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98/128)

88화

“후……. 이제는 견딜 수 있을 거야.”

그는 나를 빤히 응시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놀리듯 말했다.

“일단은 놓아줄게. 오늘 밤은.”

나는 홀린 사람처럼 그대로 내 쪽방으로 뛰어갔다.

카이런 공작은 내가 문을 닫을 때 빙글거리며 말했다.

“문 단단히 잠가. 아리엘사.”

나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심장은 여전히 덜컹거리고 있었고 뺨에는 어느새 열이 올라 있었다.

내가 모르는 무엇을 담고서, 모든 것을 애써 농담인 척 말하던 그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

다음 날, 나는 카이런 공작이 깨어 움직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아직 창밖이 새카만 새벽이었다.

나는 후다닥 옷을 입었지만, 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어서 쪽문 앞을 서성였다.

죄 없는 치맛자락을 꼭 붙잡은 채 나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그의 발소리가 문 앞으로 다가왔다.

-아리엘사.

나는 놀라서 고함치듯이 대답했다.

“네, 공작님!”

-포슬란에 산불이 났다. 곡식 창고에 옮겨 붙으면 손해가 막심해. 다녀올 테니…… 너는 방 안에 가만히 있어.

그는 드물게도 조금 주저하듯 말했다.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할 수만 있으면 나를 데리고 가고 싶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는 내가 놀랐을까 봐 그러는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큰 산불은 아니야. 종종 있는 일이다.

나는 실은 그 산불이 원작의 억지력이 불러온 재난일까 봐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안심시켜주는 말에 겨우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도 안심시켜주고 싶어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문은 열지 못했다.

“네. 공작님. 꼭,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나는 그가 문을 잠그고 나가는 소리에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제 겨울의 초입으로 접어든 북부의 공기는 나날이 춥고 건조해지고 있었다. 자칫하면 산불은 치명적인 재난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하필 포슬란 창고 근처라니.

“자주 있는 일이라니까…….”

나는 그의 말을 애써 곱씹으며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자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새벽에 놀란 탓에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머리를 빗고 카이런 공작의 침대를 정리하러 나갔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하녀 네 명이 굳은 얼굴로 들어왔는데, 그중 둘은 내가 모르는 여자였다. 햇빛에 탄 살빛으로 보아 루엘라가 프라일가에서 데려온 하녀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사이에서 의기양양한 밀라의 얼굴을 보며 서 있었다.

“넌 이제 끝났어.”

밀라가 킬킬거리며 웃는 사이, 하녀들은 내 팔목을 밧줄로 묶었다.

❄❅❄

내가 두 하녀의 손에 끌려간 곳은 뜻밖에도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카이런 공작이 부재중이긴 하지만 공작 부인이 남편의 집무실을 잠시 사용하는 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야 했다. 한때는 내 직장이던 곳에 죄인으로 끌려오는 기분은 뭐라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루엘라는 아름다운 미색의 실크 드레스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나를 응시했다.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내가 겨우 말했지만 루엘라는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밀라가 소리쳤다.

“너는 하르펠 성에서 마법과 주술이 금지된 것도 모르느냐! 마법으로 공작님을 유혹하려고 한 년이 뻔뻔하기도 하지!”

그 말에 놀란 하녀들은 겁을 먹고 제 입을 가렸다.

역시 이번에도 내게 뒤집어씌울 모양이었다.

나는 밀라를 잠시 바라보았다. 자기가 언제부터 북부에 대해 잘 알았다고 저런 말을 하는지 실소가 나왔다.

이 방에서 가장 뻔뻔한 인간이 자기라는 것을, 아마 그녀는 끝까지 모를 것이다.

그때 손님방에 남았던 하녀 둘이 돌아와 루엘라에게 작은 나무함을 내밀었다. 사막의 꽃을 보관한 상자였다.

나는 놀라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제대로 짚었다고 생각한 루엘라는 승리감에 찬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뜻밖에 꽃 한 송이가 나오자 의아하다는 표정 반, 별것 아닌 게 나와서 신경질 난다는 표정 반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그녀가 카이런 공작의 들소뿔 브로치처럼 그것도 내다 버릴까 봐 겁에 질렸다.

“공작 부인, 그것은 정말 귀한 꽃이에요. 절대 버리시면 안 돼요!”

루엘라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꽃을 다시 상자에 넣은 다음 소파 위에 놓았다.

“네 말을 믿을게. 왜냐하면 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훔치는 습관이 있는 아이니까.”

그리고 루엘라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는 여전히 은은한 아우라로 휩싸여 있었고, 지극히 아름다웠다.

저런 미소를 이런 때에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의아해서, 나는 그녀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원작에서 묘사하던 아이 같은 순수한 기쁨이 깃든 얼굴에는 지금 원한과 의심이 물들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어디까지 바꿔버린 걸까…….

그때 루엘라가 물었다.

“말해봐. 공작님을 유혹해서 어쩌려는 생각이었지?”

“…….”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카이런 공작을 아끼기는 했지만 루엘라도 소중한 여주인공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타락한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가슴 아팠다.

“공작님께서는 올곧은 분이야. 그런 더러운 수법에 넘어가실 리가 없어. 네 아버지는 공작님이 아꼈던 가신이라는데 딸은 어찌 이 모양이지?”

“그를 욕하지 마세요!”

내가 발끈하자 루엘라의 눈이 즐겁게 가늘어졌다.

“그를 욕보이지 않으려면 네가 행실을 잘했어야지. 어디에 있어도 되고 있으면 안 되는지, 잘 알아서 처신했어야지. 안 그래, 아리엘사?”

“제 처신에 대해서는 공작 부인께서 가장 잘 아실 텐데요?”

나는 거의 어금니를 물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루엘라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순간 그녀는 양심이란 없는 여자 같았다.

“참 씩씩하네. 너 참 의연해.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꼈어. 공작님께서 아주 어리실 때부터 시중을 들었다는 아이가, 도무지 남에게 머리를 숙이며 산 것 같지 않았거든? 이상한 일이지, 안 그래?”

왜, 나 평생 머리 숙이며 살았는데! 엄마가 학교 가라면 가고, 아빠가 학원 가라면 가고! 선생님한테 욕먹으면 반성하는 척 머리 푹 숙이고!

내 분한 표정을 본 루엘라는 조금 인상을 썼다. 그러자 밀라가 나와서 내 등에 매질을 했다.

“아앗!”

등을 맞았는데 눈앞에 불이 번쩍였다. 잠깐 동안은 팔이 벌벌 떨려서 엎드려 있기도 힘들었다.

밀라는 그제야 속이 시원하다는 듯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카이런 공작이 없는 사이에 내게 이런 누명을 씌워서 매질까지 하는 건, 정말로 비열했다.

나는 이제는 루엘라에 대해 가졌던 무조건적 호감과 응원의 감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씩씩한 게 죄인가요? 저는 소중한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밟아 부순 적도 없고, 남에게 누명을 씌운 적도 없어요! 악!”

밀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내게 매질을 했다. 팔을 크게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은, 그동안 쌓인 걸 다 풀겠다는 듯했다.

나는 묶인 손으로 카펫을 쥐어뜯으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옆에서 지켜보던 하녀들이 고개를 돌릴 정도였지만, 루엘라는 어딘지 뿌듯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녀들에게도 자신을 거스르면 무슨 꼴을 당할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잠시만, 밀라.”

루엘라는 부드럽게 밀라를 제지하고는 내 쪽으로 상체를 조금 숙였다.

“얼굴을 보여.”

하지만 나는 아무 정신도 없었다. 등의 피부에 불이 붙은 것 같았고, 여전히 뜯겨 나가는 중인 것도 같았다.

내가 바닥에서 꿈틀거리기만 하자 밀라가 내 머리채를 붙잡아 머리를 들었다.

내 평생 당한 가장 굴욕적인 일이었다.

루엘라는 고통을 참느라 입술을 바르르 떠는 나를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그러자 밀라가 내 머리를 던지듯 놓고 물러났다.

루엘라는 사뭇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니, 아리엘사?”

“…….”

“이것이, 대답하지 못해?”

밀라가 또 내게 다가서려 해서 나는 울컥 대답했다.

“공작 부인께서 실수하시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저를 보내주시면 다시는-”

“-이것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악!”

밀라는 다시 회초리를 휘둘렀다. 한번 고삐가 풀리니 이제는 자제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만. 밀라.”

밀라는 씩씩거리며 겨우 물러났다.

나는 신음이 새어 나오는 게 싫어 이를 꽉 물었다.

“너, 혹시 공작님을 기다리느라 그렇게 당당한 거니? 그분이 오셔서 너를 구해줄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루엘라는 작게 웃었다. 나는 조금 멍했다.

내가 그렇게 기다렸던 여주의 진짜 모습은 이런 것이었다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똑똑히 대답하려 할 때 루엘라가 밀라에게 신경질적으로 턱짓을 했다.

그러자 밀라가 하녀들에게 말했다.

“썩 나가서 문 앞을 비워.”

하녀들이 재빨리 사라지자 루엘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 남은 것은 잔인한 분노가 전부였다. 나를 향한 질투와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원한에 가까운 화가 은은한 아우라에 실려 실내에 퍼지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엘라는 몹시 나직이 말했다. 혹시 누군가 문 앞에 귀를 대고 엿들어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아리엘사, 그분은 당분간 못 돌아오셔. 내가 그렇게 만들었거든.”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는 포슬란에 산불이 나서 갔다. 그렇다면…….

“내 아버님께서 사람을 보내주셨어. 영지 북부 숲에 살짝 불을 놓았지. 북부 사람들이 산불에 그리 민감하다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척박한 북부에서 식량과 땔감을 제공하는 숲은 몹시 소중했다. 추워서 나무가 빨리 자라지도 않으니 숲은 한번 잃으면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공작 부인이 외부인을 끌어들여 일부러 불을 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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