 때문일까, 그의 시선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매번 이런 연극을 통해서만 그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이 지독히 화가 났다.

원작인지, 오로라인지. 아니면 신인지. 그들은 나와 카이런, 이 세계의 아무에게도 자비롭지 않았다.

나는 쓰게 중얼거렸다.

“즐기신 줄 알았는데요.”

나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숨을 참았다. 카이런의 더운 손끝이 내 뺨을 살짝 쓸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 심장은 닳아서 없어졌거나 터져서 부스러기가 다 흘러내린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고,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그만 느껴졌다.

카이런이 나직이 속삭였다.

“이 눈빛, 당신이 숨긴 진짜 모습은 이거군…….”

들켰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자 그의 손끝이 다시 내 뺨과 귓가를 쓸었다.

더운 체온의 흔적이 내 입술 근처로 천천히 움직여갔다.

그제야 그의 호흡에 술기운이 묻은 것이 느껴졌다.

그의 호흡.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취기 때문인지 내가 원하는 남자이기 때문인지, 머릿속이 핑 돌아 그에게 기대고만 싶었다.

“……!”

그때 카이런의 기운이 날카로워졌다.

놀라 눈을 뜨자 바깥쪽 정원을 지나던 하인 하나가 놀라 우리를 바라보고 선 것이 보였다.

그다음 카이런의 움직임은 채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놓고 발코니 테이블에 놓인 작은 석재 장식품을 집었다. 그것은 그대로 하인의 머리로 날아갔다.

“죽지는 않았을 거요.”

카이런은 미소 지으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어두웠다.

“하지만 가짜 손님 대우도 끝났겠지.”

하인이 깨어나 증언하면 끝이었다. 레오르트 후작이 감히 그의 금지옥엽을 건드린 자를 용서할 리 없었다.

나는 술이 확 깼지만 다리가 풀려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카이런이 곧바로 붙잡아주었다.

나는 눈물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미안해요! 또 내가 망쳐버렸어!”

카이런은 내가 울자 놀라는 것이 분명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다정한 미소를 언제 보았더라…….

“남부 음식은 도무지 입에 맞지 않소, 프라일 양. 남부에서 좋은 추억이란…… 장미 한 송이뿐이군. 그럼 이만 이별을 고하겠소.”

카이런은 하르펠을 되찾기 위해서 레오르트 밑에서 머리를 숙였을 뿐, 진정으로 굴복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의 손에 죽느니 떠나야만 했다.

그는 발코니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그럼 이전에 무엇을 망쳤는지, 언젠가 들을 기회가 있기를 바라겠소. 루엘라 양.”

마지막까지 멋있는 말만…….

“말을 구해서 별채 동쪽으로 통하는 문에서 기다리세요. 드릴 게 있어요. 꼭이요!”

나는 간절히 말한 다음 위층으로 달렸다.

혹시나 그가 나를 기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내 몸의 모공을 다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나는 그를 믿어야만 했다. 내게는 언제나 다른 선택이 없었다.

나는 곧장 내 방으로 갔다가 비밀통로를 통해 후작의 집무실로 숨어들었다.

황태자가 하냐크족과 맺은 계약서.

나는 그것을 찾아내 동쪽 쪽문으로 달렸다.

별채를 지나 동문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가 이미 떠나버렸으면 어떡하지?’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았다. 시각을 다투는 상황, 적의 딸을 뭘 믿고…….

그러나 어둠 속에 선 여섯 마리의 말이 보였을 때 나는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카이런은 내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 품에 넣었다.

“황태자 전하가 하냐크족을 끌어들인 계약서예요. 폐하는 공작님을 제거하기 위해 이번 일을 꾸민 거예요!”

체이어스와 기사들이 저주하는 사이로 카이런이 침음을 흘렸다.

“당신은 방금 가문을 배신했소.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저는…….”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에서도, 이 세계의 전생에서도 당신을 꽤 많이 사랑했다고 말하면 그는 어떤 얼굴을 할까.

나는 고개를 돌려 멀리 횃불들로 환하게 밝혀진 저택을 바라보았다. 곧 추격대가 올 터였다.

그때 내 얼굴 앞으로 카이런의 손이 나타났다. 나를 말에 태우려는 것이었다.

“공작님! 그녀는 못 데려갑니다!”

체이어스가 사납게 말렸지만, 카이런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유는 차차 듣겠소. 이제 당신이 내 책임인 것은 확실하니까.”

나는 그 손을 붙잡아 내 뺨에 대었다. 나는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을 놓을 때 카이런의 눈빛이 하릴없이 흔들리는 순간을 볼 수 있어서, 나는 잠시 행복했다.

“가세요.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하늘에 그 빌어먹을 오로라가 펼쳐질 거예요.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거예요!”

횃불 무리가 우리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카이런의 말 엉덩이를 때려 출발시켰다.

역시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리오넬이었다.

누구보다 경쟁심이 강한 그는 다른 기사들을 때려눕히고라도 자신이 공을 세우려 할 터였다.

그는 땅에 쓰러진 나를 보고 말에서 내렸다.

“리오넬 경…….”

내가 애처롭게 부르자 그는 나를 안아 들고 흥분해 코를 벌름거렸다.

“그 북부 놈이 이랬습니까!”

“내게 약을…….”

“약을요? 무슨 약입니까? 죽여버리겠어!”

“이거…….”

나는 애처로운 얼굴로 붉은 유리 약병을 내밀었다. 그것은 언젠가 헤리어트가 선물해준 사랑의 묘약이었다.

내게서 약병을 받아 든 리오넬은 얼른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나는 순간 그의 팔을 붙잡아 약병을 입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는 나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완전히, 사랑에 빠진 눈길로!

나는 거구의 남자를 올려다보며 울먹이며 생각했다.

‘나도 이제 당신이 내 책임인 것 안다고요!’

코앞으로 다가온 추격단을 보며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저들을 막아줘요! 제발!”

리오넬은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커다란 횃불의 무리, 프라일가 가병 전부가 출동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앞에 선 것은 거구의 리오넬 혼자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커다란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그의 곁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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