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내 여자.
언제 들어도 낯설게 들리는 말이었다. 괜스레 심장이 뛰는 그런 기분 말이다.
나는 벽난로를 바라보며 조곤조곤 말했다.
“저 행복해요, 공작님.”
그러자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호흡도 더 깊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위층에 몹시 불행한 사람이 있어서 신경이 쓰인다고요.”
그는 조금 삐진 듯 대답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아리엘사.”
그는 자기가 감싼 내 어깨를 한번 꾹 조이고는 한숨을 쉬었다. 시선은 벽난로의 불길을 응시한 채로, 그는 말했다.
“이런 순간이 올 것은, 나는 실은 확신하지 못했어.”
“공작님…….”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고, 체력이 회복되면서 내 기억도 돌아왔다.
설산 상공에 커튼처럼 너울대던 오로라, 지축이 울리는 듯한 진동…….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그였다.
나는 그가 마석을 동원해 마법으로 내 시신을 보존한 채 하르펠로 달려왔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사막에 신비한 꽃이 한 송이 핀다는 것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그리고 그의 무릎 위에 손가락 끝으로 그림을 그리며 말했다.
“저도요. 이렇게 공작님의 무릎을 만져도 될 거로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제 도망가면 절대 용서 안 해. 절대로, 아리엘사.”
그의 약간 떨리는 음성이 너무나 진심이어서 나는 그의 무릎을 꾹 눌렀다.
“자꾸 겁주지 말라고요.”
“아리엘사. 그냥 진심을 말하는 거야. 내가 위협하는 걸 본 적이 없나 보군.”
그는 잠시 후에 말했다.
“보고 싶다면-”
“-아뇨! 괜찮아요. 정말로요.”
그리고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도 낮게 웃었다.
그는 내 머리가 마치 고양이라도 되는 양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를 떠나지 마, 아리엘사. 그러면 안 돼.”
그의 목소리는 두려워하는 듯했다. 나는 내 머리에 얹힌 그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저는 겁이 나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나는 준비가 되어 있어, 아리엘사. 성의 잔해에서 너를 파냈을 때…….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그때 내 미래는 사라져버렸어.”
그는 잠시 심호흡한 다음 말했다.
“나는 그런 두려움은 처음 느꼈다. 아리엘사, 나는 북쪽의 주인으로서 마물과 싸울 수 없는 나를 용서하지 못해. 그리고 이제는 한 남자로서 너를 지키지 못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어.”
“공작님…….”
“네가 모르는, 우리 둘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자.”
새로운 이야기.
심장이 죄이는 듯한 감각에 나는 눈을 꼭 감아야 했다.
그래도 되는 걸까? 그와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도 되는 걸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대답해.”
“……네. 공작님.”
내 대답을 들은 그가 허리를 숙여 내게 입술을 겹쳐왔다. 나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껴안듯이.
❄❅❄
일단 먹기 시작한 음식을 다시 못 먹겠다고는 할 수는 없었는지, 루엘라는 하루에 네 끼를 먹어가며 금방 체력을 회복했다.
이미 그녀의 엄청난 옷가지와 집기들은 십여 대의 마차에 나누어 남부로 떠난 후였고 남은 것은 그녀뿐이었다.
정말로 이대로 일단락이 되는 걸까, 나는 근심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기로 정해진 전날, 루엘라가 나를 온실에서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카이런 공작은 일축했지만, 나는 자기가 좋아하던 온실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공작님, 마지막으로 욕 한 바가지 들어주면 제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요. 저 좋자고 그런다고요.”
“미치겠……. 휴. 됐어. 맘대로 해.”
“감사해요, 공작님!”
내가 그의 가슴팍으로 와락 달려들자 그는 얼굴을 조금 붉히며 먼 산을 보았다.
“누가 보면 맛난 거라도 먹여준 줄 알겠군.”
“먹여주시면 되죠. 아아.”
내가 눈앞에 음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리자 카이런 공작이 얄밉다는 듯 내 입술을 꼬집듯이 닫았다.
그리고 내 입술을 가볍게 꼬집은 채로 그 위에 자기 입술을 꾹 포개고는 내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이 참!”
나는 그의 등을 팡팡 때려서 떼어놓고 흘겨보았다.
“나도 간다. 루엘라를 얕보지 마, 아리엘사.”
“제발요! 절 그렇게 못 믿으세요?”
“쯧.”
잠시 불만스럽게 나를 보던 카이런 공작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나를 놓아주었다.
“루엘라가 남부에서 무슨 과일을 잔뜩 실어 놓았다더군. 다 먹지도 못할 만큼의 양이라 썩기 직전이라고 했어. 주방장이 저녁에 그걸로 뭘 만들어주겠대.”
남부 과일이라니! 원작에서 카이런 공작이 남부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든다고 했던 것이었다.
단단한 껍질 속에 달고, 새콤한 물이 가득한 과일이 와 있었다니 너무 반가웠다.
내가 눈에 별을 띄우자 카이런 공작이 내 코끝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니 루엘라에게 진 빼지 마. 과일 먹는 데 지장 없도록 말이야.”
“네, 그럼요!”
❄❅❄
나는 외투를 걸치고 필레 경의 호위를 받아 온실로 갔다. 그가 온실 문 앞을 지키는 동안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처음 보는 꽃모종이 가득했던 온실은 황폐해져 있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남부의 꽃들은 대부분 말라 죽고, 예전 온실에서 자라던 식물들만 몇이 남아 있었다. 그사이 루엘라가 온실을 돌보지 않은 탓이었다.
그 살풍경한 배경 앞에, 루엘라는 완벽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한껏 경멸하는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은은한 아우라를 발하는 여자의 완벽한 얼굴이 웃으며 분노한 표정을 띤 부조화는 보기 조금 무서웠다. 그리고 불편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인사했다.
“프라일 양.”
“시녀.”
시녀라니. 나는 얕게 한숨을 쉬며 정원 한가운데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자 루엘라도 내 맞은편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달라졌네, 시녀.”
“그럴 거예요.”
“어째서?”
나는 그녀를 속이지 않기로 했다. 나를 속이지 않기로 한 이상 누구도 속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는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사랑에 빠졌거든요.”
나는 그녀가 상처받는 얼굴을 하거나 화를 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루엘라는 뜻밖에도 웃음을 터트렸다.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웃는 모습은 아름답고도 우아했다.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되어서 미안해요. 프라일 양.”
나는 짧게 말했고, 그녀는 웃음을 그치고 나를 빤히 노려보았다.
입매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눈은 저주를 말하고 있었다.
“미안……? 이게 사과로 될 일이라고 생각해? 이제 내가 결혼하기 얼마나 힘들어진 줄 알아?”
“…….”
“나는 남부의 장미라 불렸어. 거기에 내 아버님의 강력한 후원까지 얻을 수 있었는데, 공작님은 대체 왜…….”
루엘라는 혼란스럽다는 듯 머리를 저었다.
“카이런 공작님 같은 완벽한 분이 이렇게 판단력이 모자란다는 게……. 아니, 반짝이는 보석과 길가를 구르는 돌멩이를 구분하지도 못한다는 게 슬플 뿐이야.”
그리고 그녀는 나를 쏘아보며 표정을 고쳤다.
“너 혹시 그분의 차에 뭘 탔니? 매혹하는 뿌리, 판단력을 해치는 돌가루, 아니면 유혹의 안개…….”
“아니에요. 프라일 양. 제 허브는 모두 진짜였어요. 질 좋은 차를 만드는 재료죠.”
“흥.”
루엘라는 도무지 너와는 말을 섞지 못하겠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북부인들은 공작님을 ‘위대한 그분’이라고 부르더라.”
“네. 그분은 위대하세요.”
그의 마물 사냥과 마법을 직접 본 나로서는 그러한 북부인들의 경외감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루엘라에게는 끝까지 불가해할 것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 안심하지 마. 그런 분이 너같이 근본 없는 계집에게 얼마나 오래 흥미를 가지시겠어? 오히려 나를 눈앞에 두니 더 평범하고 초라한 것이 눈에 띄셨던 거야. 내가 없으면 너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시녀로 돌아가고 말 거야. 푸후훗…….”
나는 그녀의 불안한 웃음을 보며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제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라일 양, 돌아가시는 길이 평안하시길 바라요. 인사를 나누려고 왔습니다.”
루엘라는 여유롭게 일어났다.
“이 온실도 마지막이네.”
그녀는 아끼던 온실을 잠시 둘러보더니 아직 싱싱한 약용 식물 앞으로 갔다. 그녀 근처에서는 그곳만 식물이 살아 있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가세요. 루엘라 프라일 양.”
나는 그때 몰랐다. 밀라가 그 식물 화분 속에 단검을 숨겨두었고, 루엘라가 내 눈을 피해 그것을 회수했다는 것을.
그 만남은 나를 마지막으로 모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검을 회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카이런 공작과 오랜만에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의 집무가 겨우 끝난 늦은 시각이었다.
하녀들은 루엘라의 하녀들이 치워버린 내 차 끓이는 도구를 찾아내기 위해 온 성을 다 뒤졌다고 했다.
익숙한 차 화로로 물을 끓이고, 내가 길러 수확한 시나몬 가루로 시나몬 차를 두 잔 탔다.
하르펠 성에는 겨울의 밤과 고요가 다시 찾아왔고, 멀리 내가 감금되었던 성탑 벽에 밝혀진 횃불이 보였다.
내 어깨를 두른 채 창밖을 보던 카이런 공작이 중얼거렸다.
“그립군. 저 성탑을 바라보는 것은 내 큰 즐거움이었는데.”
“세상에!”
내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찍자 그는 낮게 클클 웃었다.
“루엘라는 얌전했다지?”
“말은 밉게 했지만 체념한 것 같았어요.”
“뜻밖이군.”
카이런 공작은 여전히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가 속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는 빙긋 웃기만 했다.
“나는 그런 네가 좋아. 어설픈 것 말이야, 아리엘사.”
“못 말려…….”
나는 내 얼굴이 붉어지는 걸 그에게 보이기 싫다고 생각했다가,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앞으로는 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보여야만 했다. 그는 이미 스스럼없이 그렇게 하고 있었으므로 불안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