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주연이 베풀어지며 악사와 광대들이 공연을 했다. 프라일가 사람들은 떠들썩하게 웃고 떠들었지만 카이런 일행에게 말을 거는 자는 없었다.
카이런은 태연한 얼굴로 식사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의 끔찍함이 덜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그 소란과 침묵 사이에서 곁눈으로 그를 살폈다.
그의 지독히 아름다운 옆얼굴, 차가운 턱선이 술을 조금 머금고, 음식을 씹으며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니 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레오르트 후작이 입을 열었다.
“남부 음식이 입에 맞습니까, 카이런 공작?”
그는 접시로부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곧, 나도 그의 정면을 볼 수 있었다.
‘아아, 카이런…….’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습니다, 레오르트 후작님.”
“남부 음식은 향이 강해서 북부인들에게는 좀 힘들다고 들었소.”
그때 프라일가 기사 하나가 다 들리도록 말했다.
“북부에도 음식이 있나?”
하하하, 커다란 폭소가 일제히 터지며 연회장을 메웠다. 후작은 모르는 척 함께 웃었다.
체이어스와 부하들은 살기를 뿜으며 좌중을 노려보았지만 자기들보다 훨씬 거대한 조롱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그 가운데서 카이런의 우아해 보일 정도의 태연함은 오히려 소름 끼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점점 날이 서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리오넬이 소리쳤다.
“하지만 북부의 전투마는 정말 쓸 만하지. 도망치는 주인을 잘만 싣고 다녔거든! 하하하.”
끼익, 내가 내려찍은 포크가 접시를 긁으며 미끄러졌다.
나는 하르펠령 사람들의 수중에 무기가 없는 것을 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그들이 연회장에 들어올 때 빼앗았기 때문이다.
‘남부에서는 식사 자리에 손님이 무장을 하지 않습니다.’ 하면서.
당연히 프라일가 사람들은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다.
후작은 접시에서 소음을 낸 나를 못마땅하게 흘기고는 바로 자애로운 얼굴로 카이런을 바라보았다.
“왜, 술이 맛이 없소?”
아무리 원작의 흑막이라고 해도, 후작은 진짜 나쁜 놈이었다.
부하들에게 조롱하게 시켜놓고 자기는 우아하게 손님을 챙겨주는 척.
카이런은 냉담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음식도, 술도 특별한 맛을 지녔습니다. 뼈아픈 패배의 맛을.”
마치 실내에 찬 바람이 불어 지나간 것처럼, 프라일가의 가신들은 차례로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그 패배를 가장 수치스럽게 여기는 자는 카이런 자신이었다. 낯선 자들의 조롱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늘 밤 프라일가 사람들이 한 짓이란 고작 그것을 확인시키는 것뿐.
프라일가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이 조롱당한 것처럼 불쾌해진 것을 깨달았다.
그때 리오넬이 커다랗게 중얼거렸다. 중얼거림이라고는 하지만 모두 들으라는 것이었다.
“흥, 이빨 빠진 호랑이 주제에. 제 영지를 버리고 달아난 주제에 밥이 넘어가는 모양이군.”
“지금 뭐라 했소!”
체이어스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닿을 듯한 거리에 있었다.
막 테이블을 엎을 기세의 다섯 명의 하르펠령 기사들을 보며, 후작이 눈을 찌푸렸다.
그가 막 경고의 말을 하려 할 때 카이런이 사납게 말했다.
“앉아.”
“끄…….”
체이어스가 이를 악물자 프라일가의 가신들이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내게는 그 웃음에 담긴 말들이 생생히 들려왔다. 물론 카이런에게도 생생히 들렸을 것이다.
거 봐라, 네가 뭘 어쩌려고. 영지도 무엇도 없는 자들이.
후작님에게서 쫓겨나면 당장 황제에게 목이 베일 주제에.
‘더는 못해!’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화를 억누른 목소리와 겁에 질린 목소리는 뜻밖에 비슷하게 들렸다.
“어머, 무서워……. 북부의 기사님들은 너무 무서워요.”
프라일가의 가신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며 얼굴을 구겼다. 특히나 젊은 기사들은 금방 분노했다.
북부인들이 루엘라 아가씨의 기분을 상하게 했지 않는가.
나는 울상을 하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 거죠? 연회인데 우리 가신들만 잔뜩 무장한 건요. 다행이에요, 아버님.”
루엘라는 원래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실내는 찬물을 부은 듯 조용해졌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하필 내가 지적했으니.
나는 중얼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호랑이라니. 잠자코 있는 호랑이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후작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고, 가신들도 당황한 시선을 교환했다.
리오넬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제가 틀린 말 한 것 없잖습니까. 손님 대접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요!”
“나는 하르펠을 버린 적 없다.”
카이런의 냉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카이런의 주먹이 꽉 쥐어지는 것을 보고 긴장했다.
그에게 검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싸움을 벌였다가는 줄거리가 틀어질지도 몰랐다.
카이런의 싸움을 막아야 했다. 그러려면 리오넬의 주의를, 모두의 주의를 내게 끄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화내요? 흐흐흑!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호랑이 얘기는 리오넬 경이 먼저 했는데. 흐흑…….”
내가 머리를 떨구고 훌쩍이기 시작하자 사람들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후작은 화가 난 듯 짧게 말했다.
“그만해라. 루엘라.”
“아버님, 호랑이 얘기는 제가 먼저 하지 않았어요. 리오넬 경도 공작님이 무서우니까 저런 소릴 한 거잖아요. 이렇게 여럿이 있을 때 다 같이 기선 제압하려고요. 그런데 왜 저한테…….”
내 뺨을 타고 굵은 눈물 두 줄기가 주르륵 떨어지자 후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흑막 아버지도 그녀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만 자리를 파하지. 루엘라, 그치거라. 눈이 부으면 얼굴이 흉해진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네, 아버님. 정말 죄송해요.”
나는 눈물을 닦으며 후작에게 인사하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흘끔 돌아보니 카이런과 하르펠 기사들도 돌아가고 있었다.
밀라는 나를 따라오며 조잘거렸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제가 꼭 복수해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세요, 네?”
“……으응?”
지금 뭐라고 했어요? 미치셨어요?
겨우 상황을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밀라의 말에 소름이 다 끼쳤다.
“지금 다들 저자들이 꼴 보기 싫어서 죽으려고 해요, 아가씨. 아가씨 말씀 한마디면 제가…….”
“밀라.”
“예, 아가씨.”
나는 깊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말했다. 누가 제일 위험한 인물인지 알아둘 기회였기 때문이다.
“누구한테 부탁할 건데?”
“리오넬 경에게 부탁하면 틀림없이 기뻐할 거예요. 아니, 다른 기사님에게 부탁해도 리오넬 경이 화를 낼걸요?”
나는 밀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루엘라에게 어울리지 않는 대단히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투였지만, 지금은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아까 호랑이 얘기를 누가 꺼냈다고?”
“하지만 그건 그 북부 공작님이…….”
“그분을 죽이면 내가 왜 기뻐할 것 같아? 자네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야……. 아가씨께서 내일부터 식사를 안 하시면 제가 매를 맞으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밀라, 또 허튼소리 하면 내게 매를 맞을 줄 알아. 이만 돌아가.”
“헉…….”
이번에는 밀라가 울상을 하고 돌아갔다.
나는 방으로 돌아왔지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늘 카이런은 프라일가의 모욕을 잠자코 당했다. 그러니 성공한 건가.
나 때문에 프라일가의 가신들이 원래보다 더 큰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으니 실패한 건가.
나는 이불을 깨물고 눈물을 참았다. 그가 보고 싶었다.
❄❅❄
어제의 일로 울적해져 있는데 헤리어트가 찾아왔다.
나는 정말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 그로부터 정보를 얻을지 모른다는 유혹에 지고 말았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앞에 앉으며 말했다.
“어제 연회에서 울면서 나갔다며? 불쌍한 루엘라.”
나는 슬픈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슬픈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제가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말았어요. 가만히 있었어야 하는데…….”
“괜찮아. 후작님께서도 너를 걱정하셨다. 그래서 온 거야.”
“아버님을 걱정시키다니, 어쩌면 좋아.”
아휴.
원작 속 루엘라의 말투를 흉내내자니 간지러워서 손가락이 다 곱았다. 읽을 땐 예뻐 보였는데…….
하지만 나는 지금 남부의 장미다. 남주의 장미가 되기 위해서는 이 정도 난관은 이겨내야 했다.
“당분간은 참으렴. 후작님은 북부 공작을 곁에 두고 살펴보기를 원하시니 멀리서 지내게 할 수는 없구나.”
카이런을 멀리서 지내게 하다니! 절대 안 될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저는 하르펠 공작님보다는 리오넬 경의 목청이 더 무서운걸요.”
헤리어트가 킬킬대며 웃었다. 나는 신기한 듯이 물었다.
“오라버니는 여러 곳에 다녀서 아는 게 많잖아요. 정말로 북부인들은 마물을 먹나요?”
헤리어트는 다정하게 말했다.
“정말로 그러겠니. 북부도 사람 사는 곳인데.”
“하지만 다들 북부인을 싫어하는걸요?”
“루엘라,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야. 걱정은 피부에 나쁘단다.”
이 집안사람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루엘라를 미모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대하는지.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분이 정말로 그렇게 강해요?”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더구나. 대대로 마물을 토벌한 하르펠가의 피를 이어받은 자라고.”
“그러면 우리 가문 기사들보다 강해요?”
“하하,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니.”
나는 바람처럼 사뿐하게 일어나 말했다.
“궁금해요, 오라버니. 우리 구경하러 가요.”
“루엘라, 안 될 말이야!”
“흡…….”
내가 눈물을 글썽이자 헤리어트는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다독였다.
나는 울면 등짝을 맞으면서 컸는데, 루엘라 눈물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잠시만, 잠시만이다,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