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105/128)

94화

나를 감싼 고요함은 이중적이었다. 그것은 곧 감금의 증거이면서 또한 나를 보호하는 벽과도 같았다. 이곳에서만은 나와 카이런 공작이 어떤 마음을 끄집어내든 안전할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만은 우리가 누구의 무엇이 아니라 한 여자와 한 남자일 뿐이더라도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똑똑.

-마님 깨셨습니까?

힐데였다. 나는 조금 막힌 목을 고르며 대답했다.

“네, 일어났어요.”

-공작님께서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몸단장을 도울까요?

“아니, 아니. 괜찮아요. 내가 할게요…….”

카이런 공작을 떠올리는 순간 내 심장이 쿵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이 오늘 이 고요한 세계가 유일하게 낸 소음이었다.

나는 나뭇가지에 한계까지 쌓인 눈덩이가 무너지듯, 의자로 가서 털썩 앉고 말았다.

조금 후, 나는 힐데의 안내를 받아 일층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웃음기라고는 없고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아서, 잡담을 나눌 수는 없었다.

힐데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갔을 때, 카이런 공작은 단정한 차림이었다.

그는 마치 오늘 손님을 맞기로 되어 있는 사람처럼, 본 적 없는 깔끔한 예복에 머리를 빗어 올리고 있었다.

그는, 불가능하게도, 오늘 평소보다 더 멋있었다.

누군가 그가 평소보다 더 아름답더라고 말했다면 나는 분명히 거짓말이라고 했을 텐데.

오늘 다른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는 걸까…….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리엘사.”

“공작님.”

어쩌면 오늘의 새 손님은 카이런 공작 자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도, 이 공간도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카이런 공작이 일어나 나를 정중하게 자리에 앉혀주었을 때, 나는 내가 왜 이다지도 불편한지 깨달았다.

스물도 넉넉한 커다란 식탁에서 그와 내가 한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는 나를 어엿한 귀족 영애처럼 대하고 있었다.

힐데는 절뚝거리며 나가 트롤리를 끌고 왔다.

북부 남자들이 강인함과 그에 비례하는 성격적 결함으로 유명한 것만큼이나, 북부의 음식은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힐데가 접시를 놓고 지나갈 때마다 식탁은 식욕을 참기 불가능한 냄새로 채워졌다.

“들지.”

카이런 공작은 부드럽게 말했지만 나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식사는 냄새만큼이나 지독히 맛있었다. 첫입을 맛본 순간, 이 무인지경의 설성에 고립된 것이 속박이 아닌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나는 겨우 용기를 내어 말했다.

“공작님, 오늘 좀 다르세요.”

“그런가?”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무덤덤하게 답했을 뿐 식사를 계속했다.

내 배는 기분 좋게 불러갔지만, 내 심장은 조금씩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경험하는 모순된 감각이었다.

그는 평소와 달라.

아니, 모든 게 다 달라…….

우리는 침묵 속에 식사를 마쳤다. 식사가 끝나자 카이런 공작은 내 의자를 빼주더니 손을 붙잡아 어디론가 데려갔다.

어제 보지 못했던 응접실은 화려하고 고풍스러웠다. 하지만 일층에 있는 탓에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정원을 잠기게 한 눈뿐이었다.

“조금씩 마셔봐.”

그는 힐데가 놓고 나간 따뜻한 음료를 들며 말했다. 술이 섞인 발효 음료에서는 조금 시큼하고도 단맛이 났다.

그는 잔을 들고 창가로 갔다. 그의 침묵 속에서 내 심장은 점점 더 조여드는 것 같았다.

나는 음료를 조금씩 맛보았다. 달면서 시큼한 맛 뒤로 술기운이 훅 덤벼들었다.

기운이 돋워질 것은 분명했지만, 함부로 마실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잔을 놓아두고 창가로 갔다.

“공작님.”

카이런 공작은 창턱에 잔을 내려놓더니 손으로 내 뺨을 가볍게 쓸었다.

내 눈을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나를 처음 보는 듯한 낯선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가 숨긴 동요가 두려웠다.

그는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나는 옛 아리엘사를 보내주었어. 게오르그 곁으로.”

“저는…….”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겁에 질린 건 나였다.

그는 내 눈동자만을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무엇을 사냥하며 뒤쫓는 사람 같았다.

“너는, 네 이름은 뭐지?”

그의 손끝이 내 뺨을 쓸었다. 심장이 아프게 조여왔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는 거야. 나는 너를 오늘 처음으로 만나는 거야.”

카이런 공작은 한 발 물러나더니 절도 있게 허리를 숙이며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귀족적인 인사였다.

“나는 카이런 하르펠, 하르펠 공작가의 주인이며 북부의 지배자. 마물을 방벽 너머로 추방한 자다. 그대는 누구지?”

나는 숨을 멈춘 채 한순간 격렬하게 고민했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 그에게만 소리 내어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또한 강하게 떠올랐다.

내 이름은 이 세상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금기였다.

“……아리엘사. 저는 줄곧 아리엘사였어요.”

내 대답에 카이런 공작은 조금 실망한 듯 부드럽게 웃었다.

“고집쟁이군. 옛날 아리엘사는 내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줬는데.”

나를 바라보는 그의 옅은 웃음에는 한계까지 억누른 격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한밤중 숲에서 만난 짐승의 안광처럼 나를 두렵게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피하며 침실로 돌아가려 했다.

그가 해가 하늘이 아니라 내 얼굴에 떠 있는 것처럼 나만 주시하는 눈빛을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몸을 돌리는 내 허리를 단단하게 감아 안았다.

“공작……!”

“걸핏하면 도망가는 그 습관은 이제 끝이야. 이곳은 땅끝이거든. 더 갈 데가 없어.”

“저를 여기 감금해두실 수는 없어요.”

카이런 공작은 나를 놓더니 귀엽다는 듯, 그러나 조금 쓸쓸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내 곁에 잘 붙어 있겠다고 약속해.”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결연하게 대답했다.

“그럴게요. 은퇴 계획은 취소할게요. 이사도 안 가요.”

그는 내 턱을 가볍게 붙잡아 들더니 눈을 바짝 들여다보며 말했다.

“못생긴 건 똑같은데. 거짓말은 더 못하네.”

멍한 표정을 지은 내게, 그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원망이 담긴 목소리였다.

“너는 네 생각밖에 안 해. 늘 네가 원하는 것에만 골몰하지. 그래서 나를 바라보지 않아. 하지만 여기서 둘이 있으면…… 싫어도 나를 볼 수밖에 없겠지. 너를 보는 나를 어쩔 수 없어서라도 바라보겠지.”

그에게는 내가 그토록 무심한 여자였던 걸까.

나는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내게 뱉은 말이란 ‘차’가 다였다. 그게 아니면 아주 못마땅한 질책처럼 들리는 ‘아리엘사!’라거나.

그런데 지금 그는 입만 열면 폭탄 같은 고백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터질 듯한 격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반쯤은 절망이 묻은, 어떤 몸부림 같았다.

나는 그 눈을 보며 그의 말을 부정하려는 힘을 잃고 말았다.

내 침묵에, 그는 상처받은 사람처럼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나는……. 아리엘사를 연기하지 않는 너를 잘 몰라. 너만 아는 내 인생의 사건에 전전긍긍하지 않는 네가 어떤 여자인지, 나는 몰라.”

“미쳤나 봐…….”

카이런 공작은 내 입가에 손끝을 살짝 얹고는 설핏 웃었다.

“그래. 감히 내게 이런 말을 뱉는 여자를 말하는 거야. 나는 이런 얼빠진 너를 알고 싶어. 내 손으로 내 앞에 끄집어 내놓고 싶어. 네가 더는 숨지 못하게.”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더 거대한 힘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힘 말이다.

세상이 너무 조용해서 그의 말이 너무 크게 울렸다. 마치 온 세상이 그의 요구를 방해하지 않도록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알아서, 알아서 뭐 하시게요!”

“내가 무엇에 미쳤는지는 알아야지.”

“…….”

어느 틈에 흐른 눈물이 그친 것 같았다. 정신이 멍했다.

“내가 어떤 이방의 광증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그것을 알아야지. 그 정도는 합당한 요구가 아닌가?”

그의 목소리는 마침내 평정을 잃고 있었다.

나도 그처럼 소리쳤다.

“고민하겠다고 하신 게 저에 대해서는 아니셨을 테니-”

“-맞아.”

“…….”

“나는 너를 가질 거야. 그것은 이미 결론이 난 일이야. 내가 고민하는 것은 그다음이야.”

“공작님.”

내 망연한 속삭임에, 그는 눈을 번뜩이며 답했다.

“일단 너를 가진 다음에, 내가 그르쳐버린 일들을 후회하게 되는지 확인해볼 거야.”

나는 차가운 광기로 눈을 반짝이는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후회되면요?”

“나는 살면서 후회해본 적이 없어.”

“후회되지 않으면요?”

“그러면 내가 정답을 찾은 것이지. 그때는 네 음유시인이 틀렸다는 뜻이야. 그래도 내 땅에 재앙을 끌고 오겠다면, 그게 저쪽 세상의 신이라도 죽여버리겠어.”

“제발…….”

카이런 공작이 내 목 뒤를 붙잡아 당겨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는 나를 당겨 자기 이마에 내 이마를 붙이고는 기분 좋은 듯 클클 웃었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조금만 더 절망해. 나를 떠날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만. 너무 외로워서 나라도 필요해질 정도로만.”

그는 억지로 웃으려고 했지만 그 표정은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얼굴이 점점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빛에 빨려 들어가듯 점점 당겨지고만 있었다.

그의 입술이 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겨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나를 잠시 꽉 붙잡았다가, 깊은 한숨을 내뱉고 나갔다.

정적에 숨이 막힌다고 생각했을 때, 밖에서 썰매 끄는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

나는 그가 설원을 달려 찬 공기 속에 광증의 열을 식히고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었다. 물론 그 장난감은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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