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17/128)

105화

“지쳐서 잠드신 거야. 출혈 때문에.”

체이어스의 말에 나는 울컥 소리쳤다.

“그러니까, 출혈 때문에 의사 선생님을 불러달라고요!”

그러나 체이어스는 피투성이인 나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사?”

“네, 체이어스 경.”

“할 말…… 없니?”

“……죄송해요.”

체이어스는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흔들었다.

“아니, 그거 말고. 그런 거 말고!”

“…….”

내 마지막 기억은 카이런 공작이 설성을 떠나던 뒷모습이었다. 기억이 잘려 나간 것이다.

“기억이…….”

“설성에 사다리가 있던가?”

그는 막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농담하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그 임신 농담을 듣지 않아도 될 모양이었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몸은 어때?”

“피곤해요.”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와락 껴안았다.

“숨, 못 쉬겠어요. 체이어스 경.”

“너 이 새끼, 그 손 치우지 못해?”

카이런 공작이 중얼거렸다. 그는 실눈을 뜬 채로 체이어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체이어스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더니 눈을 닦았다. 나는 그제야 그가 눈물을 흘린 것을 깨달았다.

“루엘라 프라일 양은 침실에 감금 중입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뭘 어째, 레오르트 프라일 그자를 내 땅에서 몰아내야지.”

“준비는 마쳤습니다.”

그때 의사 선생이 달려 들어왔다. 그는 좀처럼 서두르지 않는 사람이라, 나는 그가 뛰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내 몰골을 보고 경악했다가, 얼른 카이런 공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카이런 공작은 손에 두껍게 감긴 붕대가 못마땅한 듯 손가락을 까딱거려 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장 내게로 다가와 나를 꽉 안았다.

“생각 같아서는 그 잠옷, 내가 갈아 입혀주고 싶은데-”

“-고, 공작님!”

사람들 다 있는 데서 무슨 짓인지! 나는 기겁했다.

“우리가 조용히 쉬려면 피를 보는 수밖에 없어. 그러니 잠시 기다리고 있어.”

“그만! 피는 그만이요!”

나는 나를 놓고 방에서 나가려는 카이런 공작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못마땅한 카이런 공작과 당황하는 체이어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의사 선생은 은근슬쩍 나가버렸다.

“싸우시려고요?”

“내가 루엘라를 영지 밖으로 내보내는 순간 레오르트가 월경할 것이야. 이것은 피할 수 없다, 아리엘사.”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카이런 공작의 팔에 매달렸다.

“체이어스, 잠시 자리를 비워라.”

체이어스는 안타까운 것인지 분한 것인지 모를 신음을 내며 방에서 나가버렸다.

카이런 공작은 내게 물었다.

“묘안이라도 있나?”

❄❅❄

레오르트 후작의 군대는 남부로 돌아갔다. 루엘라는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고 간 것에 큰 충격을 받아 이틀이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 카이런 공작은 밀라를 불러 네 주인에게 음식을 먹이지 않으면 체벌을 하겠다고 겁을 주었다.

그러나 루엘라는 자기 눈앞에서 기절할 때까지 매질을 당하는 밀라를 보면서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루엘라는 선언했다.

“카이런 공작님, 이대로 굶어 죽어서 당신이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당하게 하겠어요.”

보다못해 체이어스가 찾아갔다. 그는 이제 공작부인으로 대우해줄 필요도 없는 여자를 향해 마음껏 조소를 날렸다.

“굶어서 몸이 상한 상태로는 남부까지의 먼 길을 가실 수 없으니 곤란합니다. 계속 음식을 드시지 않는다면 공작님께서 직접 먹여주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굶어서 예민해진 루엘라는 악을 썼다.

“그래? 그렇게 해보시라고 해! 그 시녀 년을 챙기느라 침대에서도 안 나오신다는 분이, 내게 손수 식사를 떠먹여 주시겠다고? 어디, 그 영광 한번 받아보지!”

‘침대’라고 말할 때 체이어스는 내 눈을 피했다.

어쨌든 체이어스는 그녀에게 말했다.

“공작님이 곱게 떠먹여 주실 거로 생각하십니까?”

“뭐라고……?”

루엘라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다가 그제야 식사를 시작했다.

아직 하르펠가의 주 침실을 차지한 루엘라의 패악을 전한 체이어스는 이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리엘사 양. 대체 무슨 농간을 부리신 겁니까?”

그는 나와 가십거리를 이야기하러 온 게 아니라, 이걸 묻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 카이런 공작이 잠시 연무장에 나간 틈을 타서 말이다.

그나저나 아리엘사 ‘양’이라니……. 정말 귀에 낯설었다.

“체이어스 경, 그냥 전에 하던 대로…….”

가신의 입장에서 카이런 공작의 여자를 하대할 수도 없었을 테지만, 나는 그것이 불편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예전으로 돌아가면 안 되냐고 말했을 때 카이런 공작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넌 이미 한 번 죽었어. 그걸로 됐지, 욕심을 더 부리려고? 앞으로는 내 곁에서 죽을 생각도 하지 말아. 아리엘사 로크만.”

어쨌든 체이어스는 카이런 공작의 명령에 따라 가끔 말이 뚝뚝 끊어질 정도로 어색해하면서도 나를 공대했다.

하지만 ‘농간’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 보면 그의 심기가 여간 편치 않다는 뜻이었다.

“말씀해보란 말입니다. 아리엘사 양!”

체이어스가 숫제 협박을 해서, 나는 떠듬떠듬 말했다. 물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어서 적당히 거짓을 섞어서 각색했다.

“헤리어트 드세일 씨에게 제 새 거처를 부탁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잖아요.”

그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호……. 그 샌님.”

“그러다 우연히 주워들었어요. 레오르트 후작님이 남해의 크라벨사 왕국과 거래하고 있다는 걸요.”

“크라벨사? 미쳤군.”

체이어스의 눈이 커졌다.

“그러면, 중부에서 잡아오라고 하셨던 자가…….”

“아마 그 거래의 통역자일 거예요.”

크라벨사 왕은 대공의 지난 반역을 배후에서 후원했다. 황제는 대로하여 크라벨사 왕국과의 모든 교역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는 경우 반역자로 간주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그런데 레오르트 후작이 그와 은밀하게 상거래를 한 것이다.

카이런 공작이 재빠르게 증인과 증거까지 확보한 탓에, 레오르트 후작은 발뺌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불행한 딸을 내버려 두고 즉시 남부로 돌아가 버렸다. 루엘라를 일단 여기에 남겨둔 것은 일종의 볼모였다.

그가 남부에 도착하면 그때 돌려보내기로 했다.

“석회 광산의 거래권은 결혼 취소에 대한 배상금이고?”

“어차피 북부에서야 석회는 건축 재료로밖에 사용하지 않으니까…….”

“하긴, 비싸게 팔긴 했어. 휴우……. 어쨌든 공작님께서 그녀를 이틀 후에 돌려보내겠다고 하셨으니 이틀만 참아.”

체이어스는 소파에 늘어져 앉았다. 천장을 보며 마른세수를 하는 그는, 이 상황이 믿기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이 상황을 소화하기가 정말로 힘든지 다시 반말을 했다.

“너는 이걸…… 사후세계에서 보았다고?”

“…….”

물론 그 불법적인 거래는 원작에서 카이런 공작이 프라일령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알게 된 내용이었다.

나는 체이어스를 조금 놀려주고 싶었다.

“체이어스 경은 제가 돌아온 게 기쁘지도 않으신가 봐요. 맨날 눈을 부라리시고 화만 내시고…….”

“내가, 내가 뭘!……요. 제기랄.”

체이어스는 더 못 견디겠다는 듯 일어나 돌아섰다.

그는 나를 등진 채 물었다.

“행복합니까?”

나는 한번 크게 심호흡하고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네. 체이어스 경. 행복해요.”

체이어스는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랬다. 죽음에서 돌아와서 가장 먼저 카이런 공작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내가 그의 곁에 있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내 몸도, 마음도, 그에게 진정으로 속박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박은 두려움이 아니라 행복이었다.

내가 가운을 여미며 소파에 앉아 벽난로를 쬐고 있자 카이런 공작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쯧, 그새를 못 참고.”

“네?”

“체이어스가 다녀갔다지?”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공작님은, 저를 아무랑도 말하지 못 하게 하실 셈이세요?”

“음……. 그게 좋겠어. 진작 그럴걸.”

“앉으세요. 성내 순시는 마치셨어요?”

“그래.”

그는 소파에 앉아 팔로 내 몸을 둘러 자신에게 당겼다. 그에게 묻은 냉기가 내게 떨어지기에 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그러자 그가 내 손바닥에 자기 뺨을 지그시 붙여왔다.

차갑고도 더운 카이런 공작의 피부는 언제 닿아도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그를 만지는 것이 생경하고 가슴 떨렸다.

그는 내 체온이 닿아 안도한 사람처럼 깊고 편안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반쯤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체이어스가 뭐라고 했든지 신경 쓰지 마. 귓구멍 더러워져. 내 예쁜 귓구멍이.”

그리고는 내 귓불을 입술 끝으로만 슬쩍 물어 당겼다.

“고, 공작님!”

나는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라서 몸을 뺐다.

나는 그가 유치하고 민망한 짓에 이토록 뛰어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누가 보든지 말든지 민망한 애정 표현을 했는데, 그럴 때도 무서운 얼굴로 정색을 하고 있어서 웃을 수 없는 것은 물론, 화를 내며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아이, 정말!”

나는 그를 흘겨보며 내 귀를 손으로 가렸고, 그는 그런 내가 마치 애교라도 떤 것처럼 ‘그만해.’ 중얼거리며 몸을 기울여왔다.

우리의 입술은 조금 어긋나지도 않고 곱게 겹쳐졌다.

나는 이제 자포자기가 되어서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때리다가 그의 가슴에 기대 벽난로만 응시했다.

“신경 쓰여요……. 백성들은 공작님께서 아내를 내쫓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을 거라고요.”

“걱정 마. 이미 성내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으니까. 레오르트 후작이 무슨 짓을 했는지 다들 알게 될 거야.”

나는 놀라 머리를 들려 했지만, 그는 내 머리를 자기 가슴에 고정하듯 꾹 눌렀다.

나는 어둡게 말했다.

“그 소문, 공작님이 내신 거죠?”

“당연하지.”

“…….”

“왜, 불만이야?”

“무섭다고요, 공작님은.”

적으로 삼기에는 무서운 인간. 그가 카이런 하르펠이었다.

“훗. 칭찬으로 듣지. 내 여자 앞에 걸리적거리는 걸 놓아둘 생각은 없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