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나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러면 세상은 단단하고 안정된 곳이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것은 행복과 퍽 비슷한 감각이었다.
원작의 억지력 같은 것은 카이런 하르펠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런 믿음까지 돋아나곤 했다.
노크와 함께 필레 경의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프라일 양이 내일 떠나기 전에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합니다.
카이런 공작은 살짝 찌푸리더니 바로 거절하려고 했다.
나는 얼른 말했다.
“허락하세요, 공작님. 이제 마지막이에요.”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들여라.”
잠시 후 나타난 루엘라는 굳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카이런 공작에게 가진 감정은 너무 강렬해서, 그의 앞에서는 완벽한 웃음이라는 가면을 쓸 수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처럼 완벽한 동작으로 그에게 예를 올렸다.
“카이런 공작님. 하르펠 성에서의 좋은 기억은 돌아가서도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좋은 기억이 있었다면 말입니다.”
카이런 공작이 냉소적으로 대꾸해서, 나는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슬쩍 찌르며 앞으로 나와서 섰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가슴에 못질을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루엘라 양, 공작님과 둘이 나눌 말씀이 있다면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설마.”
카이런 공작은 어림도 없다는 듯 선을 그었다. 그러나 나는 루엘라가 반색하는 걸 보고 밖으로 나갔다.
“고마워. 아리엘사.”
나는 그녀의 곁을 지나며, 어쩐지 그녀가 나를 ‘시녀’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동시에, 루엘라가 치마 속에서 꺼낸 단검을 쳐들고 덤벼드는 모습은 몹시 느리게 일어나는 일처럼 보였다.
“……!”
방 안에는 두 개의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하나는 카이런 공작에게 밀쳐지며 균형을 잃은 내 비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카이런 공작에게 단검을 빼앗기며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루엘라의 것이었다.
카이런 공작은 내가 넘어지기 전에 허리를 안아서 세워주었다. 그는 내게 상처가 없는지 살펴본 후 소파에 던지듯 놓아주었다.
“이렇다고 했잖나!”
이럴 때까지 신경질인지!
그러나 금방 내 몸을 스친 루엘라의 단검을 떠올리며, 나는 변명도 못 하고 숨을 골라야 했다. 오랜만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제 집무실 안을 채운 것은 루엘라의 거친 호흡뿐이었다.
그녀는 카펫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듯 말했다.
“왜, 당신은 왜 모든 걸 망쳐놓는 거죠? 저 계집앤 죽어야 해요! 감히 밑바닥 시녀가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고 있어!”
그러나 카이런 공작이 루엘라를 보는 시선에는 한 점의 동정도 없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루엘라가 마치 고양이나 정물이라도 되는 듯 지그시 내려다보며, 나를 향해 말했다.
“아리엘사, 네가 말한 그 이야기는 추악한 질투와 탐욕의 이야기인가?”
내 눈앞에서 떨고 있는 여자는 아름답고도 추악했다. 적어도 내가 알던 여리고 사랑스러운 주인공은 아니었다.
몸에 저 은은한 빛의 아우라를 휘감고서, 질투에 못 이겨 살인을 저지르려 하다니.
내가 없어진다고 그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먹먹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모든 고난을 뛰어넘는 진정한 사랑 이야기였어요. ……적어도 그랬어요.”
루엘라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들을 떠드는 거야! 사랑?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내가 어떻게 사랑해줄 수가 있어! 나는 너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죽는 그 순간까지 저주할 거야!”
카이런 공작은 나를 노려보며 고함쳤다.
“아리엘사!”
그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감히……! 돌려보내지 않겠다.”
나는 그가 갑자기 왜 화를 내는지 혼란스러워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따라 붉게 물든 내 팔을 바라보았다.
옷은 어깨가 조금 찢어졌을 뿐이었지만, 핏방울이 팔꿈치를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손에 내 피를 묻힌 것이다.
그것을 본 루엘라는 개운하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아아, 아주 조금은 덜 억울하겠어.”
카이런 공작은 자기 옷단을 찢어 내 팔을 감아주며 나직이 뇌까렸다.
“저런 여자가 주인공일 리가. 사랑이야기라면 그녀는 자격이 없어.”
“공작님!”
그가 루엘라의 멱살을 쥘 듯 다가가기에, 나는 놀라서 그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으아아!”
그러나 나는 겁을 먹고 주저앉았다. 지진으로 집무실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리엘사!”
집기가 진동하는 가운데, 카이런 공작은 소파 위에서 덮치듯 내 몸과 머리를 감싸주었다.
루엘라는 바닥에 제 머리를 감싸고 엎드린 채 비명을 질러댔다.
잠시 후 지진이 그쳤지만, 어쩐지 그녀는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
나는 카이런 공작이 나를 경악하여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 당황해서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었다.
“공작…….”
하지만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잠시 비틀거렸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그를 붙잡은 내 팔이 은은한 광채로 물든 것을 보았다. 피부에서 스며 나오는 광채였다.
그는 그것 때문에 놀란 것이 분명했다.
“아리엘사…….”
나는 잘못 보았다고 확신했다. 그 광채는 카이런 공작의 아우라가 틀림없었다.
얼른 창밖을 쳐다보았지만 오로라는 없었다. 나는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하려 애쓰며 그를 불렀다.
“공작님…….”
“아악! 아아악!”
루엘라가 다시 지진이 나는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지진에 물건이 떨어지거나 한 것도 아니어서, 이제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지금 그녀에게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여자 주인공의 아우라, 루엘라의 은은한 광채가 사라졌다.
손톱으로 카펫을 긁으며 머리를 휘젓는 루엘라는 단지 미인형에 약삭빠른, 눈이 매서운 여자로만 보였다.
그녀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매력이나 매혹은 바람에 날아간 것처럼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감정에 빠져 무슨 일이든 저지르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여자일 뿐이었다.
아우라가 사라질 수도 있다니…….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필레 경이 문을 열고 달려 들어왔다. 그는 정신을 놓은 듯이 울부짖는 루엘라를 보더니 인상을 쓰며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나는 얼른 소리쳤다.
“필레 경, 그녀를 내일 아침 날이 밝자마자 남부로 보내주세요!”
카이런 공작은 분명히 루엘라를 가만히 두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내 말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단지 의사를 불러오라고만 덧붙였다.
필레 경이 나가자 방 안에는 우리 둘이 남았다.
“그것은, 뭐였지?”
내게 묻는 카이런 공작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는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해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도 충격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카……. 카이런…….”
카이런 공작의 아우라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아름답고 매력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웠다.
그의 마성은 여전했음에도, 그 형형한 빛은 보이지 않았다.
“…….”
나는 대답도 뱉지 못하면서 입술을 열고 있었다.
우리는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며 지진 후에 따라오는 여진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사방은 고요했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자연적인 지진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한번 겪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거대한 경고, 혹은 신호였다.
그도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몹시 혼란스러운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보았어. 네 몸이 빛에 휩싸여 있는걸. 몹시 아름다운, 빨려들 것 같은…….”
카이런 공작은 마치 나를 처음 보는 이처럼, 완전히 생경한 무엇에 매료된 사람처럼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것은 아름다웠어, 아리엘사. 아니, 너는 아름다워.”
나는 말없이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응답하듯 나를 꽉 안아주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천천히 깨달았다. 그는 분명 내게서 아우라를 보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루엘라는 잃고 만 아우라가 내게…….
그의 가슴에 뺨을 비비며, 나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루엘라는 그간의 행적 끝에 살인까지 시도하면서 주인공의 미덕을 잃고 말았다. 이 세계는 이제 그녀를 주인공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우라는 내게로 옮겨왔다.
이 세계가 나를 여자 주인공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카이런 공작의 품 안에 있는데도, 나는 몸에 도는 한기를 느꼈다.
사막에서 만났던 노인의 중얼거림이 떠올랐다.
“어허, 네가 왜 여기……. 많은 것이 달라졌군…….”
그 다음 깨달음에, 나는 심장이 떨려 그의 가슴에 이마를 꼭 갖다 대었다.
“아리엘사?”
나는 머리를 마구 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좋아서 그래요. 감격해서…….”
나는 이제 이 세계에 완전히 속한 사람이었다. 내 눈에 그와 내 아우라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눈 내리는 사막>은 이제 나의 세계였다.
그와 내가 사랑하며 살아갈 세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