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그러자 밀라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왜요, 아가씨. 선물이 마음에 안 드셔요?”
사실 가지라면 나는 붉은 유리병만 가질 것이었다. 내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랑의 묘약이라니.
게다가 아마도 이번에는 나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카이런과 사랑하게 될 터였다.
빌어먹을 이 세계가 나를 이미 원작이 시작된 후의 여주인공에게 빙의시켰으니까.
그러니 그 수상쩍은 약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나를 레오르트 후작의 딸로서 사랑하게 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그 물음이 아프게 여겨졌다.
나는 더 이상은 그를 팬심의 대상,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존재로 여길 수 없었다.
이제는 카이런 하르펠을 내가 보호 퀘스트를 맡은 게임 캐릭터처럼 여겼던 그때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 그를 사랑해버렸기 때문에. 내가 이 세계를 선택했으므로.
“아니야.”
내가 침울하게 중얼거리자 밀라가 당황해서 말했다.
“저는 아가씨께서 울지 않으시기에 마음에 들어 하시는 줄 알고 그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라버니가 아버님께 인사드리기도 전에 내게 먼저 온 건 혹시…….”
“지난번에 아가씨께서 도착하자마자 오지 않을 걸 보니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거냐고, 이틀이나 우셨잖아요. 그래서 헤리어트 님도 저렇게 몰래 먼저 오시는 거고요.”
“나가봐, 밀라. 이만 쉬어.”
“예, 아가씨.”
흔히 행간의 의미라고 한다. 나는 이 세계에 강제로 내던져짐으로써 그 행간의 장면들까지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금의 루엘라의 모습은 여러 사람의 의도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녀에게 카이런과의 사랑은 그 틀에서 벗어나는 엄청난 모험이었는지도 몰랐다.
<눈 내리는 사막>은 결국 두 주인공 모두에게 피폐물이었던 걸까.
나는 고개를 저어 떠오르는 기억들을 털어냈다.
이번에는 전처럼 오직 카이런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바꿀 용기가 없었다.
루엘라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분노로 자신을 잃어버렸을 때, 이 세계는 그녀를 버렸다.
내 선택들은 여러 사람을 구했지만 동시에 그만큼의 고통도 가져왔다.
다시 예전과 같은 과오를 반복한다면 원작의 억제력은 또다시 가혹한 힘을 행사할 것이다.
이번에는 카이런과 그 과정을 함께할 수도 없는데, 나 혼자 그런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번에는 원작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카이런을 돕는 것이 최선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지척에 두고도 이야기를 나누기는커녕 얼굴도 볼 수 없다니. 너무 가혹했다.
문득 창밖을 보니 해가 져가고 있었다.
나는 갑갑한 기분으로 별채 근처의 유리 온실로 향했다.
오색의 색유리로 장식한 온실은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작은 성당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식물들은 이런 오색의 조명이 오히려 싫을지도 모르지만, 색유리의 가격을 생각하면 프라일가의 부를 과시하는 데는 적절한 시설물이었다.
시각이 시각이라 온실 안은 많이 덥지 않았다.
대부분이 바다 건너 더 더운 나라에서 온 식물들을 구경하며, 나는 천천히 걸었다.
“…….”
문득 발소리가 들려 허리를 폈다.
익숙하고 설레는 아우라의 기운.
카이런이 거기 서 있었다.
어두운 얼굴빛. 날카로워 베일 것 같은 눈길.
가벼운 남부식 제복은 그의 단단한 가슴을 더 당당하게 보이게 했다.
루엘라는 마수를 생으로 뜯어 먹는다는 흉측한 북부인을 보고 겁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카이런.”
너무 반가운 사람.
나는 그에게 달려가려는 몸을 억지로 멈추고 침을 삼켰다.
그의 눈동자는 놀라 크게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묵례하고 돌아섰다.
나는 그가 왜 그러는지는 알았다. 프라일가의 여자와 단둘이 마주쳐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미모를 저렇게 단칼에 무시할 수 있는지…….’
나는 그의 냉정함을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 서요.”
내가 작게 말했지만, 카이런은 못 들은 척 멀어졌다.
그를 따라 달려가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꼭 참았다.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사이 카이런은 사라졌다.
“우이씨.”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을 참았다.
‘내가 빙의 다시 하나 봐라!’
❄❅❄
나는 카이런과 우연히 마주친다는 계획은 포기했다.
우연인 척 별채로 가려니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우연히 마주친 그가 나를 외면하는 모습이 나름 상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카이런과 제대로 만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느라 며칠을 끙끙댔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그날 오후, 밀라는 내 머리를 빗어주며 성질을 부렸다.
“그 북부인들 때문에 저택이 시끄러워요. 수도에서까지 사람이 오고요.”
나는 화들짝 돌아보았다.
“누구? 왜?”
“상인 복장으로 왔지만 저희가 상인 한두 번 봐요? 딱 봐도 수도 출신 귀족이던걸요? 아무튼 그자들 때문에 중부도 저희도, 이게 무슨 피해래요?”
지금 이 시기의 손님은 틀림없이 황제의 밀사였다.
“밀라?”
“예, 아가씨?”
“시나몬 남았어?”
“예, 반 정도요.”
“파이. 파이 다시 구워줘. 맛있더라.”
“예에? 살찌면 어떡하시려고…….”
내가 째려보자 밀라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나도 본관 쪽으로 몰래 나갔다.
황제의 밀사는 물론 카이런 때문에 왔다. 원작의 그 부분에서 열 받았었기 때문에 기억이 선명했다.
‘카이런 하르펠이 하냐크족에게 죽었어야 한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게 폐하가 원하시는 겁니다. 후작님도 원하셔야 하는 것이고요.’
레오르트 후작은 황제에게 카이런의 목을 바쳤을 때와 자신이 카이런을 이용했을 때의 이득을 신중히 비교하고 있었다.
그런데 밀사가 안달이 난 걸 보고 그는 판단을 마쳤다.
북부 공작을 황제에게 바치는 것보다 수중에 넣고 흔드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말이다.
황태자에게 양위하기 전에 위험요소를 모두 제거하기 원하는 황제가 카이런 하르펠을 바친다고 그를 너그럽게 넘길 것 같지 않다고 말이다.
루엘라의 기억에는 후작의 집무실에 설치된 비밀통로가 있었다. 나는 그곳을 통해 후작의 벽 너머로 들리는 대화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게 폐하가 원하시는 겁니다. 후작님도 원하셔야 하는 것이고요.”
내 기억력에 놀라야 하는지 이 상황에 놀라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침을 삼키며 후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과연 그는 예정된 대답을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무사히 돌아가셨습니까?”
“갑자기 황태자 전하는…….”
밀사가 뜨끔하는 것은 목소리만으로도 잘 전해졌다.
“하냐크족에게 중부를 침범하게 하는 비밀 협약을 맺고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테니까요.”
“후작님! 그 무슨 무엄함 말씀입니까!”
“나는 본 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하냐크 족장의 아들에게 받은, 황태자 전하의 인장이 찍힌 비밀 계약서에서 본대로요.”
낮게 그르릉거리는 것 같은 침음 다음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마침내 밀사가 입을 열었다.
“하르펠 공작을 어쩔 생각이십니까?”
“카이런 하르펠이 흑심은커녕 마물 성애자라는 건 당신도 나도 알잖소. 폐하께서 그런 자도 못 참아주시겠다면 나라고 안전하겠소?”
“후작님!”
“차라리 그 무시무시한 인사와 한 지붕 아래서 지내는 편을 택하겠소. 그럼, 무사히 돌아가시오.”
밀사가 일어나 나가는 발소리가 무겁게 멀어졌다.
나는 재빨리 비밀통로에서 나와 내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문을 쾅 닫자마자 소리쳤다.
“무슨 성애자? 미친 거 아니야?”
‘그 사람이 얼마나, 응? 불 끄기 전에 날 볼 때, 응? 아주 이글이글, 박력이……. 그러면 내가 마물이게?’
하지만 나는 금방 기운이 빠졌다. 이제부터 시작일 뿐인데.
❄❅❄
레오르트 후작은 밀사가 다녀간 후 카이런의 존재를 공식화하기로 했다.
실은 황제에게 협박하는 중인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는 카이런을 위해 환영연을 열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이 카이런 하르펠을 자기 권속으로 굴복시킨다는 의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감히! 그는 북부의 하르펠 공작이라고. 북부의 수호자 하르펠 말이야.’
나는 거울 앞에서 전투적으로 드레스를 갈아입으며 결의를 다졌다.
오늘은 원작에서도 퍽 인상 깊은 장면, 카이런이 루엘라 앞에서 가신들에게 조롱과 모욕을 당하는 날이었다.
고구마 가득한 이 장면에서, 우리 여주는 단지 이 장면의 관찰자가 됨으로써 독자를 가슴 아프게 했다.
남주 피폐물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스토리 즈음이었다.
부친이 그녀에게 부여한 역할은 ‘남부의 장미’답게 꽃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 그래서 최고의 몸값으로 시집가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녀는 부친의 일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당연히 가신들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지도 않았다.
사건의 흐름이 원작대로 흘러가게 하려면 나는 그가 프라일령에서의 첫 고난을 겪도록 내버려 두어야 했다.
카이런은 오늘 조롱과 모욕을 견뎌야 했고 나는 그런 그를 지켜보는 고통을 참아야 했다.
“제길!”
“어머, 아가씨?”
밀라가 놀라서 나를 돌아보아서 나는 이를 악물고 어색하게 웃었다.
“나 너무 예쁘지 않아? 욕이 나올 정도로.”
그건 사실이긴 했다.
이 세계의 유일한 여주인공이자 아우라의 주인. 루엘라는 정말 아름다웠다.
“어머, 생전 안 하시던 거친 말씀을……. 하지만 아가씨의 미모는 최고죠. 언제나요. 호호호.”
두 톤쯤 높은 밀라의 가식적인 웃음이 거슬렸지만 지금 거기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나는 기왕이면 카이런이 오늘부터 내게 반해주기를 바라며 씩씩하게 연회장으로 갔다.
큰 홀에는 테이블들이 디귿자로 배치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레오르트 후작과 지위가 높은 가신들이, 좌우에는 나머지가 앉았다.
나는 물론 중간 테이블의 후작 옆자리였다. 내 남자의 고통을 바라보는 VIP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