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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108/128)

97화

그러자 그가 차가운 손으로 내 뺨을 쓸었다. 그는 그런 몰골로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기분 좋군. 너를 걱정시킬 수 있다는 게 즐거워.”

나는 그의 팔을 떼어내고 실내로 잡아당겼다.

“얼른 와요!”

치료를 하려 해도 먼저 씻어야 했다. 힐데는 이미 목욕물을 준비해두었고, 카이런 공작은 내 앞에서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그는 나를 흘끔 돌아보고는 웃음을 섞어 말했다.

“계속 노려볼 거면 차라리 씻겨줘.”

“그게 아니라, 수건이라도 두르세요!”

“흠.”

그는 퍽 아쉽다는 소리를 내며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신음을 내며 몸을 살짝 숙였다.

나는 놀라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옆구리에 난 긴 상처는 발톱에 할퀸 것 같았다.

“세상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전에 제가 봄사냥 때 공작님을 살폈던 것 기억하세요?”

“음, 눈을 번뜩이면서 나를 노려보던 날 말이지.”

“헉…….”

카이런 공작의 기억 속에는 내가 그따위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공작님은 그날 낙마해서 몸에 흉터가 생기기로 되어 있었어요. 바로 이 자리에요.”

“…….”

카이런 공작은 물을 줄줄 흘리며 팔을 꺼내 내 턱을 쥐었다. 나는 그의 눈을 외면하고 싶어도 시선을 내리까는 게 다였다.

“그날 나는 네 덕에 아무 사고도 당하지 않았어. 그리고 오늘 이건 내가 만든 흉터야. 그 두 개는 달라.”

“하지만…….”

“네가 아는 루엘라와 내가 아는 루엘라도 같은 사람이 아니야. 그녀가 네가 설명한 것처럼 나를 지극히 사랑했다면, 그녀는 레오르트 후작의 사주로 나를 기만하지 않았을 거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너에게 도둑 누명을 생각해내는 대신 존중했을 것이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르펠가는 거짓말로 원하는 걸 얻어내는 인간을 존중하지 않아.”

“그건…….”

“또 네 탓이라고 하려고? 모든 걸 한 가지 방법만으로 설명하려 드는 건 바보들이 하는 짓이야.”

그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말했다.

“한때는 네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네가 말한 재앙 따위를……. 하지만 그것은 네가 곁에 있을 때 가능한 얘기였다. 지금은 달라.”

역시 말로는 이 남자를 당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다루는 방법을 그동안 조금은 배운 것 같았다.

내 턱을 쥐고 있는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두 손으로 감싸 당기자, 그의 팔은 내 명령을 따르듯 힘없이 떨어져 나왔다.

나는 그의 팔을 욕조에 담그고 그의 상처 주변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안 되겠어요, 조금 누워보세요.”

카이런 공작은 안도감이 담긴 한숨을 쉬며 시키는 대로 몸을 담갔다. 나는 그의 상처에 물이 덜 닿게 하면서 머리부터 몸을 씻겨주었다.

힐데가 준비해둔 약으로 그에게 붕대 처치까지 끝내고 나서, 잠옷까지 입힌 다음 의자에 앉혔다. 머리를 닦기 위해서였다.

그는 말없이 그 과정을 즐기는 듯 보였다.

그의 머리에 수건을 덮고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조물조물 주무르자, 예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도 그랬을까, 불쑥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네가 아리엘사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어.”

카이런 공작에게서는 이제 습기와 향기가 함께 느껴졌다. 나는 내게 머리를 맡기고 몸이 조금 흔들리는 채로 하는 말이 허세처럼만 느껴졌다.

“네, 그러시겠죠.”

“아리엘사는 내 머리를 빨래하듯 짜냈거든. 내가 성질을 부린 날에는 쥐어뜯는 것 같았지.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

“나는……. 네가 조물조물 만져주는 손길이 좋아. 머리부터 피로가 다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세상에 무거운 일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

그가 말꼬리를 조금 수줍게 흐려서,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수건만 뒤집었다.

이건 좋지 않았다. 이렇게 다정하게 굴고, 속을 내보이고, 소탈한 한 사람의 남자처럼 다가오는 건 위험했다. 고약했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기서 버텨야 하는 사람은 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머리를 털어 말린 다음 말했다.

“다 됐어요. 오늘은 푹 쉬세요.”

“다 됐나?”

그가 한 말을 또 확인하는 일이 드물어서, 조금 의아하게 대답했다.

“네.”

그러자 그는 활짝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푹 쉬어야겠군.”

“공작님……?”

카이런 공작은 자신의 침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가 잠옷 차림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복도 끝에 있는 것은 내 침실이었다.

나는 놀라서 그의 팔을 붙잡았는데, 놀랍게도 나는 그에게 매달려 썰매를 타듯 바닥에 질질 미끄러지며 끌려갔다.

“공작님?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쉬러 가. 나는 저 방에서 쉬고 싶어. 거기 가야 푹 쉴 수 있을 것 같아.”

“미쳤나 봐!”

“너만 할까. 훗.”

나는 잠시 후 결국 내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며 서 있어야 했다.

그는 몹시 편안하다는 듯 누워서 눈을 감은 채 침대 옆자리를 탁탁 치며 말했다.

“올라와.”

“공작님!”

“간호해.”

“도대체……!”

나는 지금 상황에서 그에게 던지기 적당한 막말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눈을 뜨더니 팔베개를 하고, 몹시 즐거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나는 홀린 사람처럼 침대로 가야 했다.

나는 침대 위에 앉아서 큰 한숨을 쉰 다음 물었다.

“마물에게 입은 상처를 보통 약으로 치료해도 되는 거예요?”

“힐데가 준 건 보통 약이 아니야. 혹시라도 다음에 보통 상처에 쓸 생각 마. 온몸이 퉁퉁 부을 거다.”

“마물이 없어진 지 오래인데 다행히 약이 있었네요.”

“……열이 나는 것 같아. 간호하라는 것, 농담 아니야.”

나는 놀라서 그의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다행히 체온은 정상이었다.

“괜찮아요. 제가 밤새워 지켜볼게요.”

“또 코 골려고. 모베일에서처럼.”

“안 골아요! 쳇. 장작 더 넣고…….”

내가 침대에서 빠져나가려 했을 때 내 몸은 푹 기울어졌다. 나를 잡아당긴 카이런 공작이 내 위를 덮치듯 누르고 있었다.

막 씻은 그의 촉촉한 머리카락에서 향유의 향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의 눈빛 또한 촉촉해서…….

“눈 떠.”

카이런 공작은 내 양 손목을 바닥에 누른 채로 속삭였다. 하지만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힘겹게 감은 눈을 뜨면, 두려운 모든 것이 다 현실이 되어 닥쳐올 것 같았다.

“눈 안 뜨면 키스할 거야.”

나는 번쩍, 눈을 부릅떴다.

이성이 격하게 반항할 때라고 말했지만, 내 마음속의 다른 목소리가 그러다 그의 상처를 때리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그가 아프게 될 거라고 말이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얼굴은 이미 내가 초점을 잡을 수 있는 거리보다 가까이 와 있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부드럽게 닿았을 때, 나는 눈을 더 크게 떴다.

그리고 카이런 공작이 머리를 들었다. 그는 초점 잃은 내 눈을 보고는 조금 한탄하는 듯한 한숨을 쉬며 내 위에서 내려갔다.

나는 말을 그러모으는 데 시간을 오래 써야 했다. 눈물이 날 듯도 하고 고함을 치고 싶기도 한 것은 아마도 그의 기습적인 키스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당황이나 충격이나, 쾌감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의 부드러운 접촉은 내 몸을 잠시 마비시키고, 내 이성을 잠시 멈추게 했다. 그것은 그저 두려움이나 충격 같았다.

키스란 게 원래 이런 것은 아닐 텐데…….

카이런 공작은 조용히 말했다.

“눈을 뜨면 안 하겠다고는 하지 않았어.”

“…….”

내가 좀비처럼 일어나 벽난로로 가자, 카이런 공작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장작을 넣고 일어났을 때, 컴컴한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 카이런 공작이 검술을 연마하며 정원을 밟아놓은 흔적도, 동굴 앞에서 마물의 피를 씻어낸 흔적도, 저 눈이 모두 지워가고 있었다.

그것은 북부의 마법이었다. 북부에는 마법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의 방으로 가서 자야 할까 고민하며 침대로 돌아갔을 때, 그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가 자는 척한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곁으로 갔다. 하지만 그의 숨결은 골랐고 짙고 아름다운 속눈썹은 미동이 없었다.

평화로운 그의 옆얼굴 선은 이 설산이 자리한 산맥보다 굳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의 따뜻한 피부로, 저절로 손이 갔다.

나는 그의 이마를 다시 짚어서 확인한 다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내리는 눈을 다시 응시하고는 그를 미워하려고 노력해보았다.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고, 사랑해야 할 여자를 미워하고, 잊어야 할 여자를 사랑하는, 그런 엉망진창인 그를 한심하게 여기며 싫어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눈이 세상의 소리를 파먹어가는 동안, 오히려 동굴에서 내가 그를 잃었을까 봐 느꼈던 깊은 두려움과 절망감만이 생생해졌다.

내 입술에서는 앞으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미묘한 더운 여운이 매 순간 되살아나며 괴롭게 맴돌았다.

나는 왜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하는 키스를 입술을 훔친다고 말하는지 깨달았다.

내 입술은 이제부터 말을 뱉는 용도로는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는 스러지고, 따끔거리고 얼음 같은 감각만이 맴돌았다. 손끝으로 슬쩍 눌러보면 내 입술이 남의 것만 같았다.

나는 소파로 가서 누웠지만 공기가 조금 서늘해서 벽난로 앞으로 갔다.

카펫 위에 눕자 금방 잠이 쏟아졌다.

‘그런데 저 인간은 참 잘 잔다…….’

❄❅❄

나는 약간의 한기에 뒤척이다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눈을 떴을 땐 나는 카이런 공작의 허벅지를 베고 있었다.

“조금만 있어. 장작을 더 넣지.”

“…….”

나는 죽은 척을 하는 벌레처럼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내가 왜? 언제?

그러나 그는 내 머리를 몹시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빠져나가더니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돌아왔다.

마치 뱀이 빠져나갔다 들어오듯, 그는 아주 정제된 몸놀림으로 다시 내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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