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눈물이 그렁그렁한 내 시선을, 그는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 아리엘사.”
그는 잠시 후 말을 고쳤다.
“이방인. 너는 내게 시간을 빚졌어. 그러니 내 곁에 있어.”
대답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 마음 안에서는 어떤 파문이 끝을 모르고 퍼져나가기만 했다.
나는 묵묵히 감자를 베어 물었고, 그는 그런 나를 잠시 지켜보다가 새 감자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
카이런 공작은 나를 온천여행에 데려왔다. 나는 너무 더러웠고, 지하 감옥에서 입은 정신적 타격에서 회복하기 위해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우리가 굴의 입구로 다시 나섰을 때, 세상은 백색의 설원이 되어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라 기온은 포근할 정도인데 발에는 고운 눈이 뽀도독 밟혔다.
“아……. 너무 예뻐요!”
내가 감탄하는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카이런 공작은 조금 귀엽다는 듯 중얼거렸다.
“눈을 보고 감탄하는 북부인은 없어.”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바위산 비탈을 내려가며 말했다.
“공작님과 있을 땐 티 내도 괜찮잖아요!”
카이런 공작이 내 방한복과 털가죽 케이프까지 준비해주어서 나는 추위에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몸이 둔해서 말에 한 번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등자에 발을 걸고 끙끙대는 내 꼴을 감상하듯이 바라보고 있더니 다가와 손바닥으로 내 엉덩이를 확 밀었다.
나는 안장에 쑥 올라앉았지만 얼굴이 시뻘게지고 말았다.
“무슨! 무슨 짓이에요!”
“말에 태워주는 짓.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그가 너무 태연하게 말해서 나는 더 화도 내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가뿐하게 말에 오른 그는 나를 앞서 길을 잡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르펠 성의 반대 방향이었다.
내가 말을 멈추자, 카이런 공작은 나를 돌아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쪽은 하르펠 성이 아니잖아요.”
“왜, 깨끗한 몸으로 재판받고 영영 지하 감옥에 처박히고 싶나?”
“제가 결백하다는 건 공작님도 잘-”
“-증거는?”
“그거야……!”
“그거야?”
카이런 공작은 말 머리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말문이 막힌 걸 알면서도 집요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그가 미웠다.
“내가 성으로 빨리 돌아온 이유를 알려주지, 아리엘사. 포슬란에 가서 어떤 놈이 일부러 불을 지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야.”
“…….”
그는 혼자서 그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내가 급히 성을 비우기를 원할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런 짓을 저지를 능력이 없지.”
역시 그였다. 그는 언제나 진실을 꿰뚫어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어둡게 되물었다.
“다 아셨던 거예요?”
“레오르트 후작은 감히 내 땅에 불을 질렀다. 지금 돌아가면 나는 그것을 모르는 척할 자신이 없다.”
그의 얼굴이 눈앞의 설원처럼 평온했고, 또한 설원처럼 싸늘했다. 그는 입을 열어 얼음보다 차고 딱딱한 말을 뱉어냈다.
“이대로 돌아가면 나는 루엘라를 감옥에 처넣고 레오르트 후작을 적으로 선포할 것이다. 체이어스는 펄쩍 뛰겠지만, 도저히, 참지 못할 거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는 광기가 스쳤다.
평온한 말투에 실어 내뿜는 분노가 너무 선연해서, 지금 그가 발휘하는 대단한 자제력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북부가 겨울에 전투를 치르는 건 마물뿐이다. 그러니 잠자코 나를 따라오겠나, 더 시간을 끌 텐가?”
내가 뭐라고 답하겠는가. 부부 싸움에는 약간 냉각기가 필요할지도 몰랐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처럼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말이 내뿜는 체온 때문인지 방한복 때문인지, 눈 쌓인 들판을 달리는 것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그는 조금 앞서 말을 달리며 길을 잡았고, 나는 그의 왼쪽에서 고개만 돌리면 그의 옆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와 단둘이 북부의 숲을 달리는 내 로망은 이렇게 부적절한 상황에서 성취되고 있었다.
지금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것이 스스로 한심하기는 했지만, 나는 조금, 행복했다.
속도를 약간 올려 앞서가던 그가 눈 쌓인 나뭇가지를 잡았다 놓았다.
자연스럽게 휘어졌다가 내게 튕겨 나온 나뭇가지는 엄청난 눈가루를 내게 뿌렸다.
“앗! 공작님!”
“하하하.”
그의 청량한 저음이 눈 덮인 고요를 덮었다. 그가 삼킨 분노와 광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는 생각도 잠시, 머리에 뒤집어쓴 눈이 녹으며 냉기에 피부가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치이…….”
나도 똑같이 해주려고 말의 박차를 가하자 카이런 공작은 웃음을 뿌리며 저만치 달려가 버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카이런 공작이 갑자기 속도를 줄이며 내게 멈추라는 신호를 했다.
그를 따라잡을 수 없어서 잔뜩 약이 올라 있던 나는 그에게 소리를 치려다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멀리, 설원 위에 갈색 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새하얀 평원 위로 북부 사슴 떼가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동부에서 그와 사슴들의 짝짓기를 구경하던 때가 떠올라 웃음이 지어졌다.
선두의 덩치 큰 수사슴은 거대한 뿔을 달고 있었다. 저런 걸 달고 재빠르게 움직이고 싸움도 잘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하지만 역시 아름다운 동물이었다.
“어머…….”
“……그렇지?”
나는 미소 짓는 카이런 공작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슴들에게 매혹당한 채였다.
눈 속을 달리는 사슴의 강인함과 뿔의 우아함은 카이런 하르펠의 그것이었다.
나는 멀어져가는 사슴 무리를 끝까지 바라보았다.
“너와 함께 이걸 볼 수 있어서 기쁘다.”
카이런 공작은 말 머리를 돌리고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
우리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사실 그것은 도피나 도주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눈 덮인 땅을 가로지르는 동안 그런 근심은 저절로 잊혀지고 말았다.
나는 북부인들의 목적지향적인 성향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 북부에서는 많은 것이 단순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했다. 추위가 오면 몸을 피하고 추위가 가시면 열심히 다음 추위를 대비했다. 모든 것이 단순했다. 잡념 같은 것은 눈이 흡수해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하고 담대해지는 내 마음과 달리, 추위는 길을 갈수록 점점 혹독해졌다.
날이 맑고 바람이 없는 날은 종일 달려도 괜찮았지만,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칼날이 몸을 스치는 것 같았다.
그러면 카이런 공작은 숲에 있는 굴이나 빈 오두막을 찾아냈다. 나를 가까운 마을로 데려가기도 했다.
북부에는 그런 쉼터가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고, 그는 그 위치를 다 아는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말이 없었고, 카이런 공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
우리는 마을에 도착해 상점에 들렀다. 카이런 공작은 필요한 것들을 주문했고, 홀연히 나타난 북부의 주인을 본 상인은 놀라 뛰어나갔다.
상점 안에서 난로에 손을 쬐고 있던 나는, 밖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즐거운 얼굴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를 따라 나가니 개 썰매가 서 있었다.
“어린 개들로 골랐겠지?”
카이런 공작의 말에 상인은 믿어달라는 듯 약간 목청을 높여 말했다.
“모두 두 살이 안 된 튼튼한 놈들입니다. 양손에 눈과 얼음을 쥔 신이 눈 폭풍으로 짜증을 부리셔도 길을 찾아낼 겁니다.”
“믿지.”
그가 ‘믿지’ 하는 말은 꼭 ‘거짓이었다가는 각오해야 할 거다’로 들렸다. 나는 괜시리 먼 산을 보았다.
“어서 타.”
내가 화들짝 놀라 썰매에 타자, 그는 내가 무슨 화물인 것처럼 두꺼운 털가죽으로 둘둘 두르더니 눈만 꺼내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앞에 자리를 잡았다.
“개 썰매도 처음일 테지? 즐겨봐.”
그는 내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썰매를 출발시켰다.
“아앗!”
개들이 끄는 썰매가 빨라 봐야 얼마나 빠를까 했는데, 썰매가 출발하는 순간 내 몸은 뒤로 휘청 넘어갔다. 말을 타고 달리는 것과 별로 차이가 없는 속도였다.
카이런 공작은 놀란 나를 보고 껄껄 웃으며 눈밭에 웃음을 뿌렸다.
어느 숲의 경계를 넘어서자, 정체된 공기마저 금속성의 아린 통증을 줄 만큼 기온이 낮아졌다.
새털 같은 눈을 인 커다란 침엽수들은 얼어붙은 녹색 탑처럼 보였고, 녹은 적이 없는 눈은 밟을 때 밀가루 자루를 비트는 듯한 소리를 냈다.
눈앞에 선 거대한 백색의 산과 평원 가운데 움직이는 것은 우리밖에 없었다.
우리는 멀리 거대한 설산을 두고 눈 덮인 평지를 달렸다. 이따금 나무 한 그루씩이 외로이 서 있고, 그 아래에는 얼음이 반질반질하게 언 광경은 이 땅끝에서만 볼 수 있었다.
신비롭지만, 공기는 살의라고 할 만큼의 가혹한 추위를 품은 모순된 풍경이었다.
카이런 하르펠 공작은 그 가운데서 유일하게 자기 의지로 달려가는 자였다. 나는 그의 그런 의지력이 두려웠다. 또한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두려웠다.
❄❅❄
카이런 공작이 잠시 멈춘 것은 썰매가 설산을 돌아 다른 면이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그는 감회에 찬 듯 만년설로 덮인 산 중간에 돌출된 성을 바라보았다. 머리에는 눈을 인 회색 성벽의 이질감은 확연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것은 산의 암석들만큼이나 그 산의 일부인 듯 보였다.
나는 저곳이 어디인지 알았다.
북쪽의 땅끝, 원작 속 설산의 성이 눈앞에 있었다.
“괜찮나?”
“…….”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눈 내리는 사막>의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원작은 다시 운명처럼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나의 충격도 모르고, 그는 짧은 고함으로 썰매를 출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