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대단한 사람인 그녀의 아버지도 이런 기운은 지니지 못했다.
아버지 주변을 가득 채운 화려한 남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모두 말뿐이었다.
하지만 루엘라는 자신이 선택한 이 남자가 완벽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평생 귀하고 값비싼 것만 보아왔으니 안목만은 탁월했다.
그는 아름다웠으며, 강인했다. 그녀가 꿈꾸던 모든 것을 갖춘,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그런 이가 껍질이 벗겨진 듯 속살을 드러내고 증오를 흘리는 모습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자신에게 속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그 꽃이 어디 있냐고?
“아버님께 맡겨두었어요.”
루엘라는 카이런 공작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주먹 쥔 팔이 팽팽한 걸 보고 기뻐했다. 이제야 자신의 남편을 지배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제야 결혼의 만족감을 맛보게 되었노라고 안도했다.
“그 꽃을 그 시녀에게 먹여보려고 하시는 거죠?”
“…….”
“아버님이 부하들을 데리고 저를 만나러 오셨는데, 공작님의 기사들이 입경을 막았어요. 이 추운 곳에서 노숙하는 아버님께 너무 죄송해서, 그냥 돌아가시라고 했어요. 내일 아침에는 남부로 출발하실 거예요.”
카이런 공작을 원망한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요.”
레오르트 후작이 사막의 꽃을 가지고 남부로 돌아가 버리면 아리엘사를 제때 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루엘라는 협상을 원하고 있었다. 꽃을 돌려주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뭘 원하지?”
“물론 당신이죠, 북부의 주인이신 나의 공작님. 저와 합방하세요. 그러면 꽃을 돌려드리죠.”
카이런 공작의 어금니에서 빠득 하는 소리가 난 듯도 싶었다. 이를 악문 채 루엘라를 노려보았으나, 그에게 출구는 없었다.
아리엘사를 살리기 위해서, 그는 루엘라와 부부가 되어야 했다.
카이런 공작은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다가, 돌연 편안한 얼굴을 했다.
그는 주도면밀하지만 또한 단순한 남자였다. 이 일은 우선순위가 명확하여 별로 망설일 것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하나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치러야 할 희생은 기꺼이 받아들일 터였다.
‘아리엘사, 미안하지만 좀 기다려줘야겠어. ……개새끼라도 받아줘. 꼭.’
그는 경멸하는 웃음을 띠고 말했다.
“겨우 그건가?”
루엘라의 다문 입술은 묘한 직선을 그렸다.
한 사람의 생명을 걸고 얻어내려는 게 고작 남자와의 하룻밤이냐는, 모욕적인 비아냥을 이해해버렸기 때문이다.
“어려울 것도 없지. 내 여자를 위해서 내 몸을 더럽히는 거라면.”
카이런 공작은 루엘라가 타준, 이제는 식어버린 차를 한 번에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 외투를 벗어 던졌다.
루엘라는 잔뜩 일그러진 웃음을 띤 채 물었다. 그때만은 그녀의 웃음이라도 아름답지 않았다.
“당신 여자? 그 시녀가요?”
“그래. 내 단 한 명의 여자.”
루엘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의 평정에는 수없는 금이 갔다. 목소리마저 떨렸다.
“더럽히는…… 거라고요? 나와 부부가 되는 것이?”
“그녀가 아니더라도.”
카이런 공작은 잠시 멈추었다 말을 이었다.
“내 숲에 불을 지르고, 내 땅에 아비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여자를 존중할 만큼 내가 성질이 좋지 못해. 그대가 가출했다는 거짓말 같은 것은 억지로 잊더라도 말이야.”
“…….”
“그렇게 간절히 공작 부인이 되어야겠다니 말해주지, 나는 가면 아래에서 거짓을 말하는 자들을 혐오해.”
“당신……!”
“그대도 나를 혐오하도록 해. 나는 아리엘사를 내 진짜 아내로 여기며 그 사실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니, 그대는 이름뿐인 남편을 가지게 될 거야.”
루엘라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녀의 출중한 인내심의 선은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말했다.
“감히…….”
카이런 공작은 보란 듯 튜닉의 여밈을 풀어헤치며 루엘라 앞으로 갔다.
이를 드러내는 그의 웃음은 매력적이고도 섬뜩했다.
“원하는 걸 줄 테니, 내일 아침까지 그 꽃을 내 손에 쥐여줘. 그렇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해주지, 루엘라. 하르펠의 이름을 걸고, 북부를 걸고, 맹세코.”
루엘라의 얼굴 근육은 울음도 웃음도 아닌 듯이 제각기 경련했다.
그녀는 눈에서 불을 뿜듯 카이런 하르펠을 노려보며 소리로만 웃었다.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카이런 공작님! 나는 이미 당신이 원하던 것을 주었으니까!”
카이런 공작의 눈썹이 가늘게 일그러졌다.
그간 껍질처럼 입고 있던 품위를 벗어던지고 씩씩거리는 루엘라를, 카이런 공작은 차갑게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뜻이지?”
“그 꽃, 이미 당신에게 줬다고요.”
“무슨…….”
“방금 당신이 마셔버렸잖아요.”
“……!”
카이런 공작은 얼어붙었다.
동요하는 그를 보며, 루엘라는 우아하게 걸어가 작은 도기 찻주전자를 들어 보였다.
“그 꽃을 푹 우려내서 딱 차 한잔으로 만들었어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당신에게 바치려고 했는데, 당신은 거절하는군요.”
그녀가 말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루엘라 자신이었다. 그녀에게는 전설 속의 꽃은 잡초와 차이가 없었다.
“이제 어쩌실 거죠? 위대한 카이런 공작님.”
카이런 공작은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였다.
그는 한 손을 앞으로 내민 채 몇 걸음을 걸었다. 한 걸음만 더 걸으면, 그 손으로 루엘라의 목을 조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복수를 위한 한 걸음 대신, 그는 아리엘사에게 돌아가기 위해 두 걸음을 물러섰다.
그는 방문으로 나가며 고함쳤다.
“누구 없나! 루엘라 프라일의 방문을 지켜라.”
❄❅❄
카이런 공작은 손님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체이어스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침대로 다가갔다.
“병력을 모두 준비시켜라. 새벽에 레오르트 후작의 군대를 토벌한다.”
“하지만 그들은 영지 밖에…….”
체이어스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는 제 주인이 원하는 일을 이룰 것을 알았다. 후작의 군대가 영지 밖에 있다면, 카이런 공작은 기어이 그들이 월경하도록 도발하고 말 것이다.
“네. 공작님.”
체이어스는 머리를 숙이고 나갔다. 그는 카이런 공작이 폭주하지 않도록 잡아주는 추 같은 역할을 하는 자였지만, 지금은 그가 할 것이 없는 듯했다.
체이어스가 나가자 카이런 공작은 아리엘사를 내려다보았다.
은은한 등잔불을 받으니 아리엘사의 피부가 이제 잿빛을 띠기 시작한 것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카이런 공작은 침대에 앉아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추었다.
“아리엘사. 내게 미래라는 게 있다면, 나는 네 말을 듣지 않을 거야. 성깔을 부리며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그는 그녀의 탄력 없는 뺨을 부서질 듯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너를 내 한 발자국 반경 밖으로 나가지 못 하게 할 거야. 내가 손만 뻗으면 너를 붙잡을 수 있도록.”
카이런 공작은 아리엘사의 옷에 매달아 두었던 마석 주머니를 빼내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이제 그녀의 시신을 지키는 힘은 없었다.
그는 단검을 꺼내 손바닥을 갈랐다. 주먹을 쥐어 주르륵 흐르는 피의 속도를 조절하며 아리엘사의 입속으로 흘려 넣었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신비한 꽃을 제가 달여 마셔버렸으니, 그의 핏속에는 그 꽃의 힘이 흐르고 있을 터였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
“하아…….”
나는 온몸의 압박감이 불편해 옅은 숨을 뱉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이 압박감은 낯설지 않았다. 이 온기도.
화로로는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특별한 온기…….
나는 내가 그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천천히 깨달았다. 침대도 이불도 푹신하고 부드러워서 눈을 뜨기 싫었다. 죽을 듯 피로했다.
하지만 조금 있으니 너무 갑갑해서, 나는 힘을 쥐어짜서 그의 몸을 조금 밀어냈다. 그러다가 내 잠옷 목덜미와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라는 걸 깨달았다.
“으으아…….”
나는 기겁했지만, 카이런 공작은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척하는 것은 아니었다.
‘카이런……?’
나는 충격에 휩싸인 채 조심스럽게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두통과 함께 세상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울음이 터지는 것을 막으려 입술을 꽉 물었을 때, 그가 눈꺼풀만을 열었다.
고요하게 열린 눈동자는 곧장 내 시선을 찾아냈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가슴을 크게 부풀려 숨을 몰아쉬었다.
그를 다시 바라보는 게 이토록 기쁠 줄이야…….
그가 손을 들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꿈인가?”
나는 흐느끼며 물었다.
“다쳤어요? 아파요?”
“……꿈이 맞는가 보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한 그는 웃었다. 나는 그의 몸에도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소스라쳤다.
“어디 봐요!”
나는 그의 손의 자상을 발견하고, 재빨리 내 잠옷단을 찢어 감아주었다.
“어쩌다 이랬어요! 난, 몰라, 어쩌다가요!”
“제기랄……. 앞으로 나는 네가 탄 차만 마실 거야.”
카이런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 침대로 축 늘어졌다. 나는 비명을 겨우 참고 있었지만, 그는 어쩐지 웃고 있었다.
나는 밖으로 달려 나갔고, 문밖을 지키던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필레 경, 의사 선생을 불러주세요! 어서요!”
“컥……!”
필레 경은 나를 보더니 기겁하여 달려가 버렸다. 문 반대편에 서 있던 루카르 경도 나를 귀신 보듯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피, 제 것 아니에요. 공작님이 다치셨다고요!”
“아리, 아리엘……사?”
“아니 왜 그렇게 놀라시냐고요!”
“아…….”
필레 경과 함께 달려온 체이어스마저 나를 보고 경악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항의하기를 포기했다.
“공작님께서 다치셨다고요! 아무도 안 들리세요? 의사 선생을 불러주세요.”
그러나 체이어스는 방으로 들어와 카이런 공작을 살펴본 다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