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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화 (121/128)

외전 2화

밀라는 초췌한 얼굴로 시나몬을 내밀었다. 품질은 확실한 것이었다.

“이걸 구하느라 정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아가씨.”

나는 도무지 밀라가 기껍지 않았다. 나는 눈을 휘어 접어 웃으며 말했다.

“나도 기다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밀라.”

“아……. 예. 죄송해요. 그런데 아가씨, 이걸 어디 쓰시게요?”

“파이가 먹고 싶어, 밀라.”

밀라는 자신이 시나몬 파이를 망쳤다고 생각하고 울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나몬 특유의 향에 익숙하지 않아서 오해했을 뿐, 파이의 맛은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런 게 왜 먹고 싶어지셨어요?”

밀라의 물음에 나는 당황하여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슬만 먹고 화장실도 안 가게 생긴 외모의 그녀와 시나몬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북부인들을 보니까 갑자기 궁금해졌어. 북부에서 나는 차 재료는 어떤 맛인지. 그들은 이걸 좋아한다며?”

“그래요? 저는 처음 듣는 얘긴데요?”

“내가 거짓말을 할 리도 없는데…….”

원작의 루엘라는 귀한 영애답게 에둘러 말하는 화법을 썼다.

나는 서럽고 억울한 눈을 하고 밀라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밀라는 얼른 웃으며 말했다.

“설마요, 아가씨! 어머, 내 정신 좀 봐. 맞아요, 이제 생각이 났어요. 시나몬이요!”

밀라는 웃음으로 민망함을 감추며 돌아갔다.

나는 한밤중이 될 때까지 파이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그리고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카이런 일행이 묵는 별채로 숨어들었다.

나는 별채 문 앞에 시나몬 파이를 놓아두고 정원수 사이에 숨었다.

이 맛이 그를 조금이라도 위안하기를 바라며.

주요 사건은 이미 일어난 후였다.

하냐크족은 이미 침략했고, 북부는 황태자에게 빼앗겼고, 게오르그도…….

이런 때 카이런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고작 파이를 준비하는 것뿐이라니.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고작이라니.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다음에 빙의하면 황제나 황후가 되어서 아주 그냥…….

그러나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랬다간 카이런과 이어질 수가 없잖아!

나는 아직 갑작스러운 빙의의 충격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정원수 사이에 숨은 우스꽝스러운 꼴로 천천히 심호흡을 해보았다.

두 번째니까, 잘할 수 있겠지.

카이런을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하지?

그때 문이 열리며 체이어스가 나왔다. 나는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리고는 관목 틈으로 그를 살폈다.

체이어스는 문 앞의 파이 그릇을 발견하고는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쭉 펴서 파이를 꾹 찔렀다.

‘하! 체이어스 경!’

그는 파이에 구멍을 몇 개 더 만들더니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정원수 뒤에 내다 버렸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공작님이 좋아하는 것 몰라요? 남부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거라고 했는데!’

나는 체이어스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가 떠올라 금방 침울해졌다.

독살당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파이라니.

“하아…….”

나는 한숨을 쉬며 방으로 돌아왔다.

끙끙거리며 침대에 누워서, 나는 입을 꼭 다물고 두 다리를 바동거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나는 새벽까지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

나는 다음 날 가볍게 차려입고 산책을 나갔다. 물론 우연인 척 카이런과 마주치기 위해서였다.

원작 초반에 루엘라와 카이런은 몇 번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기회를 철저히 활용해야 했다.

“아가씨, 어딜 가십니까?”

그런데 집채만 한 몸집의 기사가 불쑥 나타났다. 빙글빙글 웃으며 내 앞으로 바짝 다가서는 태도가 몹시 불쾌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큰 프라일가의 기사. 원작 초반의 악당. 리오넬.

“산책 중인데, 문제라도 있나요, 리오넬 경?”

“아가씨께서 산책을요? 얼굴이 그을리시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도저히 못 믿겠다는 그의 얼굴을 보니 아차 싶었다.

빌어먹을 레오르트 프라일은 딸을 최고의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햇빛 한 점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북부에 왔을 때 북부 여자들이 찬양하던 장면이 생각났다. 남부에서 온 그녀의 얼굴이 눈보다 더 하얗고 잡티 하나 없다고 말이다.

나는 얼른 말투를 고쳐서 연약하게 말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요, 리오넬 경.”

“으하하, 아가씨는 언제 보아도 작고 연약한 아기 새 같으십니다.”

우웩.

나는 새초롬하게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는 경은, 산책 중이신가요?”

그는 내게 커다란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북부인들이 허튼짓은 하지 않나 감시 나왔습니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아버님께서 북부의 공작님을 초대했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손님이 아닌가요?”

그러자 리오넬이 콧방귀를 뀌었다.

“손님은 무슨, 포로지요. 어쨌든 아가씨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산책은 저어기로…….”

그는 바로 고개를 저으며 결연하게 말했다.

“아니, 제가 따르며 보호해드리겠습니다. 북부 놈들이 저택 안에 있으니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 없군요.”

리오넬은 카이런 일행보다는 내게 눈도장을 찍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알고 싶어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어머. 그 공작님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가요?”

“반역자나 다름없지요. 폐하께서 그가 가진 걸 다 몰수하실 거예요.”

반역은, 꿈에나!

거구의 리오넬이 별채와 반대 방향으로 서자 해를 다 가렸다. 그는 내 앞에 ‘나를 따르라’ 하는 자세로 가슴을 내밀고 섰다.

저러면 여자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아아, 오늘 햇살이 몹시 따갑네요. 산책은 충분한 것 같아요. 그럼 이만.”

나는 어금니를 꽉 문 채였지만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말하고 종종걸음으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여주의 등장신이 대개 발코니 위에서 내려다보기, 마차 창으로 내다보기 같은 것이었던 건 고귀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려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나는 산책도 마음대로 나갈 수가 없는 몸이었다.

어제처럼 별채 조경수 사이에 숨는 것도 언젠가는 들킬 텐데…….

특히 체이어스에게 들키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루엘라를 싫어했다.

하르펠 성에 처음 떨어졌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남부에서는 손발이 다 묶인 기분이 들었다.

“하아…….”

그때 밀라가 들어왔다.

“아가씨, 헤리어트 님이 오셨어요.”

헤리어트라니.

잠깐 반가운 생각이 들었지만 안 될 말이었다. 그라면 내가 진짜 루엘라가 아니라는 걸 금방 눈치챌지도 몰랐다.

“지금은 만나기 싫다고 전해줘.”

나는 얼른 대답했지만, 헤리어트는 쾌활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루엘라! 단단히 삐쳤구나, 그렇지?”

“아가씨께서는 요 며칠 심기가 좋지 못하셨어요, 헤리어트 님. 헤리어트 님이라면 풀어드릴 방법이 있으실 줄 알아요.”

“하하. 당연하지, 밀라! 내가 누군데. 루엘라가 가장 사랑하는 오라버니인걸. 그렇지, 루엘라?”

밀라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거들었고, 그는 밀라를 향해 크게 말했다.

“루엘라가 말은 그렇게 해도 나를 몹시 기다렸을 거야.”

“호호호, 그럼요. 헤리어트 님.”

내가 알던 헤리어트는 그럭저럭 상식적이고 점잖은 사람이었는데, 루엘라 앞에서는 이런 푼수짓을 할 줄이야.

그는 내 뒤에서 양어깨를 덥석 붙잡더니 말했다.

“크라벨사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내가 무슨 선물을 사 왔는지 궁금하지?”

크라벨사는 바다 건너 왕국이었다. 마법이 발달해 진귀한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무역처였다.

그곳 물건은 원래 귀한데 더해 최근 더 귀해졌는데, 이유는 황명으로 교역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헤리어트는 밀수품으로 내 환심을 사려 하고 있었다.

아, 머리 아파.

내가 신경질적으로 흘겨보자 헤리어트의 얼굴이 움찔 경련했다. 그는 더 다정한 표정을 짓더니 내 앞으로 돌아와서 앉았다.

밀라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가씨, 헤리어트 님이 크라벨사에서 선물을 가져오셨대요. 아가씨는 헤리어트 님 선물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시잖아요, 안 그래요?”

이 두 사람, 왜 이렇게 필사적인지.

내가 귀하게 자라질 못해서 그런지 나는 마음이 점점 불편해져 갔다.

일단 이들을 먼저 내보내고 싶었다.

“선물이 뭔데요?”

헤리어트는 얼른 작은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마법의 묘약이다.”

‘지금 장난해?’

내가 그를 흘끔 흘겨보았지만, 그는 활짝 웃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사랑의 묘약 말이야. 크라벨사의 마법사들이 직접 만든 거다.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물건이야.”

어디서 사기를…….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가를 꾹 억누르며 웃었다.

“왜 이걸 저에게 주는 거예요, 오라버니?”

헤리어트는 밀라의 눈치를 흘끔 보고 대답했다.

“네가 그랬잖아. 세상 누구도 가지지 못한 걸 가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와. 이거야말로 여주인공다운 대사가 아닌가.

나도 이런 대사를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헤리어트가 몹시 진지하게 말했다.

“이건 황녀 전하께서 크라벨사에 비밀리에 특별히 주문한 묘약이야. 그런데 이제 아무데도 팔 수 없게 되었으니 그들도 곤란해하더구나.”

오다 주웠다, 이게 그건가?

내 시큰둥한 기색을 눈치챈 헤리어트가 나를 달래듯 말했다.

“너는 황녀 전하도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거야.”

밀라가 호들갑을 떨며 끼어들었다.

“어머나 세상에! 아가씨, 이건 절대 아무에게도 자랑하시면 안 돼요. 황녀 전하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아가씨를 얼마나 질투하시겠어요?”

나는 이제야 요점을 이해했다.

내가 그런가? 하듯이 배시시 웃자 헤리어트와 밀라의 긴장이 확 풀리는 게 보였다.

나는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든 작고 붉은 유리병을 살펴보고 나서 말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먼 길에서 오셨는데 쉬셔야하겠지요……?”

내가 부드럽게 축객령을 내리자 헤리어트는 멋쩍게 말했다.

“이제 후작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해. 쉬려무나, 루엘라.”

헤리어트가 나가자 나는 상자를 닫아 탁자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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