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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107/128)

96화

그중 어느 것이 카이런 공작의 것일까 봐, 나는 손바닥이 푹 파이도록 밧줄을 꽉 쥐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이대로 더 기다리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장면은 원작에 없었다. 이미 줄거리는 폭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주가 갑자기 마물의 땅에 뛰어들어 죽어버리는 엔딩이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패닉이 올 것 같았다.

나는 딴 데 정신을 팔기 위해 밧줄을 정리해서 감았다. 그렇게 해두면 밧줄을 아래로 던졌을 때 중간에 엉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못 돌아오면……?’

마물보다 더 불길한 생각이 나를 덮쳤다. 그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니 내 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이런 공작이 없는 세상이라니,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가 없으면……. 나는 그가 없으면…….

나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꽉 악문 채 차가운 바위를 붙잡았다.

힘 조절이 되지 않는 내 손가락은 바르르 떨렸고, 악물었다고 생각한 이도 맞부딪히고 있었다.

고요한 바위 동굴 안에서, 나는 그가 없는 세상을 체험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나는 밧줄 더미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크가아악

사나운 포효가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무언가가 바위벽에 던져지는 진동이 전해졌다.

나는 재빨리 바위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피투성이가 된 카이런 공작이 거대한 오우거를 닮은 마물과 싸우고 있었다. 그의 검도 그것의 피부를 한 번에 벨 수는 없는지, 그는 마물의 어깨를 집중해서 노리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고함쳤다.

“공작님!”

“아직이야!”

지금 당장 밧줄을 내려서 그를 데려오고 싶은데, 그는 그러지 못하게 했다.

그때 뒤에서 처음의 개를 닮은 마물 하나가 더 나타나 카이런 공작을 덮쳤다. 셋은 한 덩어리가 된 채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

그때 내 심장은 잠깐 멎었을 것이다.

마물의 고통스러운 포효가 멀어졌다.

세상은 완전히 정지한 듯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뚜벅뚜벅 그가 바위 우물 아래로 돌아와 나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정지한 세상이 와장창 부서졌다.

나는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아무런 의식 없이 밧줄을 바위 구멍으로 집어 던졌다.

밧줄을 타고 오르는 카이런 공작은 마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탁하고 진득한 피를 줄줄 흐를 만큼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 올라와서, 나는 겁에 질려 바위 구멍에서 물러났다.

-크가악

카이런 공작은 끔찍한 몰골로 바위에서 내려섰지만, 늘어뜨려진 밧줄은 팽팽한 채로 움찔거리고 있다.

내가 겁에 질려 그를 바라보았을 때, 카이런 공작은 마물보다 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바위 우물 앞에 털썩 앉았다. 그는 숨을 돌리며 바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에 기겁해서 비명도 못 지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바위 안에서 오우거를 닮은 마물의 머리가 솟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카이런 공작은 일어나 검을 휘둘렀다.

짧은 크엑 소리와 함께 괴물의 머리가 바위 앞에 툭 떨어졌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제야 카이런 공작은 침음을 내며 밧줄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는 겁에 질린 나를 바라보다가, 땅에 뒹구는 마물의 잘린 머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얼른 그 머리를 집어 바위 우물 안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밧줄을 잘 정리해 밖으로 나갔다. 나는 놀라서 흐른 눈물을 닦으면서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우리가 썰매가 매어진 나무 근처로 돌아가자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얼마나 사납던지, 개를 묶어놓은 나무가 흔들려 눈이 뿌려졌다. 개들에게는 마물의 피가 견디기 어려운 듯했다.

카이런 공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절벽 근처로 멀어졌다.

그는 절벽 아래에 쌓인 거대한 눈더미를 보더니 거기에 앉아 눈을 문질러 피를 씻어내기 시작했다. 눈은 금방 붉게 더러워졌다.

나는 그때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공작은 눈으로 얼굴을 씻어내더니 나를 째려보았다.

“그 정도야?”

“……네?”

“한 번쯤은 너와……. 됐어.”

나는 멍청하게 머리를 저었다.

한 번쯤 나와, 뭘 하고 싶었다는 거지? ……설마 마물 사냥?

나는 멍한 채로 그에게 걸어갔다.

이제는 나는 그가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위대하거나 멋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멍청이! 이 멍청이!”

내가 눈을 퍼서 던지며 고함치자 얼굴에 눈을 맞은 카이런 공작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멍청이라는 말은 그가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을 말이었다.

그는 깨끗해진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내게 자기 주변의 깨끗한 눈을 뭉쳐 집어 던졌다.

나는 그의 눈덩이를 가슴에 맞고 놀라서 잠시 멈춰 있다가, 불쑥 오기가 났다. 그래서 두 손으로 눈을 제대로 뭉쳐 던졌다.

카이런 공작은 내가 던진 눈덩이를 팔로 막더니 눈을 마구 퍼서 내게 뿌리기 시작했다.

“으으으!”

우리의 눈싸움은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더 이상 숨이 차서 눈을 던질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눈 위로 벌렁 누워버렸다. 이제는 몸에 열이 나서 별로 춥지도 않았다.

“하……. 하하…….”

허탈한 웃음 끝을, 카이런 공작이 이어서 웃었다. 몹시 즐겁다는, 목구멍으로 웃는 웃음이었다.

나는 내 옆에 털썩 누워버린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주변의 눈이 여전히 붉게 물들고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다친 데는요?”

“아리엘사, 나는 ‘마물을 방벽 너머로 물리친 자’다.”

네, 네. 알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얄밉게 대답했지만, 또 다른 마음속에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나는 마물의 피로 젖은 그의 몸을 보며 그가 왜 케이프를 버리기 싫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마물이랑 싸우는 건 늘 이래요?”

“대부분은. 제대로 된 북부 남자가 되려면 비위부터 길러야 해. 북부 음식이 맛이 없는 건 실은 그런 이유라고. 훗.”

나는 그의 입가에 걸린 웃음을 보며 핀잔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웃음이 나와요?”

그는 놀이의 즐거움을 넘어서 조금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너와 이렇게 논 게 얼마 만인지…….”

내 몸을 보호해주던 열기가 순간 파스슥 식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저는 그 아리엘사가 아니에요.”

그의 추억 속 눈싸움은 카이런 공자가 단단한 눈덩이를 아리엘사에게 던지고, 그녀가 울며 아빠에게 달려가는 걸로 끝났다.

그러면 게오르그는 몹시 난감한 얼굴로 딸을 까꿍 비슷한 짓으로 어르려 했고, 아리엘사는 오히려 그 얼굴이 무서워 울음을 터트렸다.

내 얼굴을 본 카이런 공작은 어두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잠시 착각한 것뿐이야.”

지금은 화를 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공작님은 착각을 그친 적이 없으세요. 추워요, 우리 얼른 돌아가요.”

내가 일어나자 카이런 공작이 누운 채로 내 팔목을 잡아 넘어뜨렸다.

다시 눈에 주저앉은 나는 팔목을 빼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자기를 바라볼 때까지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결국 고개를 돌리자 그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내 친구 아리엘사는 죽었어. 나는 그녀를 위해 풍등을 날렸고. 너는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을 가진 이방인일 뿐이야. 그런데 너는 내가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주지 않아.”

“제가 언제…….”

“너는 내가 멀리서 온 새 아리엘사를 만날 기회를 주지 않았어. 도망갈 궁리 뿐이지.”

“아파요. 놔주세요.”

그가 내 팔목을 잡은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추웠고, 이제는 정말로 아팠다.

그는 내 표정이 일그러지자 신경질적으로 손을 놓았다. 그리고 앉아서 몸에 눈을 문질러 마물의 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곁에 다가가 깨끗한 새 눈을 퍼서 그의 등을 문질러주었다.

그는 뜻밖인 듯 조금 멈칫했지만, 나를 내버려 두었다. 마치 목욕할 때 내게 등을 맡기던 것처럼.

우리는 주변의 눈을 거의 다 망쳐놓은 후에야 그 자리를 떠났다.

우리가 가자 개들은 여전히 무섭게 짖어댔지만, 그가 휘파람을 불며 선두 개를 노려보자 곧 조용해졌다.

카이런 공작은 품에서 시커먼 돌멩이 네 개를 꺼내 썰매 안에 던져놓았다. 아기 주먹만 한, 매끄러운 석탄같이 보이는 것이었다.

내 시선에 그가 대답했다.

“마석이다.”

“이게요?”

“아주 지긋지긋한 물건이지.”

“이걸 구하러…….”

“훗.”

카이런 공작은 대답 없이 고삐를 붙잡았다.

“…….”

그리고 그는 잠시 굳었다. 내가 내 케이프를 벌려 그의 등을 뒤에서부터 안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털 케이프 안에 함께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몸을 적신 축축한 냉기와 내 온기가 섞였다.

카이런 공작은 기분 좋은 듯 목구멍으로 웃으며 썰매를 출발시켰다.

❄❅❄

성으로 돌아가자 마틴이 바로 문을 열었다. 개가 짖는 소리에 우리 도착을 미리 안 것 같았다.

카이런 공작은 썰매를 마틴에게 맡기며 말했다.

“정원에 심어.”

그의 몰골은 실내에 들어와서 보니 더 엉망이었다. 마물의 피로 젖은 외투도 버려야 할 것 같았다.

현관에서 더러운 옷을 벗어놓는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육성으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씨…….”

얼떨결에 그런 행동을 한 건, 내가 정말로 그를 편안하게 대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자각하기 전에,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카이런 공작의 옷을 벗겼다.

카이런 공작은 내가 자기에게 덤벼들어 옷을 벗기는 것에 대해 농담이라도 하려는 얼굴이었다가, 현관에서 자기 다리까지 이어지는 핏자국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다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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