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109/128)

98화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얼어 있었다가 겨우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호들갑 떨지 말고 자.”

“흐…….”

나는 눈을 꽉 감았다. 지금 남자 허벅지를 베고 있는데 호들갑을 떨지 말라니.

그는 끙끙거리는 나를 퍽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젠장, 방금까지 좋았는데.”

하지만 그는 입으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움직이지는 않았다.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어서 천천히 머리가 굴러떨어지듯이 몸을 뺀 다음, 벽난로 쪽으로 한 바퀴 굴러 돌아누웠다. 그를 돌아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카이런 공작은 짧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딱 그렇게 반응할 걸 알았지만, 생각보다 불쾌하군.”

“하…….”

나는 입만 쩍 벌렸다.

‘지금 내가 잘못한 거야?’

하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카이런 공작님이 불쾌하시다는데 감히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의 다음 말에는 경악하고 말았다.

“흥, 남의 첫 키스를 빼앗아 간 주제에.”

“무슨, 그게 무슨……!”

나는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앉았다.

하지만 그 방에서 흥분한 건 나뿐이었다. 그가 나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얼굴이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게 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쥐어짜듯 주먹을 쥐고 소리쳤다.

“유부남 주제에!”

카이런 공작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묵직하게 말했다.

“내가 결혼식 때 그녀에게 한 키스는 찻잔에 입술을 대는 것과 똑같았어. 너한테 했던 그런……. 아리엘사, 내 진짜 ……를 무시하다니!”

나는 기가 차서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그의 진짜…… 뭐? 말하지 않고 넘어간 저 침묵은 뭐란 말인가?

그는 정말로 자기가 화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오해하는 모양이니 바로잡아주지. 첫날밤을 치를 때까지는 결혼식은 끝난 게 아니야. 나는 분명히 피로연도 마치지 않고 성을 나왔다. 바로 너 때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말도 안 되는 말이라 반박할 말이 더 떠오르지 않았다. 방 안에는 어색한 정적만 감돌았다.

그는 간밤에 눈이 소복이 쌓인 창밖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아침을 같이 먹자고 하면 체할 것 같은 얼굴이니 포기하지. 식사하고 정원으로 나와.”

연이은 정신적인 마비 증상 때문에, 나는 그가 나간 문이 쿵 닫힌 후에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아니, 왜 다 자기 마음대로……!”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이 땅의 누구에게든 명령할 위치였다. 둘만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잠들었던 빈 침대를 멍청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

“…….”

아침 식사를 들여주며, 힐데는 내 얼굴을 흘끔 보았다. 나를 정원 눈 속에 파묻힌 돌멩이 보듯 하던 그녀가 그러는 것은 의외였다.

멍청하게 앉아 있는 내가 그녀에게도 몹시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저기, 힐데.”

“예. 마님.”

“여기는 눈이 언제쯤 녹아?”

힐데는 무슨 소리냐는 듯 대답하고 나가버렸다.

“세상이 망하면요?”

나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고 식사를 마친 다음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으로 향하는 길은 마틴이 눈을 파내 뚫어놓아 좁은 터널 같았다.

카이런 공작은 이미 나와 정원 입구에 서 있었다. 외투를 어깨에 대강 걸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옷차림이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발끈해서 소리치고 말았다.

“다친 분이, 적어도 오늘은 방한용 케이프를 입고 나오셨어야죠! 이렇게 추운데!”

카이런 공작은 한쪽 입꼬리를 삐뚤게 그어 올리고는 나를 미묘하게 내려다보았다.

“착하네. 식사하고 바로 나오고. 날 걱정해주는 건가?”

“거야, 다치셨으니까…….”

내 궁색한 변명은 붉게 달아오른 내 뺨의 배신으로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카이런 공작은 내 손을 붙잡아 정원의 한 귀퉁이로 데려갔다. 마치 뜨거운 돌을 던진 것처럼, 눈에 구멍이 난 자리가 있었다.

“저기.”

나는 그의 손끝을 따라 정원의 다른 귀퉁이를 바라보았고, 그는 품에서 어제 꺼내 온 마석을 그 자리에 던졌다. 곧 정원의 네 귀퉁이에 마석이 놓였다.

“이제 저리 가.”

아주 사람을 오라 가라.

나는 삐진 채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카이런 공작의 아우라의 색이 일렁인다 싶더니 마치 그의 몸에서 오로라가 뻗어나가는 듯 흔들렸다.

“……!”

그는 한 손을 정원을 향해 뻗고 무언가를 입속으로 외고 있었다. 정원에는 커다란 바람의 소용돌이가 일었고, 그 바람 끝에는 놀랍게도 온기가 감돌았다.

순식간에 눈이 녹으며 정원에 심긴 사철나무 관목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기는 봄처럼 따뜻했다.

“세상에…….”

카이런 공작은 내게 다가오며 내 경악한 얼굴을 즐기듯 웃었다.

“마법……? 마석으로 마법을 쓰신 거예요? 그런 말은 없었는데?”

원작에는 그런 말은 없었단 말이다!

원작에는 카이런 공작이 인간들의 욕망을 끌어들이는 마석 때문에 마법을 혐오한다는 묘사 뿐이었다.

“내 병사들이 마물을 잡으러 가서 얼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나?”

“아니……요?”

“훗.”

세상에.

하기는, 인간의 한계를 비웃는 듯한 추위와 싸우는 것만도 힘겨운 이 땅에서, 끔찍한 마물과 싸워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들리긴 했다.

그는 직접 마석을 이용해 마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병사들을 지켰던 것이다.

북부인들의 그에 대한 경외감을, 나는 이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내 놀라움을 무심하게 흘려보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마물이 지긋지긋해. 마석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널 위해서라면 한번쯤…….”

카이런 공작은 살짝 헛기침을 하며 나를 외면했다. 그의 뺨에 살짝 혈색이 도는 건 갑자기 푸근해진 공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서 머리를 저으며 물었다.

“저한테 정원을 만들어주시려고……. 그래서 마물을 사냥하러 가셨던 거예요?”

“온실을 그리워했잖아.”

그리고 그는 조금 분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러면 네 방으로 쳐들어갈까를 매일 수백 번쯤 고민할 필요가 없지. 따뜻한 정원이 있다면 너는 안 나오고는 못 배길 테니까. 나는 여기서 기다렸다 잡기만 하면 되고.”

“제가 무슨 토끼예요!”

내가 발끈하는데도, 카이런 공작은 눈을 휘어 웃었다.

“그래. 지금 그런 얼굴을 하면 토끼 같아.”

그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야말로 봄같이 따뜻하고 포근해서, 나는 반박하지 못하고 벤치에 앉았다. 그동안 눈에 파묻혀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었다.

“허브를 구해줄까?”

그의 조용한 목소리에 나는 더 화를 낼 수 없었다.

“드시고 싶은 차 있으세요?”

“아니. 너는 내가 성질을 개같이 부려도 화를 내지 울지는 않으니까, 차는 됐어. 네가 키우고 싶을까 봐 물어본 거야.”

차가 필요 없다는 그의 말은 내게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카이런 공작은 이제는 나를 자신의 소꿉친구 아리엘사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성질 나쁜 자신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다.

입술이 불에 덴 기분이 들었다.

“……!”

내게서 입술을 떼어낸 카이런 공작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대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차보다는 이게 백 배는 효과가 좋아. 아니, 천 배쯤…….”

“그, 그런 말은…….”

“더 적나라한 표현을 원한다면-”

“-아, 아니요! 그게 아니고……!”

나는 눈을 내리깔며 기어들어 가듯 속삭였다.

“아니에요.”

카이런 공작은 클클 웃었다. 어느 틈엔가 그는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우리는 눈이 녹은 물기로 질척거리는 이질적인 정원을 잠시 바라보았다.

만년설에 파묻혀 있다 드러난 듬성듬성한 정원은 객관적으로는 아름답다고 할 만한 광경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이 경이를 말없이 감상했다.

카이런 공작이 내 손을 가져가더니 손끝을 툭 꼬집듯 잡아당겨 단번에 장갑을 벗겼다.

그는 내가 손을 빼어가지 못하게 조금 힘을 주고는, 몹시 신중한 얼굴로 내 손바닥과 손목에 안쪽에 입을 맞췄다.

눈을 감고, 차근차근 공을 들여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내 피부는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에도 마석의 힘이 옮아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마법이라도 걸린 듯 몸을 움직일 마음이 사라진 것이었다.

입술을 뗀 그는 내 영혼이라도 끄집어내려는 듯 내 눈에 초점을 맞춰왔다.

앞으로 그에게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을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지독히 두려웠다. 그가 내 마음을 다 알아버리면…….

다행히도 그는 이미 필요한 것을 확인했다는 듯, 나를 응시하는 채로 미소를 지었다. 깊고, 단 미소였다.

그는 무거운 한숨을 한번 쉬고는 다시 내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나는 그저 눈을 감아야 했다.

정원에 깃든 마법의 봄처럼, 우리의 키스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했다.

❄❅❄

며칠 만에 정원은 놀랍게 변했다. 마법이란 정말 마법 같았다.

카이런 공작이 마석으로 온기의 마법을 걸어놓은 정원은 낮에는 봄같이 따뜻했고 밤이 되면 여름밤처럼 약간 서늘한 정도였다.

따뜻한 기온이 계속되자 있는지도 몰랐던 식물들이 싹을 틔워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름을 모르는 붉고 노란 꽃들과 의사 선생에게 배웠던 약초들도 있었다. 관목에도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 설성에도 진짜 봄이 깃든 적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 꽃모종을 종류별로 옮겨 심거나 잡초를 뽑고, 가지를 치다보니 금방 며칠이 지나갔다.

카이런 공작은 벤치에 앉아 그런 나를 구경하곤 했다.

그가 나타나면 나는 손을 부지런히 놀리면서도 머릿속이 심란해졌다. 그를 돌려보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가 져 가기에 이제 돌아가려고 일어났더니 힐데가 음식 바구니를 들고 왔다.

카이런 공작은 바구니를 받아 벤치에 펼쳤다. 소가 들어간 빵과 따뜻한 발효음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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