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그날 밤 나는 밀라에게 더운 차를 끓여오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나몬 파이와 내었다.
아직은 밤이 되면 기온은 꽤 서늘해져서 더운 차를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정도였다.
“자네도 한 잔 마셔.”
“어머, 아니에요, 아가씨. 이 찻잔이 얼마나 비싼 건데…….”
“자네도 한 잔 마셔.”
“예……. 아가씨.”
그제야 내 새초롬한 눈빛을 확인한 밀라는 차를 입에 댔다. 그리고 눈이 커졌다.
“어머, 향이 독특하네요?”
“그렇지?”
나는 눈을 휘어 접으며 웃었다. 루엘라가 이럴 때 얼마나 매혹적인 표정이 되는지, 나는 이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찻잔을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발코니로 향했다. 밀라는 차가 맛있는지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나는 발코니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차가 식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밀라는 잠들어 있었다.
언젠가 화상 연고를 거래하던 때, 헤리어트는 나와 남부의 차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실은 자신은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지 않다며, 오히려 남부의 차 품종보다는 프라일가에서 키우는 더운 외국의 식물들에 대해 잘 안다고 말했다.
그중에는 수면제로 사용하는 과일 잎도 있었다.
나는 밀라가 코를 고는 소리를 들으며 찻잔을 발코니 밖으로 쪼르르 따라버렸다. 그리고 발코니 밖으로 나갔다.
아까 낮의 온실 공기를 생각하면 지금 밤공기는 은혜로울 정도로 시원했다.
나는 저택의 거대한 실내 정원에서 들리는 새 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조용하게 걸었다. 경비를 서는 병사들이 지나갈 때는 정원수 뒤에 재빨리 숨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보였다.
그는 별채 마당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좀처럼 문밖출입을 하지 않더니, 카이런은 밤에는 그 마당을 자신의 검기만으로 쪼개놓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움직임에 매혹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마침내 검을 집어넣었을 때, 나는 그가 집중해서 나를 의식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단지 수련에 방해되어 무시하는 중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심장이 쿵 하고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 그의 무시에 상처받아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묘하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흥분에 가까웠다.
나…… 그런 성향이 있었던 걸까?
카이런이 나를 향해 돌아섰을 때 턱에서 땀방울이 반짝이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쏘아보았다.
그 예민하고 못마땅한 기색은 어느 마을에 눈사태가 덮쳤다는 소식을 들을 때나 하는 것이었다.
내 심장은 끝을 모르고 빨리 뛰고 있었다.
첫마디를 뭐라고 해야 하지? 반갑다고 해야 할까, 위로해야 할까. 아니면 루엘라답게 순진한 말을 해야 하나…….
‘헉.’
카이런은 획 돌아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마치 내가 눈앞에 서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는 듯이!
“공작님!”
내 부름에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나는 세상에 또 없을 것 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등으로도 그가 나를 꺼리고 싫어하는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나는 정말로 상처받을 것 같았다.
나는 생각을 거치지도 못하고 마구 더듬거렸다.
“아까 낮에 훔쳐봐서 죄송해요. 그리고 음, 리, 리오넬 경에 관해서도요. 저도 그 사람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그런다고 앞으로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
말을 하면서도 내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로 바꾸었지만…….
“공작님, 식사는 어떠세요? 여기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오니까 잘 드시지 않으면…….”
귀로 들려오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제발 누가 나타나서 나를 말려주었으면 싶었다.
원작에서 루엘라가 우연히 별채로 들어와 카이런과 마주쳤을 때, 그녀는 말이 없었다.
요정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그를 바라보다가 까르르 웃으며 돌아갔다.
카이런은 그녀의 가볍게 날리던 치맛자락을 오랫동안 뼈아픈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굳이 찾아와 자신을 모욕하고 간 그녀의 요정 같은 뒷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그때 루엘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 나타나다니, 이제부터는 즐거워질 것 같아.’
두 사람이 오해를 푼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원작을 지키겠다고 해놓고선, 나는 루엘라를 덜떨어진 반푼이로 만들고 있었다.
“이만 돌아갈게요. 방해해서 죄송해요. 하르펠 공작님.”
나는 눈물이 다 핑 돌아서 얼른 몸을 돌려 돌아가려 했다.
그때 카이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심한 시각에 혼자 돌아다니지 마시오.”
나는 벼락을 맞은 듯이 우뚝 멈추었다.
“루엘라 양.”
그리고 카이런이 별채로 돌아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쿵쾅쿵쾅쿵쾅…….
내 심장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나 실은 이런 거 좋아했나 보다. 남자한테 막 취급당하는 걸 즐기는 그런…….
나는 문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가 나를 프라일 양이 아니라 루엘라 양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내게 다시 사랑 고백이라도 한 기분을 느끼며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무뚝뚝한 경고가 다시 그와 가까워진 듯 여기게 만드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사람 꼴이 아닌 모습으로 발코니를 기어 올라왔을 때, 밀라는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모양이었다.
‘아아. 저대로 턱이나 돌아갔으면.’
나는 담을 타다 치맛단에 구멍이 난 걸 발견하고 테이블 모서리에 걸렸다고 변명하기로 했다.
밀라가 의자에서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서 급히 일어나다가 그랬다고 하면 밀라는 아무 소리 못 할 것이었다.
나는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잠들었다.
카이런도 지금 잠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험난한 내일과 싸워야 했다.
❄❅❄
아무리 큰 성이나 저택에서도 기사단이 나가고 돌아오는 것은 모두 다 알기 마련이었다.
한꺼번에 움직이는 말발굽, 아머의 금속음, 사람들의 웅성거림 따위는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날 오후, 그 소란에 내가 나가보려 하자 밀라가 말했다.
“주인님이 그 북부인들 데리고 사냥을 다녀오셨대요.”
사냥 에피소드가 열린 것이다.
프라일가의 기사들이 카이런을 다치게 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쓰지만, 체이어스의 도움으로 그가 사냥감을 탈취한 이야기였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나는 울컥 소리쳤다가 재빨리 울 듯이 가녀리게 말했다.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놀랐잖아.”
“어머, 죄송해요, 아가씨. 앞으로는 놀라시지 않게 미리 알려드릴게요.”
“응응. 그래줘. 고마워, 밀라.”
밀라의 얼굴이 슬쩍 달아오르는 게 보여 내가 쳐다보자 그녀가 어색하게 말했다.
“고맙다는 말씀을 다 하시고……. 아가씨 요즘 이상하셔요.”
아차 싶었다. 하지만 나는 새초롬하게 말했다.
“내가 이상해?”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나요! 호호호.”
밀라는 재빨리 방에서 나갔다. 내 질문을 피하기 위해서였지만, 그것은 내가 그녀를 피할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그대로 별채로 향했다.
별채 마당 한쪽의 우물가.
나는 그림 같은 남자가 양동이로 몸에 물을 들이붓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의 큰 흉터를 보니 속이 상했지만 그건 그거고. 어후.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체이어스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카이런을 보느라 손을 내저었다.
“잠깐 가만 계세요, 체이어스경. 지금 중요한 장면이라고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프라일 양. 여기는 오실 데가…….”
그러자 카이런이 날카로운 시선을 돌렸다.
그는 몸에서 물을 줄줄 흘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다른 기사들은 우리 둘을 심상치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프라일 양.”
그가 호칭을 다시 프라일 양으로 바꾼 것에 조금 삐쳐서, 나도 호칭을 바꾸었다.
“카이런 공작님.”
한 가문 내에서 사람을 구분해야 하는 경우나 친한 사이가 아니면 하르펠 공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았다.
내 친근한 칭호에 체이어스가 도끼눈을 떴다. 그는 내 출현을 후작의 모종의 음모라고 여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카이런은 체이어스에게 닥치라고 말하는 듯 내게 말했다.
그 말투는 어찌나 차갑고 싸늘한지.
“또 혼자시군요.”
지난 삶에서 나는 그의 특별 대우를 받고 있었다. 조금 모자란 소꿉동무로서 말이다.
그래서 몰랐던 것을 이제야 알아가고 있었다.
그는 여자들을 이렇게 무섭게 대하는구나.
체이어스는 ‘또’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듣고 경악했다.
카이런 공작이 자기도 모르게 레오르트 후작의 딸을 만났다. 이것은 심각한 일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만 돌아가시죠. 때가 좋지 않습니다.”
전에는 일부러 목욕하는 것 불러서 보게 했으면서!
나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버님과 사냥에 나가셨다기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어요.”
“좀 전에 돌아왔습니다.”
체이어스가 못 참겠다는 듯 끼어들었다.
“아무도 없으면 영애 혼자 오셔도 되는 일입니까?”
내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자 체이어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내가 울까 봐 겁을 먹어 그러는 것이었다.
카이런도 그것을 막으려는 듯 한결 부드럽게 말했다.
“프라일 양이 이곳을 드나드실 이유는 없습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이 남자가. 말투만 부드러우면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강경한 뜻은 똑같은데.
이대로면 나는 원작 중반부가 시작될 때까지 그와 제대로 된 대화 한번 못할 터였다.
원작의 루엘라는 그가 하르펠로 떠나고서야 그를 잃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야 그녀는 헤리어트를 협박해서 카이런을 쫓아 집을 나간다.
나는 정말로 울 것 같은 기분으로 그의 옆구리에 난 흉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흉터를 없애려고 보트를 탈취해야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 호수 위 하늘은 참 맑았는데…….
내 시선이 자기 흉터에 꽂혀 있음을 깨달은 카이런이 말했다. 나를 쫓아 보내려는 것이 분명한 말투였다.
“말에서 떨어져 생긴 흉터입니다. 영애가 보실 만한 것이 아닙니다.”
제길! 저 말을 왜 해선!
흉터에 관해서는 원래 내가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