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15/128)

103화

마차는 하르펠 성내로 돌격하듯 들어와 성문 앞에 멈추었다.

“공작님!”

체이어스는 카이런 공작의 표정을 알아보고 말을 잇지 않았다.

카이런 공작이 도착하는 것을 본 가신들이 몰려들었지만, 그에게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단지 마차에서 커다란 곰가죽을 안아 꺼냈다.

체이어스는 가늘어진 눈으로 카이런 공작의 행동을 살피다가, 곰가죽 안에서 하얀 팔이 뚝 떨어지자 놀라 한 발 물러서고 말았다.

영지 밖에 도사린 레오르트 후작의 군대를 어떻게 처리할지, 마침내 나타난 주인을 다급히 맞이하러 나온 가신들은 시체를 안고 나타난 주인에게 경악하여 아무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체이어스는 이미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카이런 공작에게 다가갔다.

“공작님, 그건…….”

카이런 공작은 네가 거기 있었냐는 낯선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성이 희미하게만 남은 눈빛에, 체이어스는 침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체이어스는 곰가죽 안에 늘어져 있는 시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았다.

“헉……!”

카이런 공작은 곰가죽을 꽉 끌어안으며 숨을 멈춘 체이어스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마치 내 것에 눈독 들이지 말라고 이를 드러내는 짐승의 태도였다.

“무슨 일이냐!”

체이어스는, 감히 아리엘사를 언급하는 대신 더듬으며 대답했다.

“영지, 영지 경계밖에 레오르트 후작의 군대가 머무르고 있습니다.”

카이런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선전포고는?”

“아직…….”

카이런 공작은 체이어스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곰가죽을 안고 성안으로 사라졌다.

❄❅❄

카이런 공작은 자신이 마지막에 머물렀던 손님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리엘사를 곰가죽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침대에 눕히고, 문으로 직접 나가 하녀에게 따뜻한 물과 물수건을 받아왔다.

그리고 손수 아리엘사의 몸을 닦아냈다.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부드러워서, 아리엘사는 단지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만 보였다.

그녀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마석을 동원해 걸어둔 마법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얼마 더 가지는 못하겠지만…….

그는 그녀가 떠나기를 거절하고 있기를 바랐다. 그녀가 죽음에 감금된 채로도 저를 기다려주기를 바랐다.

그가 단 며칠 만에 북쪽 땅끝에서 하르펠 성까지 돌아오는 동안 바란 것은 그뿐이었다.

또한 이제 그가 해야 할 일도 하나뿐이었다.

카이런 공작은 아리엘사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쪽방으로 들어갔다. 쪽방 안은 깨끗이 정리되어 아리엘사의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

루엘라 프라일의 짓이 분명했다. 대체, 어리석은 아리엘사는 대체 그 여자의 어디에 사로잡혔던 것인지, 카이런 공작은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고통스러웠다.

카이런에게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루엘라가 그것을 없애버렸다면…….

“제기랄!”

그가 고함을 치고 있을 때였다.

-공작님, 체이어스입니다.

“들어라.”

체이어스는 침대에 누운 아리엘사를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카이런 공작은 그런 그의 태도가 불쾌한 듯 날카롭게 불렀다.

“왜!”

체이어스는 숨을 참았다.

그는 카이런 공작과의 말다툼이나, 북부인들이 금기로 여기는 겨울 전쟁까지 각오했지만, 이것은 아니었다.

설마라고 생각을 쥐어 짜보아도 침대에 누운 아리엘사는 주검이 분명했다.

‘공작님이 정말로 미쳐버린 것인가.’

체이어스는 제 이마를 짚으며 그를 불렀다.

“공작님…….”

체이어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아는 카이런 공작은 사납게 말을 잘랐다.

“그녀는 죽지 않았어!”

이를 악물고 있던 체이어스는 결국 울음을 흘렸다.

“끄흑……. 숨을 쉬지 않잖습니까!”

체이어스는 진실을 외면하는 주인을 보며 고통스럽게 소리쳤다.

“시신을 저리 두시면-”

“-닥쳐!”

살기를 실어 고함친 카이런 공작은, 억지로 숨을 고르며 자제하려 애썼다.

“왜 왔는지나 말해. 너는 입 닥치고 있어. 내가 곧 해결할 거니까!”

“모두 작전 회의를-”

“-기다려. 지금은 그녀가 먼저다.”

카이런 공작은 아리엘사에 관한 것 말고는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 하고 있었다. 코앞에 적이 와 있음에도 그랬다.

체이어스가 체념하여 문으로 걸음을 옮기자 카이런 공작이 이를 으드득 물고 말했다.

“문을 지켜라, 체이어스. 아무도 들이지 말아. 네가 내게 바친 목숨은 지금 걸어라.”

체이어스는 절망했다. 하르펠가의 가신인 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 권리를 지금 요구할 줄이야.

지금 카이런 공작의 하르펠 성은 아리엘사였다.

그는 침통하게 머리를 숙였다.

“명 받듭니다.”

❄❅❄

카이런 공작은 침실문을 벌컥 열었다. 지금 루엘라가 쓰고 있다고 하나 원래부터 자신의 침실이니 거리낄 것은 없었다.

루엘라는 의자에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의 정돈된 모습은 오래전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카이런 공작이 들어오자 흠잡을 데 없는 미소를 띠며 일어났다. 화사한 유백색 실내용 드레스와 완벽하게 다듬은 머리는, 그녀가 이 순간을 준비해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담백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공작님. 먼 길 다녀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카이런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엘라의 저러한 여유는 아리엘사에게 없는 것이었다.

고상함이나 품위라고 불러야 할 그것을, 그는 결코 사랑할 수 없었다.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그대 또한 고생했어.”

루엘라도 레오르트 후작의 하수인 노릇을 하느라 틀림없이 바쁘게 지냈을 것이다.

카이런 공작은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여자를 향해 미소를 띠어 지극히 경멸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부덕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는 엉뚱한 여자를 신부 자리에 세웠다. 사랑하는 여자는 성탑에 가둬둔 채.

그 모순을 버텨보려다가 일을 이 꼴로 만들고 말았다.

카이런 공작은 지극히 아름다운 여자를 진심으로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루엘라가 그에게 복수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받아줄 생각이었다. 그가 얼마나 비겁하고 비열했는지는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후작을 끌어들여 하르펠령을 공격하는 순간, 이것은 개인적인 은원의 차원을 넘어버렸다. 이제 그러한 해결은 불가능했다.

카이런 공작에게 루엘라는 적이었다. 남은 은원이란 없는 단순하고 명료한 사이였다.

“앉으세요, 공작님. 공작님께서 돌아오시기를……. 저는 정말로 간절히 기다렸어요.”

루엘라의 목소리는 약간 떨림으로써 훌륭하게 진실을 연기했다.

카이런 공작은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언젠가 아리엘사가 혀를 찼던 완벽한 가식의 미소가 그의 얼굴로 퍼졌다.

루엘라는 작은 화로에 찻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아리엘사가 늘 하던 짓이었다.

그녀가 제 몸을 써서 일을 하다니, 카이런 공작은 그녀의 뒷모습을 가늘어진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루엘라가 차 한잔을 내어왔을 때, 그의 눈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쓰던 방을 치웠더군. 루엘라.”

“당연하지요. 손님방은 언제든 깨끗하게 관리해야 하잖아요.”

루엘라는 부드러운 속눈썹을 내리깐 채 속삭이듯 덧붙였다.

“이제 공작님은 저와 침실에서 주무셔야 하니까요.”

카이런 공작은 루엘라의 끈기에 감탄했다.

오히려 그녀가 자존심이 상해 분노하고 있었다면 그녀를 더 존중하는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비굴하게 굴었다면 아주 약간 동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엘라는 지금까지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기하고 있었다.

카이런 공작은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운명이라니, 거짓말.’

이미 그 운명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름을 틀어버린 것은, 눈과 얼음을 양손에 쥔 신이 잠든 산이 무너진 것만큼이나 명확한 일인데.

그것을 무시함으로써 부정할 수 있다고 믿는 그녀의 오만함이 가소로웠다. 그녀가 탄 차에서 짙게 피어오르는 김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리엘사의 물건은 다 어디로 치웠지?”

카이런 공작이 직설적으로 던지자, 루엘라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아리엘사의 이름이, 그녀를 자극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카이런 공작과 루엘라의 시선은 공중에서 조용히 맞부딪쳤다. 얼음 같은 미소로 상대방을 응시하면서,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루엘라였다.

“그 꽃을 찾으셨나요?”

카이런 공작의 눈썹은 순간 꿈틀거렸다. 결코 드러내면 안 되는 반응이었다.

루엘라는 마치 그것을 못 본 듯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귀한 꽃이라더군요. 헤리어트가 말해줬어요. 저는 꽃에 대해 퍽 많이 아는 편인데도 처음 보는 꽃이라 신기해서 물어봤죠. 도망자 주제에 꽃을 챙겨 온 것이 이상하잖아요?”

그녀는 카이런 공작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잉크처럼 미소가 번졌다. 그는 그 속에 숨은 승리감을 알아볼 수 있었다.

“헤리어트는 이것이 하냐크족의 전설 속에 나오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꽃일지도 모른대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는데.”

루엘라는 아름다운 턱을 살짝 저으며 웃었다.

“하지만 헤리어트는 여러 곳을 돌아다녀서 아는 게 많아요. 저는 전설 같은 것은 절대 믿지 않지만, 헤리어트의 말은 믿을 수밖에 없어요.”

카이런 공작은 자신의 패가 완전히 루엘라의 손에 넘어갔음을 깨달았다.

그의 주먹이 희게 쥐어진 걸 본 루엘라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승리를 원하지 않았다. 남자와 대결하기를 원치 않는 그 여자는, 남자의 꺾어진 의지를 소유하기를 원했다.

자신에게서 달아난 남편이 무력하게 자신의 처분에 매달려야만 하는 그런 것 말이다.

카이런 공작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꽃은 어디 있나?”

루엘라는 카이런 공작이 흘리는 살기에 잠시 눈을 감으면서 짜릿한 감각을 경험했다.

이렇게 강력한 기운을 가진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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