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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111/128)

100화

“아…….”

이런 선언을 이토록 사무적이고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 카이런 공작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하르펠 성으로 돌아가 모든 걸 바로잡고 돌아오겠어.”

나는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는 내 뺨을 지그시 눌렀다.

“아무 말 마. 잘 다녀오라고만 해.”

“하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떤 절망감이 여전히 내 몸에 남은 그의 따뜻한 체온과 섞이며 눈물만 만들었다.

“신방에 들기 전의 결혼을 취소할 수 있는 건 남부의 법도 동일해. 내가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야.”

“공작님.”

“레오르트 후작에 대해서라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배상금은 달라는 대로 주겠어. 싫다면 오랜만에 겨울 전투를 치르게 되겠지.”

“공작님…….”

그의 손바닥이 내 뺨을 쓸었다.

“내 고민은 끝났어. 아리엘사.”

그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더니 말했다.

“따라해 봐. 카이런.”

“…….”

“어서.”

“카이, 런.”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는 마치 몹시 즐거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나를 꽉 껴안았다. 그의 피부에서 내 온몸으로 전해지는 열기는 봄볕처럼 조금 따끔거리는 느낌이 났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가 말했다.

“앞으로는 그렇게만 불러. 감히 ‘위대한 그분’을 너는 이름으로만 불러야 하는 거야.”

이상했다.

나는 그가 마석을 하나 따로 숨겨두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말에 조금도 반대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인 것 같았다.

나는 주저하며, 그의 명령을 따르듯 말했다.

“카이런, 저는 무서워요.”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웃고 있었다.

“나도 무서워. 처음이야. 이런…… 나를 기쁘게 하는 두려움은.”

우리는 아침 식사를 거르고 점심 식사부터 해야 했다.

힐데의 식사는 여전히 맛있었고, 그는 뭔가 설레는 일이 있는 사람처럼 즐겁게 말했다.

“상처가 나으면 출발할 거야. 돌아오는 건 조금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기다려. 결혼식 준비 좀 생각해놓고.”

나는 그의 단순함과 뻔뻔함에 다시 한번 질리는 기분이었다.

결혼이라니, 지금 파혼하러 가는 주제에 천연덕스럽게 다음 결혼을 논하다니.

“결혼식 올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안 부끄러우세요?”

그가 컵을 탁 놓았다.

“하! 그건 네가 부끄러워해야지, 누구 때문에 내가 결혼식을 두 번이나 해야 하는데. 반성해, 부인.”

“……뭐라고요?”

“네가 내 짝사랑을 무시했잖아. 아니, 부인이.”

“…….”

나는 질겁하고 말았지만 어쩐지 그를 쳐다볼 수가 없어 창밖으로 급히 얼굴을 돌렸다. 내 얼굴은 급격히 달아올랐다.

짝사랑이라니.

말빨로 이 남자를 이길 수 없는 것은 분명했고, 결단력이나 추진력으로도 이 남자를 당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단둘이 어둠 속에 있을 때의 다정함에 대해서도…….

이미 모든 것이 내 손을 떠나 새로운 이야기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는 방관자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우리는 며칠째 아침도 아니고 점심도 아닌 식사를 했다. 침실에 있는 시간이 너무 늘어나서 곤란하다고 느껴질 때쯤, 카이런 공작은 내게 외출을 청했다.

“부인, 우리 썰매나 타러 가지.”

세상에, 그는 나를 눈도 깜짝하지 않고 부인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럴 때마다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공작님.”

“쯧.”

그가 혀를 차서 나는 얼른 말을 고쳤다.

“카이런, 성에서 쉬면서 얼른 요양을.”

그는 다가와 내 뺨을 슬쩍 꼬집으며 웃었다.

“뭐야, 내 부인은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내지 못해 안달이군. 혹시 내가 나가면 바람이라도 필…….”

카이런 공작은 제 말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이글이글 노려보기 시작했다.

내, 내가 뭘요?

나는 위험을 직감하고 뒷걸음질 쳤지만, 늘 그렇듯 그에게 바로 붙잡혔다.

“혹시, 부인은 향후에 바람을 피울 생각인가?”

나는 고개를 세차게 계속 저었다.

“아니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전혀 없어요!”

“흠…….”

그는 미심쩍다는 듯 나를 찌푸리고 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괜찮아. 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늘 내가 먼저 알고 있을 테니까. 준비하고 나가지.”

나는 침실 창이 열렸는지 창문을 바라보았다. 등골이 서늘한 기분 때문이었다.

하르펠 성에 있을 때도 그는 언제나 내가 어디서 누구와 뭘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내가 몰래 집을 사러 다니는 걸 다 알고 매물로 나온 집들을 다 가로채버렸다.

그때만 생각하면…….

나는 한숨을 쉬며 외출할 준비를 해야 했다.

단단히 차려입고 밖으로 나가니 마틴이 개 썰매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다 챙겨두었습니다. 공작님, 마님.”

카이런 공작은 내가 썰매에 오르도록 손을 붙잡아주었고, 나는 이제 익숙하게 썰매에 올랐다. 이번에는 이런저런 도구들이 실려 있었다.

카이런 공작은 즐거운 듯 썰매를 출발시켰다.

그는 우리가 거쳐왔던 설원의 숲 끝에서 썰매를 멈추었다.

그의 간단한 신호에 개들은 일제히 조용해졌고, 나는 영문을 몰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설피를 신더니 숲 끝으로 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숲 쪽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동상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숲 안에서 거대한 회색 덩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 곰! 카이런! 곰…….”

하지만 카이런 공작은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가 사냥 중인 것을 알았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내 던진 것은 짐승을 꿰어낼 고기 덩어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왜 하필 곰이냐고!

숲 언저리로 모습을 드러낸 회색곰은 그야말로 거대한 짐승이었다. 전에 본 마물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은 체급이었다.

‘혼자서 어쩌려고!’

그에게 썰매를 몰고 가려고 자리를 옮기고 있으니 카이런 공작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진짜!”

그때 곰이 네발로, 엄청난 속도로 카이런 공작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고, 그는 검을 뽑았다. 곰이 저렇게 빠른 동물이었다니!

-꾸우우웅

설산에서마저 메아리를 만들어내며, 곰은 비명과 함께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아리엘사, 부인!”

그가 기분 좋게 부르는 내 이름이 설원 위를 퍼지며 새 메아리를 만들었다.

“어이가 없어.”

나는 썰매를 몰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밧줄을 내려 곰을 묶어 썰매에 매었다.

“이걸 끌고 갈 수 있어요?”

“아마도?”

그는 잠시 찡그리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썰매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썰매의 속도는 걸어가는 것만큼이나 느렸다.

나는 헐떡이느라 짙은 입김을 내뿜는 개들과 눈 위에 붉은 궤적을 그리며 딸려오는 곰의 시체를 번갈아 보며 울상을 했다.

반면에 그는 들떠 있었다. 그는 마치 썰매가 최고 속력으로 달리는 것처럼 즐겁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썰매는 설성으로 향하는 얕은 경사가 시작되는 곳에서 멈추고 말았다. 나는 결국 곰 시체를 버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머…….”

눈 위에 검은 덩어리 몇 개가 새로운 지평선을 만들고 있었다.

저 멀리서 이동하는 세 마리의 거대한 동물은 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아는 소보다 반 배 이상이 더 컸다.

한 마리의 몸집이 유독 작은 걸 보니 새끼를 거느린 가족 같았다.

하지만 저 동물들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일 리 없었다.

“카이런……?”

“맞아. 북부 들소야.”

“멸종되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 삼십 년째 아무도 본 적이 없거든.”

“세상에, 잘 됐어요!”

카이런 공작은 잠시 썰매 고삐 대신 내 손을 붙잡고 나직이 말했다.

“아리엘사. 북부 들소가 돌아왔어. 하르펠의 땅에.”

나는 크게 끄덕여주었다.

“공작님 덕분에 마물이 없는 땅에요.”

썰매가 성으로 올라가는 오르막을 오르지 못해, 결국 우리가 내리고 썰매만 출발시켜야 했다. 우리는 걸어서 성으로 갔다.

나도 그새 추위가 조금은 적응이 되었는지, 전처럼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금방 본 북부 들소 가족처럼, 눈 속을 그와 함께 한 발씩 걸어가는 길에 설명하기 힘든 기쁨이 느껴졌다.

나는 이 세상 끝에서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의 순수한 행복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감사했다.

그는 곧 떠날 것이므로.

❄❅❄

성문을 들어서자 썰매에서 개를 풀고 있던 마틴이 소리를 쳤다.

“공작님, 혼자서 회색곰을 잡으셨다니요!”

“그러니까요. 다친 분이 말이에요.”

나는 내 옆에 선 카이런 공작에게만 들리게 투덜거렸다. 그는 웃기만 했다.

“마틴, 가죽을 잘 벗길 수 있겠나? 내 아내는 추위를 많이 타니 말이다.”

“물론입니다, 공작님! 최고의 선물로 만들어드립지요.”

카이런 공작은 드물게 크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또한 지금 행복함을 깨달으며 마음으로 감사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삼십 년이나 아무도 보지 못한 북부 들소가 나타난 사건은 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세계가 내가 모르는 곳이 되어가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씻고 돌아온 그는 술을 들고 내 방으로 찾아왔다.

“상처에 나빠요.”

그러나 평소라면 내 말을 들었을 법도 한 카이런 공작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아리엘사. 북부 들소를 보았어. 네가 그들을 데려온 거야. 축하하지 않으면 안 돼.”

그가 너무 아이처럼 들떠 있어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암. 북부가 마물에게 입은 상처에서 치유되고 있는 거니까.”

나는 그가 따라주는 술을 얌전히 마실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긴 밤을 보냈다. 식탁에서도, 그리고 침실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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