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내 경멸하는 듯한 눈빛에 루엘라는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렸다.
“우리 아버님이 이런 모욕을 그냥 보아 넘기실 줄 알아?”
“선을 넘으셨어요. 공작 부인! 저는 어찌하셔도 북부를 건드리시면 안 돼요.”
하지만 루엘라는 자기 집안이 벌이는 일을 조금도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자기 말을 이었다. 마치 너 같은 것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불을 금방 끌 수는 없을 거야. 카이런 공작님이 백성들을 동원해 불길을 잡으면 또 다른 데서 불이 날 테니까. 아마도 내 화가 풀릴 때까지…….”
역시, 카이런 공작을 하르펠 성 밖으로 꾀어낸 것은 레오르트 후작의 계략이었다.
루엘라 혼자라면 이렇게 정교한 계획을 꾸밀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때로 자기가 무엇을 실수하는지도 모를 만큼 순진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내 허브를 온실에서 다 뽑아서 버렸다고, 자기가 카이런 공작에게 고백해서 자기 무덤을 파는 식이었다.
그러나 레오르트 후작의 이름을 듣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럼…….”
루엘라가 그 들소뿔 브로치를 골라 마법을 건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녀는 아마도 마법이 작동해서 카이런 공작이 자신을 찾아와 첫날밤을 치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그런 다음에 그녀는 내게 카이런 공작에게 마법을 사용했다는 누명을 씌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침실 바로 곁에 있었고, 공식적으로 그 펜던트는 내가 훔쳐 간 물건이었다. 내가 그것을 훔친 목적이 마법을 걸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나를 제거하는 것은 간단했다.
카이런 공작에게 마법을 걸어 영향을 끼치려 한 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기 때문이다.
루엘라와 레오르트 후작은, 공작을 얻는 것과 동시에 나를 제거하는 이중의 함정을 판 것이었다.
정말 영리한 계획이었다.
심지어 내가 그 펜던트를 훔친 것이 아니고 진짜 내 것이어서 주술이 꼬여버렸음에도, 여전히 나를 제거할 명분을 만들어주고 있지 않은가.
하기는 레오르트 후작은 어쩌면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오래 참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레오르트 후작은 원작에서 그가 ‘결코 실패하지 않는 덫’이라고 부르는 계략을 짜서 카이런 공작이 알면서도 이용당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곤 했다.
카이런 공작은 집안 대대로 마물 토벌을 해왔고, 그 과정이 때로 난장판이 되었던 것은 마석을 향한 인간들의 탐욕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법을 혐오했고, 특히 하르펠 성에서의 마법과 주술은 금기였다.
그런 공작에게 마법을 쓴 혐의라니.
내 망연함과는 별개로, 나는 카이런 공작에게 레오르트 후작에 대해 경고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이 자리를 무사히 빠져나가야 했다.
루엘라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뭐?”
“부부 사이에 장인이 끼어드시면……. 부부 사이의 문제는 부부가 해결하셔야죠, 공작 부인.”
“하! 정말 어이없는 소리를 하네. 네가 부부 사이를 뭘 알아?”
루엘라는 정말 빈정 상한 듯 날카롭게 말했다.
“나는 빨리 공작님과 사이가 좋아져서 동부 석회 광산의 채굴권을 선물로 드릴 거야. 나를 곱게 길러주신 아버지께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아야지. 나는 착한 딸이란 말이야.”
등이 말할 수 없이 욱신거렸지만 나는 꿋꿋이 말했다.
“공작님은 공작 부인이 마법을 썼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세요. 이러시는 건 그분을 화가 나게 할 뿐이라고요!”
루엘라는 잠시 동요하더니 소리쳤다.
“왜, 공작님이 네 말이라면 다 들어주셔서? 너 대신 날 혼내달라고 부탁드리게?”
“…….”
나는 이 예쁘고 고운 영애가 완전히 삐뚤어졌을 때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고 말았다.
이런 건 정말 확인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선 후였다.
그렇지 않아도 싫어하는 레오르트 후작이 자신의 영지에 방화한 것을 알면 카이런 공작은 쉽게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사건은 남녀 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루엘라를 향해 머리를 들고 말했다.
“공작 부인, 절 놔주세요. 지난번에 저한테 가운 도둑 누명을 씌우셨을 때 공작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잊으셨나요?”
그녀는 내가 자신의 귀한 가운을 훔쳤다고 누명을 씌웠다가 카이런 공작과 체이어스에게 깨끗이 무시당한 적이 있었다.
루엘라는 그 기억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붉혔다.
나는 간절하게 말했다.
“저는 두 분 사이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없어요. 공작 부인께서 사랑의 주술을 썼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요!”
“하…….”
루엘라는 충격을 받아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밀라는 ‘저년이!’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멀리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 저를 놔주세요! 공작 부인, 그게 최선의 방법이에요.”
루엘라는 입술을 깨물고 씩씩거렸다. 그러나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눈을 떴을 때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내 앞으로 다가와 몸을 낮추어 말했다. 그녀의 말투는 이를 가는 듯했다.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아리엘사. 그래서, 지난번에 네가 달아났을 때 어떻게 되었지? 그분은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너를 잡으러 가버리셨어! 나를 외면하고 돌아서던 그분의 눈빛을, 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
나는 내가 말을 잘못 꺼낸 것을 깨달았다.
루엘라는 몸을 바들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 내 앞에서만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를 갈듯 말했다.
“네가 또 어디론가 달아나면 그분도 너를 찾으러 떠나버리시겠지. 내 곁에서 멀리멀리. 그러니 나는 차라리 너를 내 성 밑바닥에 가두어 두겠어. 그분이 더는 아무데도 떠나시지 못하도록!”
“…….”
루엘라에게 저토록 잔인한 눈빛이 있었는지,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소름이 끼쳐 올랐다.
그녀는 여전히 아우라를 몸에 두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제 내게 낯선 사람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북부의 모든 숲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불을 지를까 봐. 네가 그 끔찍한 지하 감옥에서 하루라도 더 고통받도록.”
“지하……!”
나는 얼어버렸다. 북부에서 절대 가고 싶지 않은 단 한 곳이 하르펠 성의 지하 감옥이었다.
그러나 루엘라는 노랫가락처럼 아름다운 운율을 담아 말을 이었다. 웃음을 띤 그녀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 나는 그분을 사랑하거든. 지금도 그분이 빨리 내 곁으로 돌아오셨으면 좋겠어.”
나는 거의 고함치듯 말했다.
“저는, 거기는……. 재판을 열어주세요! 재판을 거치지 않은 죄수는 지하 감옥에 보낼 수 없어요, 공작 부인!”
“돼.”
루엘라는 간단하게 말했다.
“나는 공작 부인이야. 돼.”
“흑…….”
“훗……. 나는 공작님이 돌아오시면 모르는 척해볼까 해. 그분이 너를 찾아내는 데 얼마나 걸릴까, 아리엘사? 그분도 내가 느꼈던 고통을 조금은 느껴주셨으면 좋겠어. 물론 아주 조금만.”
“세상에…….”
“밖에 아무도 없나?”
밀라가 문을 열고 고함을 치자 하녀들이 달려왔다. 그리고 나는 머리에는 두건이 씌워진 채 끌려 나갔다.
❄❅❄
판타지 소설에서는 주인공 파티가 던전에 들어가서 상대의 상상 속 최악의 괴물로 변하는 몬스터와 마주치는 상황이 종종 그려진다.
옥지기를 따라 걸으며, 나는 그러한 괴물이 사는 던전으로 떠밀려 가는 심정이었다.
지하는 따뜻하다는 내 상식과 달리, 하르펠 성의 지하 감옥은 겨울이 원래는 땅속에서 자라 나오는 것이라는 듯 싸늘한 냉기로 차 있었다.
그리고 그 고약한 냄새……. 냉기와 습기가 섞인 비린내 같은 악취는 그것을 맡는 것만으로도 병에 걸릴 것 같았다.
“흡…….”
내가 울음을 삼키자 옥지기가 말했다.
“곧 네 재판이 열릴 것 같으니 몸을 사리거라.”
옥지기는 내게 확인하고 싶은 듯 은근히 물었다.
“공작님을 유혹하려고 주술을 썼다면서? 사실이냐? 어쩌다가 그랬어?”
“…….”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아닌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앞만 바라보자 옥지기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는 어느 철창 앞에서 멈추어 문을 열었다. 내가 걸어 들어가자 그는 철컹거리며 문을 잠그고 말했다.
“게오르그 경을 생각해서 모포 한 장 더 넣었다. 왜 그랬냐……. 정말 딱한 일이로구나.”
나는 그의 발걸음이 복도를 울리며 멀어지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나는 그 소리가 사라졌을 때 중얼거렸다.
“그러게. 참 딱한 일이네요.”
나는 딱딱하고 좁은 침대 위에 놓여 있는 해진 걸레짝 같은 모포를 손끝으로 집어보았다가, 끔찍한 악취에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나는 옥지기가 넣어두었다는 비교적 두꺼운 새 모포를 몸에 돌돌 두르고 침대에 앉았다. 침대인지 의자인지 모를 만큼 딱딱했다.
지금까지는 걸어 다녀서 좀 덜했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니 습한 한기가 온몸으로 파고들어 왔다.
그때 철창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 감옥에서는 소리가 울려서 방향과 거리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게오르그? 너 아리엘사냐?”
노인의 쉰 목소리는 비교적 내 가까이에서 나고 있었다.
소리로 보아 내 앞에서 두 칸이나 세 칸쯤 떨어진 감방의 수감자 같았지만, 나는 무서워서 창살로 다가갈 수 없었다.
“놈이 너를 버렸구나! 그러면 게오르그도 버렸겠군. 크흐흐, 충신을 쳐내는 건 권력자의 첫 번째 망조지. 아아, 내 기도가 마침내 이뤄진 거야! 이제 하르펠가는 멸망할 거야!”
노인이 떠들자 사방에서 철창을 때리는 소리와 조용히 하라는 욕설이 들렸다. 중간에 누군가 고함을 쳤다.
“닥쳐, 할리사!”
그러자 할리사는 더 크게 고함쳤다.
“공작이 끼고 도는 시녀가 왔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