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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114/128)

102화

카이런 공작의 시선이 아리엘사에게 전보다 오래 머물곤 한다는 것은, 체이어스도 그러고 있었으므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카이런 공작이 차를 종일 마시고, 아리엘사를 살피는 시선에 희미한 미소나 미간이 슬쩍 접히는 표정이 섞이기 시작했을 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넋이 나가버린 제 주인이 하르펠 성 앞에 곰가죽으로 둘러싼 아리엘사의 시신을 들고 나타나는 일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체이어스는 그렇게 자신을 자책했다.

그 기억은 체이어스를 그 후로도 오랫동안 괴롭혔다.

❄❅❄

출정하러 가며 설레는 건 처음이라고, 그녀의 말대로 나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라고, 카이런 공작은 설성을 떠나 썰매를 달리며 짧게 웃었다.

그가 아리엘사와 설성에서 보낸 시간, 그녀와 나눈 체온의 기억은 그를 열에 들뜬 것과 같은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카이런 하르펠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에 하등 불만이 없었다.

앞으로 자신은 예전의 카이런 하르펠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며, 아리엘사 로크만에 의해 많은 것이 변해버린 자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에 실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귀환 사실이 레오르트 후작에게 새어나갈까 봐 일부러 인적 없는 길을 따라 썰매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개들이 지쳐 썰매 속도가 느려졌을 때야 근처의 빈 오두막으로 찾아들었다.

북부에는 사냥하러 나온 자들이나 행인들이 추위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이런 시설들이 많았고, 그는 그 대부분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눈이 얼어붙은 털 케이프를 벗어놓고 재빨리 불을 피웠다. 공기가 훈훈해지자 외투의 단추를 열다가 주머니 안에서 바스락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아리엘사가 넣어둔 것이 틀림없는 편지를 꺼내 들고 피식 웃었다. 그녀가 자신인 척 루엘라에게 보냈던 그 한심한 연애편지를 자신에게 쓴 것인가 싶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이토록 사소한 것에도 웃을 수 있는 인간이었나, 그런 자각이 그를 의미 없는 일에 울고 웃는 보통 인간의 자리로 떨어뜨리는 듯했으나 그는 여전히 기뻤다.

그는 아리엘사의 편지를 열어보기가 아까워 꼭 쥔 채 창밖을 보았다.

“쯧. 불길하게.”

창밖에는 푸른 오로라가 넘실대고 있었다. 달아올랐던 기분이 찬물을 부은 듯 식어버렸으나, 그는 불길한 징조 따위 잊으려 애쓰며 편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음미하듯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박차듯 일어나 개들을 다시 썰매에 묶었다. 막 숨을 골랐을 뿐인 개들은 여전히 쉬고 싶어 했고, 한 마리고 끙 하듯 짖었다.

그러자 카이런 공작은 검을 뽑아 그 개의 목을 찔렀다. 주인의 경고를 알아들은 개들은 다시 달렸다.

개들을 채찍질하면서, 카이런 공작은 분노하여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내게 돌아오지 말라니, 감히 나를 버려 들다니……!’

그는 그가 돌아올 때쯤엔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고 없을 거라는 아리엘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어설픈 거짓말 같은 것은 늘 판별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속아버린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기가 갈렸다.

지금 당장 설성으로 돌아가 그녀를 끌고 나올 작정이었다. 눈 밖에만 벗어나면 사고를 치는 여자니, 아예 옆구리에 끼고 하르펠로 돌아가서 가둬놓은 다음에 레오르트를 어찌해줄 작정이었다.

그녀의 납득할 수 없는 편지가 머릿속을 괴롭혔다.

<제가 드린 저의 온전한 마음을 가지고 떠나세요. 이렇게 멀리 돌아오게 해서 미안해요.

당신을 동경하느라 당신의 마음이 제 것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못했어요. 그것이 제 어리석음이었어요.

미안해요. 당신 짝사랑을 오래 혼자 놓아두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카이런 공작은 새벽에 북쪽 끝 마을을 통과하고 있었다. 하루 중 가장 추운 시각이었다. 오는 중간에 개의 숫자가 두 마리 더 줄었지만 설성으로 돌아갈 수는 있을 듯했다.

그런데 개들이 일제히 멈추어 앞을 향해 귀를 세웠다. 카이런 공작은 다시 개들을 채찍질했지만, 이번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개들이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고 어스름한 새벽안개에 휩싸인 설산을 쏘아보았다.

설산의 안개가 느리게 흐르며, 무너진 정상을 드러냈다. 성의 반이 토사에 파묻혀 있었다.

카이런 하르펠은 제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

아리엘사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것은 녹색의 휘황한 빛이었다. 사람을 매혹하는, 아름답고도 불길한 빛 말이다.

그녀는 카이런 공작이 직접 사냥하여 선물한 곰가죽을 푹 뒤집어쓴 채 새벽까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무얼까.

저 불길한 오로라가 이제는 이 땅에 무엇을 가져올까 두려워하면서.

우르르르……. 세상이 뿌리부터 떠는 것 같은 떨림이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공포로 몸이 굳었다.

그 ‘운명’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음을 직감한 그녀는 동시에 안도했다.

원작의 억지력은 이번에는 그를 괴롭히지 않고 그녀를 선택했던 것이다.

산사태에 설성이 무너져 내리는 진동 속에서, 그녀는 울컥,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카이런 하르펠은 컴컴한 설산을 향해 악을 썼다.

“빌어먹을 신은 들어라!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간다면, 맹세코 이 산을 흔적 없이 무너트릴 것이다! 이것은 카이런 하르펠의 맹세다!”

늙은 성지기 부부는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무너진 성의 잔해에서 토사를 파내느라 들짐승 같은 꼴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그가 내뿜는 순수한 고통과 절망의 신성모독에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공작님, 제발 그런 말씀은 마시고, 어서 마님을…….”

마틴은 겨우 그렇게 말했지만, 저도 희망을 가질 수 없어 눈앞의 잔해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도 오로라를 보았으니, 이것이 신들이 불러온 재앙임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신들이 사랑하는 저 주인에게 왜 이런 가혹한 일이 일어났나 하는 것이었다.

마틴은 주인이 품에 끼고 어쩔 줄 모르던 새 여주인의 시신을 파낸들, 주인의 정신이 되돌아올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카이런 공작은 어둠 속을 내려다보다 몸을 획 돌려 정원 쪽으로 사라졌다.

조금 후 돌아온 카이런 공작은 비장하게 말했다.

“비켜.”

그의 손에 들린 마석을 본 마틴 부부는 재빨리 토사 더미에서 내려와 카이런 공작의 뒤로 갔다.

카이런 공작은 마석을 쥔 채 입술로만 속삭였다. 그의 손에 안개가 흐르듯 빛이 고였고, 그가 팔을 휘두르자 무너진 바위들이 날아가 침실이었던 자리가 드러났다. 마법이었다.

그는 마틴과 힐데가 달려가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은 다음 혼자서 뛰어 올라갔다.

컴컴한 침실의 잔해 속에 커다란 곰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아리엘사…….”

카이런 공작은 다가가 떨리는 손끝으로 곰 가죽을 열었다.

잠옷 차림의 그녀는 숨을 쉬지 않았으며 차가웠다. 그녀의 몸을 껴안고, 그는 울부짖었다.

힐데가 입을 틀어막으며 울었으나 무너진 산에 메아리치는 것은 카이런 공작의 울음뿐이었다.

❄❅❄

카이런 공작은 마차를 끄는 말에도 가혹하게 채찍질했다.

그는 이를 갈고 있었으며 눈에는 핏발이 서 흰자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는 채찍질을 하며 이따금 중얼거렸다.

“못돼 처먹었어. 감히 나를 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면…….”

그는 다가오는 하르펠 성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그 성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여자에 대해 떠올렸다.

하르펠 성에, 자신에게 속박된 존재라고만 믿었던 맹랑한 여자는, 마지막까지 그를 속이려 했다.

편지 한 장으로 자신을 잘라내려 하다니, 제 사랑을 찬탈한 주제에 자신을 영영 떠나겠다고 말하다니.

아찔하여 어디서부터 화를 내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편지를 발견하고 설성으로 돌아가면서, 이번에야말로 생각을 고쳐먹게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녀가 하루라도 눈앞에서 사라졌다가는 그는 미쳐서 날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가 숨 쉴 공기였고, 광증의 처방약이었다.

그녀가 무슨 어설픈 소리를 하건 입술로 입술을 닥치게 하고, 손을 붙잡아 걸음을 속박하고야 말리라고, 그는 가혹하게 채찍질하며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고통스러운 행복을 맛보게 될 터였다.

제 입술을 그녀의 입술과 맞닿게 하고, 종일 그 손을 붙잡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방향을 향해 걷다 보면, 왜 그러지 않겠는가.

그의 지독한 불안을 없애는 방법과 그의 지극한 행복을 붙잡아 두는 방법은 하나였다.

아리엘사. 이제야 만난 아리엘사.

그런 그녀의 마음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내면을 고통으로 뒤틀리게 했다.

자신이 이방인이니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고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를, 그는 완전히 믿지 못했다.

카이런 공작은 그녀가 두려워하던 재앙이 이토록 강력하고 과격한 것일지 예측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그따위 재앙, 오면 맞서 이겨주리라 생각했다. 그는 하르펠, 마물을 방벽 너머로 몰아낸 자였다.

마물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신의 의지라고 말한다면, 그는 신의 의지와 싸워 유일하게 승리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그는 그런 오만을 허락받은 자였다.

하지만 그 대가가 살면서 처음 모든 것을 걸기로 한 여자의 목숨일 것은 예측하지 못했다.

그녀의 경고를 무시한 것도 저였고, 그럼에도 그녀를 설산으로 끌고 가 그녀의 마지막 고집까지 무너뜨린 것도 그였다.

그러고서도 마침내 그녀를 가졌다고 기뻐했다. 그녀와 단둘이 머무는 설성을 천국이라고 여기며 뻐겼다.

카이런 공작은 그러한 자신을 증오하며 말에게 채찍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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