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거대한 석성은 눈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성문은 얼음이 부서져 바스러지는 듯한 소음을 내며 열렸다. 나는 흩뿌려지는 눈에 잠시 눈을 감았다.
성 마당으로 들어가자 털가죽 케이프를 둘러쓴 시커먼 남자가 나타났다.
키도 작은데 얼마나 두꺼운 털가죽을 둘렀는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곰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카이런 공작이 썰매에서 내리자 머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공작님.”
“여주인을 모셔왔다.”
남자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짧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마님.”
나는 여주인이라는 말에 이 성만큼이나 얼어붙었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태연하게 남자를 나에게 소개했다.
“아리엘사, 성지기 마틴이야. 마틴과 그의 아내 힐데가 네가 필요한 건 모두 구해줄 거야.”
“반가워요. 마틴.”
카이런 공작은 문으로 성큼성큼 앞장섰고 나는 마틴이 개 썰매를 끌고 사라지는 걸 보며 종종걸음으로 뒤따라 들어갔다.
성안으로 들어가 실내의 따뜻한 공기에 노출되자 긴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쫓기는 사람처럼 외투를 벗고 장갑과 귀마개 따위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몸이 훨씬 홀가분해졌다.
홀로 들어가니 뜻밖에 성안은 채광이 좋아 밝았고, 공허하다고 할 정도로 횡했지만 먼지 한 점 없었다.
시간 속에 박제된 듯 보이는 벽에 걸린 그림과 장식품들은 빠져들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서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두렵게 바라보다가 카이런 공작에게 말했다.
“여주인이라니,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면…….”
“말 그대로야.”
카이런 공작은 나를 무시하고 벽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듯 벽에 걸린 장식품과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아 그는 이곳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나를 무시하는 그를, 나는 원망스럽게 불렀다.
“공작님!”
“이 성을 네게 줄게.”
“……네?”
“이제 여기서 지내도록 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멍하니 선 나를 버려두고, 그는 좌우로 굽어지듯 갈라져 난 주 계단 한쪽으로 올라갔다.
나는 혼자 남겨지기 전에 그를 뒤따라야 했다.
그가 이끈 곳은 커다란 침실이었다. 3층의 전망과 화려한 침대와 가구로 보아 주 침실인 것 같았다.
내가 실내에 감도는 냉기 때문에 몸을 웅크리자 카이런 공작은 벽난로로 갔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장작을 잔뜩 집어넣었다.
“곧 따뜻해질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한 다음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나는 벽난로 앞으로 가는 대신 그의 옆으로 갔다.
창밖으로는 눈을 진 성벽 너머로 깊은 숲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우리가 방금 지나온 평원이 보였다. 모든 것이 백색이었다.
“지금 이 성은 버려진 성으로 취급받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마물이 토벌된 후에 하르펠가의 근거지를 정무를 보기에 적절한 곳으로 옮겨야 했을 뿐. 나는 늘 이곳을 고향으로 여겼어. 이곳은 내 조상들이 속한 장소야. 아리엘사.”
이 성은 하르펠가가 한창 마물 토벌에 집중할 당시의 근거지였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이 마물을 방벽 너머로 추방함으로써 이 성의 용도가 다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의 고향인 이 성을 새 감옥으로 사용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는 불만에 찬 얼굴을 한 나를 돌아보더니 내 뺨을 손으로 슬쩍 쓸며 말했다.
그가 손을 댈 때마다 손이 덥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에는 추위 탓인지 조금 시원했다.
“너는 이곳을 알고 있는 거지?”
“네.”
그는 몸을 창으로 돌리며 말했다.
“말해봐. 이곳이 너에게는 어떤 장소이길래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설명하는 동안 점점 화가 났다.
내가 기울였던 노력은 어쩌면 그가 이 성에 다다르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가 나를 여기로 끌고 와버린 것이다.
그가 이 조용한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수년에 걸친 마물과의 전쟁을 이끌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의 차분해진 태도로 이곳의 의미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루엘라 공작 부인은 북부의 기후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힘들어해요. 그러다 임신하면서 임신 우울증과 향수병이 겹쳐요.”
“…….”
“의사들도 그녀를 치료하지 못해요. 그녀는 죽어가죠. 그래서 공작님은 그녀를 데리고 이 성에 와요. 마지막 순간을 둘이서만 보내기 위해서요.”
나는 창밖을 응시하며 말했다.
“공작님이 왜 그러셨는지 이제 알 것 같네요.”
나는 한번 심호흡하고 말했다.
“그녀는 공작님께 청혼 선물로 받은 사막의 꽃을 아름다운 남부 유리로 만든 상자에 넣어 두고 매우 소중하게 여겼어요. 공작님은 위독한 그녀를 간호하며 그녀와의 추억을 곱씹다가, 문득 그 꽃이 죽은 사람도 살리는 힘을 가졌다는 전설을 떠올리죠.”
“내가 그런 걸 믿었다고?”
그는 즉시 비웃음을 흘렸지만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님은 유리 상자를 부수고 꽃을 꺼내 꽃차를 끓여서 그녀에게 마시게 해요. 공작님이 생전 처음으로 손수 끓여본 차죠. 그리고…….”
나는 울컥해서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네. 그때 공작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이셨어요.”
카이런 공작은 혼잣말처럼, 그러나 필연을 만났음을 깨달은 자처럼 중얼거렸다.
“……결국 이곳으로 왔단 말이지?”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금 순리를 따른 게 아니다.
원작대로라면 그는 루엘라와 이 성에 와야 했다. 이 성은 그 두 사람의 클라이맥스를 위한 장소였다. 내가 아니었다.
카이런 하르펠 공작이 나와 클라이맥스를 맞으려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는 눈을 꼭 감았다.
이제 나는 도망칠 것을 고민할 수 없었다. 저 눈 쌓인 숲을 가로질러 달아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성을 빠져나가서 저 숲속의 만년설 어디에서 파묻혀 죽을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강해져야 했다.
절망한 내 어깨에 그의 손이 내려앉았다.
“여기서는 너는 안전해.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 아리엘사인 척을 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말한 것 모두,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마음속에 꽁꽁 숨겨두고서 꺼내지 못한 말들이었다.
나는 마음 편하게, 그저 나로 지내고 싶었다. 나인 채로도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공작님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다고 하셨잖아요. 저를 지하 감옥 대신 이 성에 감금해두려고 오셨던 거예요?”
그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생각을 할 거야. 하지만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 나는 너를 가질 거야. 그러니 너는 고민할 것이 없어. 이방인.”
“대체 무슨…….”
나는 하던 말을 멈추어야 했다. 카이런 공작이 나를 억세게 포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어깨에 목을 묻고 있었고 내 상체는 뒤로 젖혀져 균형을 그에게 온전히 맡길 수밖에 없었다.
깊은 한탄 같은 날숨 끝에 흘러나온 그의 나직하고 거친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 말을 지워버렸다.
“널 안는 게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는걸. 나는 왜…….”
“공작님……!”
그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건 너야. 너는 이제 내 집, 설성의 여주인이야. 또한 내 소유야. 아무데도 못 가.”
심장이 뛰고 숨이 찼다. 나는 균형을 잡기 위해 그의 팔을 붙잡은 채 속삭였다.
“공작님, 지금 제정신이 아니세요. 알고 계세요?”
“그게, 잘못인가?”
나는 말문이 막혀 숨을 참았다. 그는 나를 부드럽게 일으켜 세워주더니 내 머리카락 끝을 조금 움켜쥔 채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에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발소리가 노크했다. 다리를 저는 발소리였다.
-마님, 잠시 들겠습니다.
“그, 그래.”
방으로 들어온 것은 체구가 단단한 키 작은 중년 여자였다. 마틴의 아내가 분명했다.
“힐데라 합니다. 마님. 필요한 것은 방 안에 마련해두었고, 공작님께서 목욕을 마치시는 대로 목욕물을 들이겠습니다. 제가 혼자 일하니 오래 걸리는 것은 이해하십시오.”
“그래.”
힐데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버렸다. 나를 무시한다기보다 성격인 듯했다.
나는 힐데가 필요한 것을 마련해두었다고 말하면서 바라보았던 옷장을 열어보았다. 새로 마련한 것이 분명한 옷들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이곳에서 부족한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영원히 갇혀 있는 동안 말이다.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나는 움직이지 않고 잠시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나는 이토록 고요한 세상에서 숨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의 말소리, 발소리, 새들의 지저귐, 가축의 울음소리. 물건을 놓고, 끌고, 찧는, 살아 있거나 죽은 것의 소음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내 이불이 유독 크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벽난로로 가서 장작을 하나 더 넣었다. 방 안은 충분히 훈훈했지만 습관적인 동작이었다.
장작이 타닥거리는 소리마저 없었다면 나는 울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창가로 갔다.
온 세상이 백색이었다.
밤사이 허벅지까지 쌓인 눈은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수를 하얀 덩어리의 요철로만 보이게 했다. 성벽은 마치 그것이 이고 있는 눈덩이에서 뻗어 나온 잿빛 뿌리처럼 보였다.
성벽 너머로 보이던 북부 땅끝 숲과 먼 평원은 그 아침에는 모두 흰 무엇이었다.
지상의 모든 색과 소리를 삼켜버린 눈의 세계를 바라보며, 나는 그저 창밖을 응시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