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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운명이라니, 거짓말. (113/128)

12. 운명이라니, 거짓말.

하르펠 성은 전시 상태에 있었다. 성의 주인이 신부를 백안시하다가 하녀를 데리고 가출해버렸다는 사실은 북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여자 문제라면 대쪽 같던 공작이 여자 문제를 일으킨 것도 놀라웠지만, 새 장인이 군대를 이끌고 오자 이 사건은 더 이상 농담거리가 될 수 없게 되었다.

레오르트 후작은 선전포고를 하지도 않고 영지 경계를 넘지도 않았다. 언젠가 황태자가 말에서 떨어졌던 표지석 너머 숲에 조용히 머물면서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루엘라 공작 부인은 그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었다. 그녀는 단지 행정관을 불러다 영지의 사정을 파악하고 공작 부인으로서 성을 관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행정관도 지금 그녀의 지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불명확하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으니, 성내의 민감한 정보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당혹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니 가장 곤란해진 사람은 체이어스였다. 공작 부인의 부름을 두려워 한 행정관들이 그에게 달려왔기 때문이다.

“대체 공작님은 이 결혼을 어찌하실 생각이란 말이오? 경은 알 것 아니오!”

“으으으!”

체이어스는 차마 제 주인을 일컬어 욕설은 던지지 못하고 창밖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공작 부인께서 부르시면 그냥 가만히 계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정 뭣하면 감옥에라도 넣어 드릴까요?”

그러면 행정관들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체이어스를 흘겨보다가 ‘거, 참. 됐소.’ 하고는 돌아갔다.

하지만 수감 제안은 체이어스에게는 퍽 파격적인 호의였다. 나중에 카이런 공작과 루엘라 공작 부인이 화해하게 되면 행정관들은 밉보일 수밖에 없었다.

루엘라가 아리엘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다들 알았기 때문에 행정관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감옥에라도 갇히면 나중에 변명하기가 좋을 터였다. 체이어스 그 미친 책사놈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하르펠의 지하 감옥에는 관광 삼아서라도 가보고 싶어 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체이어스는 이를 바득 갈면서 자리에 앉아 머리를 굴렸다.

레오르트 후작은 절대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영지가 북단과 남단의 끝에 있는 탓에 교류라고 할 것은 없었지만, 그가 쌓은 부와 황실의 요구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면 그것은 분명했다.

황궁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는 카이런 공작은 그를 퍽 경멸했다. 어지간한 자라면 무시했을 카이런 공작이 경멸한다는 것은 일단은 가치를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지금 후작의 도발을 그의 판단만으로 상대해야 하는 체이어스로서는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취해야 할 조치와 상황에 따른 몇 개의 대응책을 신중히 골라 결정했다.

그의 역할은 카이런 공작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체이어스는 자신이 이 하르펠 성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제 주인이 때맞추어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런 하르펠은 부하들을 개처럼 굴릴지언정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없었던 적은 없었다.

평소에는 열등한 너희 보통 인간들을 못 참아주겠다는 듯 성질을 부렸지만, 마지막에만은 그는 늘 북부의 보호자였다.

그러니 체이어스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여자에 미쳐 달아난 주인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올 때까지 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미 영지 북부에서 카이런 공작이 썰매를 구해 설성으로 향했다는 정보를 전달받았다.

당장 달려가려 했지만 그때 레오르트 후작의 군대가 도착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을 뿐이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체이어스는 아리엘사를 떠올리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는 대게는 의문 같은 것은 품지 않고 살았기에 그것은 더 괴로운 일이었다.

‘대체 왜.’

‘아니, 어째서 그 정도로.’

그는 제 아버지 얼굴을 보고도 울음을 터트리던 소심한 계집아이를 평생 보아왔다. 물론 아버지 얼굴을 보고 운 것이야 순전히 그 우락부락한 아버지 탓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지나치게 소심한 아이였다.

자기가 자랄수록 점점 예뻐진다는 사실도 그녀에게는 별의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듯한 소녀는 늘 무릎에 흙을 묻히고 다녔다. 정원에서 차 끓일 식물들을 키우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인 것 같았다.

인간을 냉혹하게 평가하는 카이런 공작도 그녀를 드러나지 않게 아끼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측은함의 태반은 조금 심하게 말하면 좀 모자라 보이는 외딸을 어쩔 줄 몰라 하는 훈련대장의 정서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라는 목적이었다.

체이어스는 오히려 그래서 아리엘사를 더 안쓰럽게 여겼다. 카이런 공작이 유달리 인정을 발휘하는 대상이라니, 얼마나 측은해 보이면 저럴까 하고 말이다.

그 감정은 너무나 어이없이 깨어져 버렸지만 말이다.

체이어스는 아리엘사가 나무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실 깜빡 잊어버릴 뻔했다. 그때 행정관의 부패 고발이 들어와 관련된 정보를 끌어모으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는 아리엘사가 어디서 떨어지고 넘어지고 했다는 소리를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었던 탓에 이번에도 어디가 부러진 것이 아니면 무시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녀는 변했다. 그녀가 따려던 사과에 무슨 독이라도 들어 있었던지, 그녀는 그즈음부터 무심결에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다니고, 공작의 일에 간섭하고, 말대꾸하고, 크게 웃었다.

차를 타는 실력은 확실히 나아졌지만, 모든 게 조금씩 다 엇나가 있다는 것을 다들 알았다. 게오르그만이 그것을 격렬히 부정하려 해서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체이어스는 아리엘사를 은밀히 살피며 다른 것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달라지면서, 카이런 공작도 조금씩 함께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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