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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110/128)

99화

나는 가급적 그와 대화를 줄이려 하고 있었지만 그것까지는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빵을 먹고 음료를 마실 때쯤 완전히 밤이 되었다. 밤하늘이 쏟아부은 별빛은 눈에 부딪혀 세상에 은은한 아우라를 부여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고 중얼거렸다.

“북쪽으로 올수록 별이 더 커지나요?”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만 이미 뱉어버린 후였다.

그는 조용히 답했다.

“맞아. 내가 여기 있거든.”

나는 클클거리는 그를 째려보고 음료를 마셨다. 뜨끈한 온기와 술기운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공작님, 이 정원만 있으면 저 여기서 잘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카이런 공작은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 표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았다.

“저는 여기서 성을 지키고 있을게요. 그러니까……. 저는 여기서 갈 곳도 없잖아요? 그러니 하르펠 성으로 돌아가세요.”

“넌 참 지치지 않는군.”

그의 담담한 대꾸는 얄밉기만 했다.

“무슨 고민을 그렇게 오래 해요! 답 안 나오면 집으로 돌아가시라고요, 이 유부남!”

나는 카이런 공작이 무슨 날 선 소리를 해도 다 받아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뻗어 내 귓가의 머리를 귀 뒤로 넘길 뿐이었다.

그 느릿한 움직임이 너무 생생해서, 나는 입을 연 채로 가만히 있어야 했다.

“너, 내가 결혼식을 올린 게 내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날 강제로 결혼시킨 건 너였어. 그러니 너는…… 참 양심도 없지.”

“세상에!”

하지만 내가 뱉을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나는 무정한 별들만 바라보다가, 카이런 공작이 내 손에서 음료 잔을 빼앗아가고, 대신 그의 더운 손으로 내 손을 꾹 감싸 쥐는 걸 모르는 척해야 했다.

나는 나직이 말했다.

“하르펠을 이렇게 오래 비워두시는 건 위험해요. 아시잖아요.”

“체이어스가 알아서 할 거야.”

나는 처음으로 체이어스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여기 있는 걸로는 만족 못 하시는 건가요?”

“당연히.”

“욕심쟁이.”

그가 조금 놀라는 게 느껴졌다. 하기는, 지금까지 누가 감히 카이런 하르펠을 그렇게 불렀겠는가.

“훗.”

그러나 그는 작게 웃으며 내 손을 더 꾹 쥐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 목소리에는 울컥 울음이 섞여 나왔다. 그가 내게 이렇게 허용적으로 구는 게 싫었다. 그는 내가 ‘욕심쟁이’라고 불렀을 때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를 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언제나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은연중에는 내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며, 그래서 그의 세계의 법칙들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무서웠다. 그가 나를 옛 소꿉친구로 착각하는 편이 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세게 저으며 말했다.

“저는 잘하고 싶었어요. 다 행복하기를 원했다고요. 망치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럴 생각은…….”

“네가 뭘 망쳤다고 생각하는 거지?”

“…….”

“내 목숨을 몇 번 구한 걸로 만족이 되지 않는다면 좋아. 그러나 너는 하냐크 전에서 죽었을 아흔다섯을 가족들에게 돌려보냈어. 그리고 기발한 거래를 생각해내서 재해 복구를 원조했다. 하르펠에 너만 한 공신은 없는데, 너는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할 거지?”

“쳇. 도둑 누명 씌우셨으면서.”

“아.”

카이런 하르펠은 얄밉게도 또 웃었다.

“이제는 그런 것 못 해드려요. 더 아는 게 없거든요.”

“다른 걸 해줄 수 있잖아.”

나는 그가 꽉 쥐는 손이 아파서 저절로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정작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카이런 공작이었다.

“내가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게 해줄 수 있잖아. 나를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남자가 되는 것에서 구해줄 수 있잖아, 아리엘사.”

나는 울컥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두 손으로 내 뺨을 거칠게 감쌌다. 그리고 나를 코앞에서 노려보았다.

“내가 뭘 고민하는 것 같아?”

“…….”

“나는 너를 고민하는 거야. 네 사랑을 쟁취하는 건 내가 지금껏 치러보지 못한 전쟁이기 때문에. 네가 의지하는 남자가 되려면 대체……. 너를 영원히 가두지 않고는 나는 그 답을 알아낼 수 없는 건가?”

“그 고민은 제가 아니라-”

“-닥쳐. ……제발.”

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허덕였다. 그가 내게서 입술을 떼었을 때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는 나를 꽉 껴안고 속삭였다. 우리가 마시던 잔은 발치를 뒹굴고 있었다.

“건방져. 쬐그만 게 아주. 어설픈 주제에 잠시만 방심하면 달아나지. 게다가…….”

나는 이 상황에서도 조금 울컥했다. 카이런 공작은 나를 더 힘주어 껴안았다.

“말해. 나를 남자로 보지 않는다고. 내가 싫다고 말해.”

나는 그의 품 안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저 때문에 미쳐버리겠다는 사내도 못 알아보고, 제 마음도 못 알아봐. 그게 멍청한 게 아니고 뭐야.”

“…….”

나는 젖은 숨을 삼켰다.

“말해. 내가 싫다고.”

나는 그를 거칠게 떼어내고 말했다.

“싫어요. 저는 공작님이 싫어요! 세상 잘난 체하는 게 꼴사나워서 못 견디겠다고요.”

크게 뱉어낸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실은 나도 내가 그를 싫다고 말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품에서 얻은 체온은 내게 약간의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은 아기를 어르는 것 같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마치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라도 한 듯이.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미쳤나 봐.”

“아마도. 나는 방금 네가 뭐라고 말하는지 하나도 안 들렸어. 네 얼굴, 네 입술만 보였어.”

“…….”

“너는 겁먹고 있었잖아. 내가 네 말을 믿을까 봐.”

“저는……!”

“너는 거짓말도 어설퍼.”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순간 그럴지도 모른다고 눈동자가 흔들렸을 것이다.

그는 놓치지 않고 나를 몰아붙였다.

“인정해. 너도 나를 원한다고.”

“싫어요!”

“아리엘사, 시간 낭비하지 마. 나는……. 나는 이제 변할 수 없어. 너를 발견했으니까. 이건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비겁하게…….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라고 해요!”

눈앞은 눈물로 흔들렸다.

그는 산사태처럼 거대한 고백을 내 위태로운 결심 위에 무너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 때문에 또다시 나쁜 일이 일어나면-”

“-하르펠에는 늘 재앙이 일어나. 마물이, 추위가, 지진이, 산사태가. 늘. 나는 늘 그것과 싸워왔다. 그것이 내 삶의 이유였어. 앞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야.”

나는 머리를 마구 저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결연함은 나를 압도하고, 질리게 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해.”

폭탄을 터트리는 듯한 그의 요구에, 나는 홀린 듯 중얼거렸다.

“좋아……해요. 하지만.”

그는 나를 으스러트리려 했다. 그가 나를 너무 꽉 안아서 숨이 막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에다 더운 한숨을 연이어 쉬었다. 내가 멍하니 뱉어버린 ‘좋아해요.’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가 나를 안아 들며 내 몸이 붕 떠올랐다. 나는 그가 지금 침실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놔, 놔요, 공작님. 놓으시라고요!”

❄❅❄

눈이 쌓여 무서우리만큼 조용한 세상에서, 그의 숨소리만 들렸다.

나는 그의 더운 가슴에 뺨을 얹고 내가 태어난 이래로 가장 평온한 호흡을 잇고 있었다.

그가 내 머리에서 등을 느른히 쓰다듬었다.

그의 품이 어디까지 행복할 수 있는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내 마음이 지금 얼마나 아픈지도.

어젯밤 내가 얼마나 쉽게 무너졌는지는, 그리고 그에게 끌려가는 데 잠깐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이제 겨우 카이런 공작을 향한 내 마음을 인정하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결론을 더 확실하게 만들 뿐이었다. 내가 그를 진정으로 아낀다면 내가 해야 할 결정은 한 가지뿐이었다.

내가 그를 떠나서 그가 아내와 함께하도록 해주는 것 말이다.

그러나 내가 내 마음과 의지를 너무도 쉽게 배신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간단했다. 카이런 하르펠이라는 유혹자가 그 단단한 팔로 내 허리를 두른 순간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나는 내 무력함과 무가치함과 이 수치심이, 내 혀뿌리쯤에서는 단맛을 내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나는 이제 그를 욕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에게서 나를 떼어낼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다시 가볍게 당기고는 내 머리카락에다 숨을 불어넣듯 말했다.

“나를 미워할 건가?”

“안 그럴 줄 아셨어요?”

못되게 속삭였지만 그는 목구멍으로 웃었다. 그의 가슴에서 호흡과 소리가 울리는 감각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늘 매운 말을 내뱉는 것은 카이런 하르펠 쪽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퉁명스러운 말만 뱉고 있는데도 그는 웃기만 했다.

언젠가 한번 욕을 해봐야지, 그래도 그가 웃는지.

나는 그런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그의 가슴에 뺨을 비볐다. 그의 더운 피부가 내게는 원래 태양이 잠들어 있다 낮을 만들기 위해 떠난 보금자리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내 몸을 떼어내더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나란히 누워 마주 보아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자, 그는 그것을 신중하게 걷어내 머리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내 눈을 들여다보는 게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인 것처럼 내 뺨을 슬쩍 꼬집었다.

“아리엘사 로크만. 우리 이제 상황을 정리하지.”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사무적으로 변해서, 나는 잠에서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말투는 하르펠 성 집무실에서 체이어스나 나에게 명령을 내릴 때의 것이었다.

“너는 이제 내 여자야. 나는 네 남자고. 앞으로 이 사실은 바뀌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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