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화 (120/128)

외전 1화

눈을 뜨니 오색 빛줄기가 반짝여 눈이 부셨다.

벽면 선반 위 색색의 유리 공예품들이 아침 햇살에 색을 묻혀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어머…….”

나는 멍한 상태로 손을 내밀어 내 팔에 뿌려지는 무지갯빛 아름다운 점들을 살펴보았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중년 여자가 들어와 하늘거리는 얇은 커튼을 쳐주었다.

그녀가 돌아섰을 때 나는 헉 하고 얼어붙고 말았다.

‘밀라?’

그녀는 루엘라의 하녀 밀라였다. 나를 그렇게 매질했던…….

그제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부 특선품 색유리, 밀라, 그리고 따뜻한 공기…….

‘여기는 설마, 남부?’

내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는 동안 밀라가 옷을 꺼내와 내 앞에 놓았다. 하늘거리는 레이스가 아낌없이 들어간 화사한 드레스였다.

나는 그 옷을 천천히 집어 올렸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고운지.

“기사들이 오후에 돌아올 거래요. 구경 가실 거죠, 아가씨?”

나는 조금 얼어붙었다.

‘나더러 아가씨? 아주머니 왜 이러세요?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요.’

그녀는 섬뜩하게도 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루엘라 아가씨?”

내가 화들짝 놀라자 밀라가 눈썹을 찌푸렸다.

“……!”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새하얗고 가녀린 부드러운 손은 분명히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 또 빙의한 거야? 그것도 루엘라 프라일로?’

눈앞이 핑 돌고 숨이 막혀왔다.

어젯밤 나는 분명히 그와 황홀한…….

“으으……. 으으으!”

내가 이를 악물고 엎드려 침대를 쾅쾅 때리자 밀라가 놀라서 말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화가 나셨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가씨!”

밀라의 겁에 질린 목소리에 나는 문득 주먹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세계를 다시 한번 저주했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길래 또 빙의시키냐고!’

신인지, 오로라인지, 그 거대한 존재는 내가 편안하거나 행복한 꼴을 보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게 분명했다.

내가 이를 악문 채 머리를 들자 밀라가 무릎을 꿇었다.

자기가 뭘 잘못했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밀라는 나를 겁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가씨, 화 푸셔요. 전에 아껴두셨던 새 드레스 꺼내 올까요? 아니면 초콜렛을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니, 내가 애야?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빙의 2회차였고, 남의 몸으로 살아가는 일에 약간의 경험이 있었다.

나는 루엘라처럼 보이기 위해 조금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나쁜 꿈을 꿨어.”

“나쁜 꿈이요? 아휴, 화가 나신 줄 알고 얼마나 놀랐게요.”

이유도 없이 화를 내는데도 밀라같이 드센 여자가 이렇게 떨다니, 집에서 루엘라의 위상은 엄청난 모양이었다.

나는 원작 속 루엘라를 떠올리며 새침하게 말해보았다.

“말하고 싶지 않아.”

그러자 밀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분명 개꿈일 거예요, 아가씨. 아무 걱정 마세요.”

“그래서 누가 온다고?”

내가 화제를 돌리자, 밀라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기사들이 북부인들을 끌고 올 거래요. 아휴, 주인님은 그런 자를 어쩌실 생각이신지.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그자들은…… 북부인이잖아요?”

‘북부인이 뭐? 북부인이 당신 돈 떼먹었어요?’

나는 울컥 화를 낼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내 머리는 천천히 돌아갔다.

‘북부인……? 카이런?’

나는 방금 빙의했는데, 초반부의 큰 사건은 이미 터진 후였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밀라.”

“예, 아가씨.”

“아침은 방 안에서 먹고 싶어. 준비해줄래?”

그러자 밀라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분명 개꿈일 거예요, 아가씨.”

“밀라!”

“예, 아가씨!”

밀라가 후다닥 나간 다음 나는 색유리 장식이 비싸 보이는 거울 앞으로 갔다.

“와.”

이 찬란한 금발의 가녀린 미인은 청초한 남부의 장미 루엘라가 맞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그 사실을 즐길 수는 없었다.

나는 내 영혼을 대여품처럼 아무 데나 내돌리는 존재를 향해 어금니를 꽉 물고 중얼거렸다.

“잡히면 가만 안 둬.”

나는 <눈 내리는 사막> 원작 초반부에 있었다.

지금 카이런은 하냐크족과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황제의 병사에게 쫓기다 레오르트 프라일 후작의 도움으로 이리 도망쳐오는 길이었다.

말이 도움이지 사실상 후작의 덫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거울 속의 내 꼭 쥔 주먹은 하얗게 되어 있었다.

‘지금 카이런은 얼마나 참담한 심경일까…….’

자존심 강한 그가 조상 대대로 지켜온 북부를 잃고 제국의 반대편까지 도망쳐오는 심정을 내가 어떻게 안다고 하겠는가.

원작에서는 그가 남부에서의 억류 생활 동안 얼마나 큰 괴로움을 느끼는지 스치듯이만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주의 처지에 이입해 눈에 불을 켜고 읽은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따금 등장하는 ‘그는 숨을 돌리며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같은 서술이 무엇을 말하는지 말이다.

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옷을 입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카이런이 오면 잘해줘야지. 꼭 안아주고 위로해줘야지.

그러나 나는 결국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지금 루엘라다. 지금의 카이런에게 나는 경멸스러운 레오르트 후작의 딸이었다.

“으으으!”

나는 공중을 향해 목소리를 잔뜩 억눌러 작게 소리쳤다.

“또! 나더러 또 처음부터 그 까칠한 공작님 비위를 맞추라고?”

원작에서 두 사람은 소설 중반까지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는 그녀에게 좀처럼 경계를 내려놓지 못했고, 그녀는 그의 진심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걸 떠올리니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이 세계에 내가 아는 사람은,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카이런이겠지……?’

북부에서 지낸 시간 동안, 나는 난관 앞에 주저앉지 않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남부에서라고 침울해할 수만은 없었다.

‘여기서도 내가 할 일이 있을 거야.’

결심하고 나자 힘이 조금 솟는 것 같았다.

그때 밀라가 아침을 가져왔다. 나는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는 식사를 하며 원작의 내용을 곱씹었다.

이제부터 카이런 공작은 프라일가에 억류되어 갖은 수모를 당하며 힘든 일에 동원된다.

루엘라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멀리서 마주치기만 한다. 지금 그녀에게 카이런은 집안의 불청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 나도 일단은 루엘라처럼 최대한 소극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당장 달려가서 카이런을 껴안아주고 입 맞추고 싶은 마음을 모두 억눌러야 했다.

가슴이 갑갑해 미칠 것 같은 마음도 참아야 했다.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

나는 저택의 발코니에서 기사들의 무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정문에서 들어오는 행렬을 잘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였다.

이 무지막지한 미인은 예쁘게 보이기 위해 노력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혹시라도 카이런과 눈이 마주쳐도 거리낄 것은 없었다.

밀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난간 가까이 가지 마셔요.”

‘카이런 보는 걸 방해하지 말아요!’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다가 발코니 밑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 여러 개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마당에 선 프라일가의 가병들이 나를 어찌나 이글이글 쳐다보는지 겁이 날 정도였다.

미인의 삶도 쉬운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밀라는 발코니 조금 뒤쪽으로 의자를 놓아주며 나를 다독였다.

“예쁜 건 고통스러운 거라고 늘 말씀하셨으면서 그래요.”

“그래. 그렇지…….”

나는 밀라의 태도로 루엘라가 그 말을 진심으로 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 고통은 주관적인 거니까. 나도 방금만 해도 무서웠는데…….

“어머, 저기 오네요!”

말 탄 무리가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카이런이 오고 있어!’

나는 저도 모르게 발코니로 다가섰다.

프라일가의 문장을 새긴 기사들의 행렬 가운데 초라한 몰골을 한 여섯 명의 북부인들이 있었다.

“…….”

군대가 떠나서 여섯이 남다니…….

나는 이제는 볼 수 없을 많은 얼굴들이 떠올라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러자 놀란 밀라가 내 팔을 잡아당겨 의자에 앉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

“많이 놀라셨어요? 놀라실 만하죠. 마물을 생으로 뜯어 먹는다는 북부인들인데! 저 봐, 저 봐, 생긴 것도 얼마나 흉…….”

흉칙하다고 말하려던 밀라는 카이런 공작의 얼굴을 보고 말을 더듬었다.

그녀도 눈과 약간의 양심은 있었으니까.

카이런은 몹시 초췌한 얼굴이었다.

이 온난한 남부의 햇살 아래에서, 말에 올라 앞만 보고 걸어가는 그의 얼굴은 창백해 보일 정도였다.

아마도 분노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는 또한 여전히 빛이 나듯 아름다웠다. 지독한 부조화였다.

나는 가슴이 저미는 듯했지만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으로 안도해야 했다.

밀라는 멈추지 않았다.

“저 시커먼 무장 좀 보세요, 얼마나 소름 끼쳐요?”

카이런이, 아니면 체이어스가 마물을 생으로 뜯어 먹는 것 봤어? 봤냐고!

“…….”

내가 싸늘하게 돌아서자 밀라는 얼른 나를 따라왔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나는 최대한 얼굴을 평온하게 만들고 밀라를 향해 웃었다.

그러자 밀라도 배시시 웃었다. 원래 웃어도 밝아 보이지 않는 인상이었지만.

“밀라?”

“예, 아가씨.”

“심부름 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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