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장난감 주제에 할 수 있는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내 구슬림에 넘어올 사람이 아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 내가 절망에 무너지더라도 내 곁을 묵묵히 지킬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저주를 당할지언정 나를 버리는 선택을 하지 않을 자였다.
언젠가 남부의 장미에게 향해 나를 감동하게 했던 그 고집과도 같은 순정은 돌연히 일어난 사고를 당한 듯 이제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의 열쇠를 그가 쥐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오롯이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처음 보는 그의 미쳐버린 눈빛에 겁을 먹기는커녕 떨리는 내 심장은 줄기차게 내 이성과 양심을 배신하고 있었고, 내 머리는 내가 이 세계의 재앙이 되기를 격렬히 거부했다.
내 마음은 반으로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또 하루가 지났다.
1월 달력 같은 설성의 풍경은 고요했고, 매일 조금씩 달라지면서도 하루도 똑같지 않았다.
아름다운 침실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나는 우울증에 걸려 죽어가는 원작의 루엘라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의 말이 떠올라 고개를 젓게 되었다.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조금만 더 절망해. 나를 떠날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만 무력하게. 너무 외로워서 나라도 필요해질 정도로만 깊이.”
나는 여자 주인공이 아니다. 내가 우울증에 걸려서 어쩌자는 건지.
카이런 공작은 매번 힐데를 보내 내게 식사를 청했다. 그러나 나는 거절해야만 했다.
그가 내게 키스하려던 때가 떠올라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와 단둘이 남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새하얗게 되는 기분이었다.
그가 내 팔을 꽉 붙잡은 압박감과 그의 숨결이 먼저 내 입술에 와닿던 느낌 따위는…….
내가 만남을 거절하면 그는 정원에 나타났다.
때로는 허리까지 쌓이기도 하는 눈을 마틴이 치우고 나면, 그가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내 침실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나는 창을 열기도 두려운 가혹한 외기에서, 그는 마치 추위와 전쟁을 치르듯 격렬하게 검무를 추었다.
그런 그는 강해서 더 아름다워 보였고, 그가 치르는 희생은 흰 입김뿐인 듯 보였다.
그가 내뿜은 열기에 땅은 곧 녹아 칙칙한 땅의 색깔을 드러냈다.
나는 그가 드러내고야 마는, 여전히 언 검고 질척한 땅을 바라보기 힘들어서 창가에서 고개를 돌리곤 했다.
마치 그가 자기 가슴속 심경을 파내어 보여주는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훈련이 끝나면 그는 잠시 멈추어 내 창을 바라보다가 돌아가곤 했다.
나와 시선이라도 만나기 위해 눈 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그를 바라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탈출도 불가능한 곳으로 끌려온 포로는 나인데, 가장 불행한 사람이 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부당했다.
점점 내 인내심도 바닥났다.
어느 낮에, 나는 용기를 내어 중무장을 한 채 정원으로 나갔다.
바람을 몹시 쐬고 싶었기도 하고, 바깥이 가혹하게 춥다면 그에게 더는 여기서 훈련하지는 말라고 그에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카이런 공작이 밟아놓은 자리에 서서 보니 내 창가가 잘 보였다. 눈 좋은 그라면 내 표정까지 다 읽었을 것 같았다.
문득, 내가 만들려던 ‘거리’에 대해 떠올랐다.
‘이것이 우리에게 적당한 거리인지도 몰라.’
“정원이 그립나?”
돌아간 줄 알았던 그가 외투를 어깨에 걸치기만 한 채로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면 나를 만나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었나?”
나는 흠칫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잠재우며 말했다.
“정원에, 산책을 하러 왔어요.”
그는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내 턱을 들어 자신을 보게 했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오랜만에 보네. 이 고집쟁이.”
내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자 그가 빈정대듯 말했다.
“나보다 정원이 더 보고 싶었다라…….”
카이런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내 멱살을 가볍게 쥐었다. 나는 겁에 질려 숨을 멈추었지만, 그는 털이 두툼한 내 케이프 앞섶을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꼭 여며주었다.
“든든하게 입은 것 같군. 따라와.”
그를 따라 성 마당으로 나가자 마틴이 개 썰매를 끌고 나왔다.
카이런 공작은 털가죽 케이프 없이 어깨에 외투만 걸치고 있었다. 그대로 썰매를 타고 나갔다가는 동상에 걸릴 게 분명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의 팔을 슬쩍 잡아끌었다.
“그대로 가시면 추워서…….”
그러나 그는 외투를 여미며 웃었다.
“그러면 네 케이프 안으로 나를 안아주던가.”
“…….”
내가 시선을 피하자, 그가 다가와 내 몸을 번쩍 들었다.
“공작님?”
그는 나를 썰매에 태우며 놀리듯 말했다.
“케이프 아까워. 잘 붙잡아.”
그때까지는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깨끗한 눈 위에는 때로 짐승의 발자국이 찍혀 있을 뿐이었다. 이 설산은 인간의 기척이 완전히 지워진 땅 같았다.
카이런 공작은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서 썰매를 멈추었다. 나는 내내 그를 주시했지만, 그는 정말로 추위에 강했다.
그는 입김을 뿜으며 밧줄 한 롤을 어깨에 멘 채 앞장섰다.
절벽 하부에는 동굴의 입구가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나타난 동굴은 성 하나를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 그리고 뜻밖에 약간 서늘한 정도로 온도가 높았다.
나는 카이런 공작의 추위를 걱정하는 마음은 내려놓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전설에서는 눈과 얼음을 양손에 쥔 신이 여기서 쉬고 있다고 하지.”
카이런 공작이 멈춘 자리에는 커다란 바위기둥이 양쪽으로 서 있었다. 그 위에는 여러 종류의 짐승의 뼈와 뿔들이 얽혀 관처럼 얹혀 있었다.
“여길 넘어서서 그의 잠을 방해했다가는 반드시 그 신의 손에 얼어 죽을 거라는 뜻이야. 눈과 얼음을 양손에 쥔 신의 손에 얼어 죽으면 태양의 곁으로는 가지 못해.”
카이런 공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기둥 사이를 쑥 넘어갔다.
“공작님?”
나는 겁에 질려 불렀지만 카이런 공작은 살짝 짜증을 내며 재촉했다.
“얼른 와, 바빠. 그건 하르펠가 조상들이 만든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아…….”
그 음침한 물건을 카이런 공작이 만들었다는 것을 듣고 나니 괜히 그의 곁에 가기 싫었다.
눈치가 귀신같은 그는 걸음을 뚝 멈추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왜.”
“아니요, 그냥…….”
“아, 십 년 전쯤에 망가져서 내가 고쳐 얹었군.”
나는 한숨을 쉬며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나는 의아했다. 금단의 땅을 침범하면서, 카이런 공작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러면 안전한 것 맞아요?”
“아니.”
“네……?”
카이런 공작이 내 뺨을 쓱 문질러 스치는 가죽장갑은 차가웠다. 어느 때인가부터, 그는 나를 걸핏하면 만지고 있었다.
“나는 너를 믿어.”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는 나를 무시하고 땅에서 솟아난 커다란 종유석 기둥에 밧줄 한쪽 끝을 묶었다.
그런 다음에야 내게로 돌아왔다.
“내가 내려가면 즉시 줄을 걷어. 그리고 내가 내리라고 하면 줄을 내려. 절대 미적대면 안 돼.”
“네?”
카이런 공작은 밧줄의 다른 끝을 동굴 끝의 커다란 바위 위로 집어 던졌다. 밧줄은 바위가 삼킨 듯 쑥 사라졌다.
그는 나를 향해 돌아서더니 즐거운 듯 말했다.
“나,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공작님, 지금 무슨 말씀을-”
“-저 바위틈은 방벽 너머 마물의 땅과 이어져 있어. 그러니 네가 제때 밧줄을 내려주지 않는다면 나는 돌아오지 못해. 믿는 자에게만 맡길 수 있는 일이야.”
그가 돌아서기에 나는 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안 돼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완전히 돌아서서 나를 안으며 내 뒷머리를 받쳤다.
“잘 돌아오라고 키스라도 해줄 건가?”
“정말…….”
나는 또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후회할걸?”
카이런 공작은 나를 놓고 세워주더니 바위 위로 성큼 뛰어올라 그 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얼른 달려가 바위 위로 올라가 우물 같은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이 커다란 바위 우물은 그 아래 공간의 상공에 난 구멍 같은 구조였다. 아래로 절벽 끝의 거대한 공터 같은 장소가 보였다.
날개라도 있지 않은 한 절대 기어서는 올라 올 수 없는 곳이었다.
고약한 성격의 북부신이 잠들었다는 이 동굴이 금기의 장소인 진짜 이유는 바로 이 구멍의 존재였다.
카이런 공작은 밧줄을 타고 까마득한 바닥에 내려서더니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밧줄을 위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헛!”
나는 카이런 공작을 향해 달려드는 마물을 보며 경악하고 말았다.
카이런 공작은 순간적으로 몸을 빼서 피했지만, 개와 같은 머리를 하고 기다란 발톱을 내민 마물은 엄청난 도약력으로 그를 뛰어넘어 내가 떨어트린 밧줄에 앞발로 매달렸다.
그는 훌쩍 뛰어올라 마물의 허리를 베어버렸다. 마물이 매달려 팽팽해졌던 밧줄이 다시 느슨해졌지만 나는 덜덜 떨리는 내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코트를 타고 흐르는 피를 보며, 내 정신은 이미 반쯤 달아나 있었다. 공기 중으로는 마물 피의 악취가 전해져왔다.
카이런 공작은 고개를 쳐들고 나를 향해 소리쳤다.
“뭐 해!”
내가 정신을 차리고 밧줄을 감아올리기 시작하자 카이런 공작은 장난기 어린 꼬마처럼 내게 손을 흔들었다.
카이런 공작은 그대로 사라졌다. 바위 구멍에서 보이는 아래 공간의 면적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말로만 듣던, 잘린 마물의 시체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모베일로 가던 숲에서 보았던 반동강 난 늑대의 시체와 똑같은 꼴이었다.
나는 그때 카이런 공작의 무심한 얼굴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일에 이골이 난 것이다.
잠시 후 멀리서 끔찍한 마물들의 울음소리와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