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7화 (126/128)

외전 7화

루엘라는 우연히 카이런이 몸을 씻는 걸 보고 흉터에 대해 묻는다.

그녀는 말에서 떨어지기나 하다니, 그가 소문과 달리 별 볼 일 없는 남자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연회에서 별생각 없이 그 사실을 언급하며 실망감을 드러낸다.

프라일가의 가신들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기 실력을 늘 과장했다. 그것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그녀에게 기사들의 주인이 말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프라일가 사람들의 모욕에 대해서는 귀를 닫고 있던 카이런도 어쩐지 그것은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그들의 사랑은 그런 오해와 상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걸 자기가 먼저 말하다니!

“으아아!”

나는 이 소설 속 세계도, 원작의 억제력도 지긋지긋하여 신음을 토하며 돌아갔다.

❄❅❄

해 질 무렵, 나는 온실로 향했다. 온실은 늘 내게 다정한 장소였으니까.

내게 이 세계에서 돌봐주고 싶은 사람, 보고 싶은 사람은 카이런 하르펠뿐이었다.

그런데 그를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고 만나도 상처만 받는 상황이 나는 우울했다.

밀라는 알아서 온실 밖에 서 있었다. 온실의 입구는 하나뿐이므로 감시하기 쉬웠고, 굳이 풀밖에 없는 곳에 발을 들이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수면 효과가 있는 과실수 잎이나 잔뜩 따야겠다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

나는 치맛자락을 꼭 잡아 쥐었다. 무성한 과실수 너머 온실 가장 안쪽 벤치에, 카이런 하르펠이 앉아 있었다.

모든 걸 잃고 적이나 다름없는 자에게 억류된 주제에, 한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고고하기만 했다.

그는 냉담한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제가 일어나 인사한다면 밖에 있는 하녀가 눈치를 챌 겁니다.”

“저를, 기다리셨나요?”

카이런은 눈을 조금 찌푸렸다.

그럼 내가 누굴 기다렸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는 표정.

그가 모자란 인간을 앞에 두고 짜증이 날 때 하는 짓이었다.

그는 여전히 카이런 하르펠이구나, 나는 저도 모르게 설핏 웃고 말았다.

저렇게 미운 표정을 해도 사랑스럽다니.

석양빛을 받은 온실 색유리는 그의 몸에 대낮보다 더 어둡고 무거운 빛줄기를 뿌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카이런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편안한 얼굴로 그의 옆에 앉았다. 물론 충분히 떨어져서.

“어째서 이런 무례를 감행하셨나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태도가 순식간에 편안해지자, 그는 조금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루엘라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그는 나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앞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도 어쩌면 이 온실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과하러 왔습니다. 프라일 양.”

그는 낮에 마당에서 내가 울면서 돌아간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후작에게 무슨 불평이라도 할까 봐 말이다.

나는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잘못한 것은 그가 아니라 나였다. 좀 더 참았으면 좋았을 것을.

내 얼굴이 굳자 카이런도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그의 얼굴에 집중하며 웃으려 애써보았다. 이 얼굴 천재 같으니.

그러자 그도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가 사과를 받으면 대화는 끝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어 새침하게 말해보았다.

“사과라니요?”

“낮에 프라일 양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듯합니다. 제 가신의 무례도 함께 사과드립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카이런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이 곁눈으로도 보였다.

역시 나는 이런 새침한 밀당은 안 되는 여자였다. 이 소중한 시간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는 낮에 만난 적이 없어요. 이해하시겠어요?”

그러자 카이런의 얼굴이 나를 향해 돌아왔다. 지독하게 잘생긴 얼굴이.

나는 그에게서 눈을 피하며 말했다.

“곧 연회가 열릴 거예요. 저는……. 저는 그때 당신이 말에서 떨어지기나 하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모욕을 줄 거예요.”

카이런은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째서입니까?”

“저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요.”

“…….”

“오늘도 사냥 중에 공격을 당하셨죠? ……제 미움을 받으시면 아주 약간은 지내기 수월해지실지도 몰라요.”

카이런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는 만난 적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나는 입을 앙다물고 벌떡 일어났다.

대체 눈치는 누구한테 줘버렸는지!

그러나 이제 카이런은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사이 나를 다 꿰뚫어 본 것 같은 시선이, 나는 무서우면서도 설렜다.

나는 최대한 새침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버티세요. 기회는 올 거예요.”

그러나 내 팔이 훅 뒤로 당겨졌다. 내가 균형을 잡았을 땐 나는 그의 팔 안에 있었다. 그가 앉아서 내 팔을 당기는 바람에 나는 그의 무릎에 누운 것 같은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얼마 만인지……. 내 얼굴은 바로 달아올랐다.

온실이 더워서라고 변명할 수 있으려나.

그런데 그도 처음으로 얼굴을 붉히며 나를 일으켜주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를 어색하게 바라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무, 무례하시네요.”

“왜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겁니까? 루엘라 프라일 양.”

나는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카이런은 나를 여자로서 붙잡은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가 온실에 나타난 건 아마도 내가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 후작 딸의 이상한 행동의 이유를 알아내려고 말이다.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프라일가의 가신들은 오만해요. 가끔 저조차도 그게 거슬리거든요.”

하지만 카이런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 말을 조금도 믿고 있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세상이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당신은 지금 도망자이며 죄수지만, 진짜 카이런 하르펠은 거기서 멈추는 사람이 아니에요.”

“…….”

“헤리어트는 보기보다 푼수고, 밀라는 매질을 피하기 위해서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저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죠. 그게 가장 아름다워지는 방법이거든요. 혹은…… 자기 생각에 빠져 실수를 거듭하거나.”

카이런의 턱 근육이 경직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때가 오면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 증명해야 해요.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 아직 모르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군요, 프라일 양.”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아우라를 지켜야 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예요.”

나는 조용히 온실을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그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

사냥 후에 연회를 벌이는 풍습은 남북부가 같았다.

북부인들이 신에게 감사를 바치거나 즐기기 위해 연회를 벌인다면, 남부에서는 사람을 모욕주기 위해 연회를 벌인다는 점이 달랐지만.

사슴 고기를 사흘간 절여서 만든 요리는 사냥 연회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미였다.

하지만 그 요리를 앞에 둔 프라일가의 가신들의 기운은 험악했다. 사슴 대신 카이런을 요리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운 얼굴들이었다.

사냥터에서 그를 말에 떨어트려 사고를 당하게 하려고 그토록 애썼건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물론 그때 체이어스나 크레인 같은 하르펠가 기사들의 활약도 컸다. 그래서 프라일가의 기사들은 이제 하르펠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들 모두를 잡아먹고 싶어 했다.

그 팽팽한 기 싸움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능력의 우위를 내보인 하르펠가 기사들은 이제 비웃음을 띠고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레오르트 후작은 여유롭게 말했다.

“주방에서 말하길 하르펠 공작께서 잡은 사슴 고기가 가장 부드러웠다고 하더군요.”

“후작님의 땅이 좋은 사슴을 길러낸 겁니다.”

“허허허. 너무 겸양할 것 없소. 듭시다.”

레오르트가 첫 번째 고기 조각을 뜯어내자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고기 조각을 베어 테이블로 날랐다.

나는 카이런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보니 예전 생각이 나 그리웠다.

문득 그가 내 쪽을 스쳐보았다.

‘이제부터 제 일을 할 거예요.’

그 시선은 우연인 듯 했지만 아니었다. 그가 한순간 미소를 흘렸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자 내 마음은 놀랍게 편안해졌다.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말했다.

“땅이 기름져서 짐승들이 살이 많이 오른 게 틀림없어요. 말도 잘 타지 못하는 분이 잡아오실 정도인 걸 보면요.”

가신들은 서로 눈치를 교환했다. 설마 내가 첫 포문을 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르펠가 기사들이 도끼눈을 하고 나를 보는 동안 후작이 물었다.

“무슨 소리냐, 루엘라.”

“별채 쪽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산책하다가 우연히 공작님을 보게 되었는데……. 말에서 떨어지셨다는 흉터도요. 저는 말에서 떨어지는 영주가 있다는 말을 처음 들어서 놀라고 말았어요. 프라일가 기사들 중에는 그런 일은 없으니까…….”

그러자 프라일가 기사들이 일제히 깔깔댔다.

최근에 말에서 떨어졌던 것이 분명한 몇몇은 뜨끔한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대부분 열심히 조롱에 끼어들었다.

“영주가 기사들 공을 빼앗는 건 권리지. 자기 실력이 아무리 가짜라도!”

“마물은 말에서 떨어지며 밟아서 잡는 건가?”

나는 카이런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아무리 협의하고 하는 일이라지만 미안하고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

그때 나는 놀라운 것을 보고 말았다. 카이런이 나와 눈을 맞추고 피식 웃었던 것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찰나의 웃음이었지만, 어쩌면 카이런은 내 노력에 찬 비난을 즐기는 것 같았다.

아니, 아마도 분명히.

‘카이런도 변태였어?’

나는 내적으로 흥분한 상태로 말을 이었다. 그 장면의 대화는 거의 다 기억하고 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물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라면 좋은 일이잖아요…….”

그때 리오넬이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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