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는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
나는 카이런 공작의 뒤를 따라 무작정 말을 달렸다. 내 몸에서 나는 악취를 맡지 않으려면 바람을 안고 달리는 것만이 답이었다.
그러면 나는 루엘라와 지하 감옥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그 상황에서 카이런 공작에게 행선지를 묻기에는 나는 약하고 비겁했다.
하르펠 성을 벗어나 숲을 가로지르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비참했다. 그리고 카이런 공작은 자신의 화를 짓누르는데 집중하는 중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말에서 내려서 쉴 때면 내게 물과 간식을 내주었다. 털가죽 케이프에 여벌 옷까지, 그는 여행 준비를 꼼꼼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하르펠 성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나를 데리고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내가 ‘공작님’하고 부를 때마다 혀를 차며 내 말문을 막았다. 그러면 나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실은 이제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나도 잘 알 수 없었다. 새신랑 카이런 공작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녀를 데리고 가출해버리고 말았다. 영지민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모든 게 끝이 안 보이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그날 밤 석양이 깔리고 있을 때, 그는 산중에서 말을 멈추었다.
우리는 바위산을 지나고 있었고, 그곳은 쉬어갈 만한 데가 아니라서, 나는 주변을 의아하게 둘러보았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을 따라 들어간 바위틈에 난 동굴은 탄성을 자아냈다.
동굴 안 공기가 후끈하다 싶더니, 더 걸어 들어가니 온천이 흐르고 있었다. 바위 동굴 속에 있는 온천은 원작에서 본 적 없었다.
동굴 안 공간은 상당히 넓었고, 경사를 따라 여러 개의 웅덩이가 산발적으로 이어져 있었다.
한 웅덩이의 물이 넘치는 곳에서 다른 크고 작은 웅덩이들이 연결되는 식이었다.
그 안에서 짙은 김을 뿜는 더운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이 나오게 했다.
내가 눈이 휘둥그레지자 그는 즐거운 듯 말했다.
“북부에 있는 모든 게 얼어붙은 건 아니야. 차가운 바위도 이렇게 뜨거운 물을 품고 있지.”
차가운 바위 속의 뜨거운 물. 혹은 뜨거운 광기.
그것은 곧 카이런 하르펠 자신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네요. 놀라워요…….”
그는 기분 좋은 눈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눈짓했다.
“벗어.”
“……네?”
미, 미쳤나 보다! 카이런 하르펠 공작이 미쳤나 보다!
나는 패닉에 빠졌다.
“널 씻긴다고 했잖아.”
“아아……. 그거요.”
내 패닉은 사라졌다.
“안 볼 테니 씻어. 너 정말 끔찍한 냄새가 난다.”
그는 휘적휘적 걸어 동굴의 모서리를 돌아가 버렸다. 방향이 크게 꺾이며 작은 온천 웅덩이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가 보이지 않는 게 무서웠다.
나는 그를 크게 부르고 말았다.
“공작님!”
-난 여기 있어. 여기서 씻을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와 웃음이 묻어 있었다.
곧 그가 물로 첨벙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나도 그 소리에 안심하며 옷을 벗어 던지고 물로 들어갔다.
“으아아…….”
내 신음에 카이런 공작이 소리쳤다.
-아리엘사?
“너무 좋아요!”
나는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고함쳤고, 내 목소리는 동굴 안을 크게 울리며 메아리쳤다. 그 끝에서 카이런 공작이 기분 좋게 클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뜨끈한 물속에서, 나는 온몸의 때와 냄새를 씻어냈다. 몸이 나른해지며 피로는 저절로 씻겨나갔다.
내가 얼마 전까지 하르펠 성의 지하 감옥에 있었다는 걸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
천국에 온 기분이 따로 없었다. 나는 바위에 머리를 기대고 물속에 축 늘어져 있었다. 이대로 자라고 해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녹아버릴 얼굴이군.”
“……!”
카이런 공작의 목소리가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나서, 나는 깜짝 놀라 물속으로 들어가 눈만 내놓았다.
바로 내 옆에 그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뽀얗게 변한 얼굴에 젖은 머리카락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피어오르는 김 때문에 물속의 내 몸이 제대로 보일 리는 없었지만, 나는 물속에서 얼른 팔로 몸을 가렸다.
“공작님……?”
“배고프면 나와.”
“네, 네.”
그는 피식 웃으며 다시 모퉁이를 돌아 가버렸다. 그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 게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물 밖으로 나갔다.
새 옷을 꺼내 입자 기분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머리에서 물기를 최대한 털어내고 동굴 모퉁이를 돌아갔다.
카이런 공작은 작은 불을 피워 거기에 감자를 굽고 있었다.
“푹 익으려면 아직 조금 더 있어도 되니까, 그사이에 내 머리나 말려.”
내가 잠시 당황하자 그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새 네 일도 잊었나?”
“아니에요, 공작님.”
나는 다가가 원래 하던 대로 수건을 조물조물 눌러서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닦아냈다.
그는 불쑥 물었다.
“감옥 안이 많이 춥던가?”
“흡.”
추웠냐고요……? 추웠냐고요!
나는 울음을 삼키고 대답했다.
“겨, 견딜 만하던데요……. 좀 더러워서 그렇지. 할리사의 끊임없는 저주랑…….”
“…….”
그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어쩐지 그의 어깨 근육이 편안해지는 듯 느껴졌다.
거짓말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서 내가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비참했는지. 그리고 그를 얼마나 미워하고 그리워했는지…….
사실대로 얘기하면 그는 상처받았을 것이 분명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게……. 나는 그가 몹시도 그리웠다. 미운 만큼 그리웠고, 얼른 달려와 나를 구해주었으면 싶어 그리워했다. 내가 그에게 그토록 강렬한 감정을 가졌음을 깨닫는 것이 할리사의 저주만큼이나 괴로웠다.
그가 결국은 나를 그곳에서 구해줄 것을 의심한 적 없었던 것처럼, 내가 그를 기다린다는 사실도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아프게 했다.
카이런 공작이 그의 머리를 닦던 내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이것 봐. 한동안 안 했다고 어설퍼졌잖아.”
그는 내 손목을 그의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내 손바닥에 입을 꾹 맞췄다.
“공…….”
“우리 둘뿐이잖아. 좀 참아.”
그는 마치 냄새를 맡듯 내 손바닥 피부에 코를 파묻더니 말했다.
“그래, 이게 네 체취였어.”
자기가 내 체취를 어떻게 안다고…….
갑자기 숨 쉬는 것도 불편할 만큼 몸이 긴장되었다.
그는 자기 가슴에 내 손을 꾹 눌렀다가, 잠시 후에 놓았다.
그리고 무심하게 감자를 뒤적였다.
갑자기 손이 자유로워진 탓에 어색하게 있다가 다시 그의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내가 그의 머리를 닦기 시작하자 카이런 공작이 소리 없이 웃는 게 느껴졌다.
내가 머리를 다 닦고 물러나자, 그는 가는 막대에 감자를 찍어 내밀었다. 나는 거기에 손끝을 대었다가 너무 뜨거워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껍질을 까보았다. 조금 요령이 생기니 할 만했다.
“시간이 넉넉했으면 물에 삶았을 텐데. 그러면 맛이 달라져. 네 세계에도 이런 걸 먹나?”
“네. 먹어요.”
“돌아가고 싶나?”
“…….”
그가 불쑥 던진 질문에, 나는 눈을 피하고 말았다.
나는 머리를 저으며 대답해야 했다.
“모르겠어요.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 이제는 어디가 내 세계인지, 그 경계가 희미해진 건 이미 오래전이었다.
아마 당신 때문인 것 같다고, 내 경계가 당신이 있는 곳 근처 어디에서 새로 그어지고 있다고, 내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가지 마.”
그는 그것이 몹시 간단한 일인 것처럼 말했다. 자기가 명령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인 것처럼 단호하게.
“혹시 돌아갈 수 있더라도 가지 마. 방벽을 내버려 두고 널 잡으러 가게 만들지 말고.”
저 남자는 어쩌면 저렇게 모든 게 쉽고, 모든 게 제멋대로일까.
나는 울컥하는 기분에 그를 쏘아보았지만, 그는 시선을 피했다. 말투와 달리 얼굴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왜일까, 내 가슴이 아팠다.
나는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멋대로야……. 정말 멋대로야!”
카이런 공작은 불을 뒤적이며 낮게 말했다.
“여기서 멋대로인 사람은 너밖에 없어. 이방인.”
“뭐라고요?”
어처구니가 없어 하는 내게, 그는 나직이 말했다.
“나는 내 의무를 다하려 혐오스러운 레오르트의 딸과 결혼했다. 루엘라도 이미 내게 정이 떨어졌겠지만 제 아비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이 모욕을 참고 있지. 하지만 너는 도망갈 궁리만 해. 내 인생을, 북부와 남부를 동시에 헤집어놓고서 말이야.”
그의 말투는 담담하고 건조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안에 담겨 있는 나에 대한 원망이 더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세상에…….”
나는 그를 향해 몸을 돌리려다 감자를 놓쳐버렸다. 바위에 툭 떨어진 감자를, 그가 주워 불에 잠시 대더니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슬포슬한 살만 드러내 내게 돌려주었다.
“너는 정말…… 골치 아파.”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는 담백했다. 원망 대신, 옅은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단순하고 급격한 감정의 변화들이 괴로웠다.
다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또 선수를 쳐서 도망가지 말라고 했으니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좌절감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옳았다.
이 세상의 주요 사건을 나만 안다는 사실에 들떠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바꾸어버린 후였다. 나는 제멋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