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나는 헤리어트 덕에 성공적으로 별채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갈 수 있었다.
카이런 일행이 나를 발견하고 들어가 버리기라도 할까 봐, 나는 발코니 끝 쪽에 몸을 숨긴 채 내려다보았다.
헤리어트는 내가 그러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내버려 두었다.
체이어스와 하르펠령 기사들은 작은 마당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그걸 보니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게오르그의 연무장으로 다시 돌아간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헤리어트가 내게 속삭였다.
“수련 시간인가 보구나. 워낙 추운 곳에서 사는 자들이라 이곳 날씨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을 거야. 마물 고기는 먹지 않는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자.”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을 때 별채 마당으로 프라일가의 기사 무리가 쳐들어왔다. 그들의 공격적이고 거만한 태도는 쳐들어왔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역시나 선봉은 리오넬이었다.
“하르펠 공작, 계십니까!”
하르펠가 기사들은 사나운 눈빛으로 나란히 섰다. 그러나 목검 따위를 들고 중무장한 십수 명의 프라일가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그들은 괴롭힘당하는 아이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 별채 안에서 카이런이 나타났다.
“아.”
내 작은 탄식에 헤리어트가 내 팔을 가볍게 잡았다.
“루엘라, 귀한 여인이 볼만한 광경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묵직하게 힘을 주어 떼어냈다.
나는 카이런에게 집중했다. 그는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던 듯 셔츠를 대충 걸친 채였다.
“계신데.”
카이런의 간단한 대답에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급히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좋아! 나는 원작의 이 장면을 정말 좋아했다.
“루엘라, 네가 여기 있는 걸 알면 후작님께서 화를 내실 거다.”
헤리어트가 다시 속삭이며 재촉해서 나는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그렇게 제 눈과 귀를 다 닫아놓으면 제가 어떻게 성장을 하겠어요?”
“……!”
나는 놀라 멍하니 입을 열고 선 헤리어트를 내버려 두고 발코니 측면 벽으로 붙었다.
리오넬이 검을 뽑고 고함을 쳤다.
“아가씨 앞에서 나를 개망신시키다니. 이건 도저히 말로 해결할 것은 아니오, 공작님. 검을 뽑으시지요. 싫으면 그냥 두들겨 맞으셔도 괜찮겠습니다만.”
리오넬의 거만한 엄포에 프라일가 기사들이 일제히 웃었다. 하르펠가 기사들의 얼굴은 적의로 타올랐다.
아무리 추락했다 한들, 영지전도 아닌데 일개 기사가 귀족에게 도전하다니.
“감히!”
체이어스가 진검을 뽑아 앞으로 나서자 카이런이 그의 어깨를 손으로 꾹 눌렀다.
체이어스는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나자 카이런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완전히 빈 몸이었다.
“…….”
내 가슴속에는 <눈 내리는 사막>을 읽을 때 이 순간에 느껴졌던 긴장감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카이런 하르펠의 눈에는 선명한 분노가 있었다.
그는 레오르트 후작이 자신을 옥죄기 위해 그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참아 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숙인다는 것에도 선이 있는 법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너 이제 큰일났어. 리오넬 경.’
리오넬이 고함쳤다.
“왜, 공작. 자기 백성들을 다 버리면서 용기도 같이 버렸소? 으하하.”
나는 카이런의 눈이 순간 사나운 빛을 뿜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다.
그는 말없이 리오넬 앞으로 다가갔다. 보통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그의 거구 앞에서는 카이런조차 턱을 들어 올려다보아야 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발길질.
“컥!”
카이런에게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치워지며 그의 얼굴이 햇살 아래 환하게 드러났다.
리오넬은 배를 붙잡고 땅에 웅크려 꿈틀대고 있었다. 엄청난 격통에 비명조차 뱉지 못했다.
카이런은 눈을 가늘게 뜨고 프라일가 기사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하르펠 기사들도 침묵을 깨지 않았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만큼 이를 환하게 드러내고 프라일가 기사들을 멸시했다.
프라일가 기사들은 충격적인 상황에 잠시 허둥대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리오넬을 끌고 사라졌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끄으으……. 우리 남주 멋있어!’
“헉.”
그리고 그 순간, 카이런이 뱀이 움직이듯 스르륵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내 심장은 산산조각 났다.
대체 언제부터 내가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던 것인지.
그 잔인한 남자는 그런 나를 내버려 두고 별채 안으로 돌아가 버렸다.
“흐으…….”
내가 심장을 부여잡고 발코니에 주저앉자 헤리어트가 사색이 되어 나를 부축해 안으로 데려갔다.
“루엘라, 괜찮으냐? 잠시만 기다려. 의원을 불러오겠어!”
“그, 그만!”
나는 겨우 그렇게 말했다. 헤리어트는 내가 자기 팔을 붙잡고 헐떡대자 눈을 불안하게 굴렸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정말로, 진짜 괜찮아요.”
“루엘라…….”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방으로 돌아갈래요.”
역시, 루엘라의 눈물은 이 남부에서는 황명보다 강력했다. 그는 나를 잠자코 방으로 데려다주었다.
사실 그가 마주 선 건물 발코니에 서 있다고 해서 기척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온몸이 차가워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카이런이 나를 그런 차가운 멸시의 눈길로 보다니.
나는 분명 지금 적의 딸이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나인데!
내 표정을 본 헤리어트가 달래듯 말했다.
“루엘라, 말해보렴. 조금이라도 몸이 안 좋으면 의원을 불러야 해.”
나는 목소리가 아직 골라지지 않아 고개만 붕붕 저었다.
그러자 헤리어트는 무서운 얼굴로 일어나 말했다.
“그자는 이곳에 있어서 도움 될 게 없어.”
나는 원작의 루엘라의 대사를 진심 어린 기분으로 말했다.
“그의 눈 속에는 얼음이 들어 있었어요. 아마 그게 북부의 얼음이겠죠?”
“루엘라.”
“하지만 남부의 태양이 얼마나 뜨거운지 그는 배우게 될 거예요. 그렇죠?”
그렇다. 그의 마음은 아주 조금씩 녹아 물을 떨어트릴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헤리어트는 나를 조금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입을 꽉 다물었다.
그것이 헤리어트 드세일의 질투에 지독히 끈적거리는 불이 붙은 순간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후였지만, 나는 체념했다.
그가 카이런을 경계하고 질투하는 건 원래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헤리어트는 엄한 얼굴로 말했다.
“카이런 하르펠은 방금 우리 가문을 모욕했어. 구해준 은혜도 모르고! 그자가 어떤 자인지 알겠느냐?”
“먼저 공격한 건 리오넬 경이었어요.”
나는 새침하게 입을 앙다물었지만 헤리어트는 이번에만은 단호하게 나가버렸다. 밀라를 불러 감시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밀라를 방문 밖으로 쫓아내고 새 시나몬 파이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아야 했다.
❄❅❄
내가 카이런의 싸움을, 아니, 카이런이 리오넬을 뭉개주는 것을 관람한 후로 밀라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주인님의 명령이세요.”
그녀는 그 말 한마디면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
그녀는 내게 새로 출하된 유리 공방의 유리 장식품이나 새 옷 따위를 자주 갖다 바치며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지만, 그런 건 이미 방에 많았다.
지나치게 부유한 사람이 감사할 줄 모르게 되는 간단한 원리를 나는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물론 내 모든 관심이 카이런에게 가 있어서 그런 것이기도 했지만.
내 방 한구석에서 바느질을 시작한 밀라를 보며 부아가 치밀어서,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가씨, 어디 가셔요?”
“온실!”
밀라는 이미 멀어진 나를 종종걸음으로 뛰어 쫓아왔다.
“예에? 더우실 텐데요? 얼굴에 잡티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하지만 나는 걸음 속도를 더 올렸다.
북부에서 온실은 대낮에 여름을 경험해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하지만 남부의 온실은 사막 체험 장소였다.
“어후.”
찬란한 오색 광선 속에 희고 붉은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온실 내부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더위가 덜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밀라는 아예 온실 문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손을 저었다.
“그렇죠? 정 오시고 싶으면 해질 때 오셔요.”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온실 안의 열기는 사막에서의 기억을 소환할 만큼 대단했다.
하지만 이 열기야말로 밀라를 쫓아낼 유일한 수단이었다.
“난 괜찮아. 찬물, 아니 과일 화채를 만들어줄래? 전에 말했던 그…… 그 특별한 과일 넣어서.”
“그거 껍질이 딱딱해서 시간이 좀 걸릴 텐데요, 괜찮으시겠어요?”
아주 반갑지.
“괜찮아. 천천히 해.”
“어머, 아가씨 요즘 엄청 너그러워지셨어요. 호호호.”
나는 어이가 없어 어서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밀라가 고함을 쳤다.
“아무도 없소!”
다급히 달려오는 발소리 다음에, 하인 하나가 나타났다.
그러자 밀라는 그에게 말했다.
“아가씨가 발롱 열매가 들어간 화채를 드시고 싶어 한다고 주방에 전해줘요. 되도록 빨리!”
“예!”
하인은 다시 달려서 사라졌고, 나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제야 제국의 귀족을 통틀어 프라일가처럼 많은 사용인을 부리는 곳이 없다는 설명이 떠올랐다.
그리고 밀라는 나를 향해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듯 씨익 웃었다.
“하…….”
나는 온실 열기 때문인지 이 상황 때문인지 알 수 없는 현기증을 느끼며 드레스 앞섶을 조금 풀었다. 이미 목을 타고 땀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밀라를 따돌리는 걸 포기하고 온실을 살펴보았다.
과실수 가운데도 차를 끓일 수 있는 식물이 있었다.
내 손으로 차 한 잔 끓여본 지도 너무 오래였다. 무슨 일이라도 해야 카이런을 지척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잎사귀 하나를 쥐고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사람은 땀을 흘려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