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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97/128)

87화

그는 진심으로 마음이 상했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나는 그와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지고 싶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냥 내 방으로 향했다.

그도 오늘은 나를 상대할 기분이 아닌지 나를 내버려 두고 침대로 향했다.

나는 소리로 그가 곧 잠자리에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내 퇴근을 의미했다.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빗었다. 난방을 위해 그가 더 들여준 화로에 장작도 몇 개 더 넣고 침대에 들어갔다.

그때 내 문을 거칠게 짚는 소리가 났다.

-아리엘사.

카이런 공작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꺼칠했다.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지만, 막 잠들었다 깬 것 같은 사람이 목이 잠길 일이 뭐가 있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으로 가다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공작님?”

-아리엘사. 열어봐. ……열어.

보통 같으면 그는 내게 나오라고 명령할 터였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무슨 일이신데요?”

-젠장, 열어봐!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는 주먹으로 내 방문을 쾅 쳤고, 나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공작님, 무, 무슨 일이신지, 내일 아침에 말씀해주세요!”

-아리엘사. 네가 필요해. ……네가.

카이런 공작의 말투는 마치 목이 타서 물을 찾는 사람 같았다. 아니면 응가가 마려운 커다란 강아지 같기도 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지금 문을 열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점점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왜요? 잠옷이라면 서랍 안에 새것 있어요!”

카이런 공작은 내 목소리가 멀어져서 그러는지 문을 쾅쾅 때렸다.

-문 열란 말이야! 얼굴 보고 얘기해, 아리엘사. 젠장!

“공작님, 지금, 너무 이상하시다고요! 저 무서워요.”

카이런 공작이 혼자 씩씩대며 욕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그의 광기와 거리가 멀었다. 나는 겁이 나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가 무엇을 집어 던졌는지 우지직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나는 겁에 질려 문으로 다가가 귀를 대어 보았다. 그가 씩씩거리며 방 안을 돌아다니는 소리가 문을 통해 먹먹하게 들렸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카이런 공작은 단순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만들 수 있지?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서 문을 벌컥 열었다.

“공작님! 괜찮으세요?”

그는 상의도 벗어 던졌고, 방 중앙 카펫 위에는 의자 하나가 박살 나 있었다.

그 앞에서 씩씩대던 카이런 공작은 나를 보자 순식간에 애절한 눈빛으로 변했다.

나는 그때 확신했다. 그는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향해 다가왔고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공작님? 옷은 어디 갔어요?”

그는 한 걸음씩 다가오면서,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나직이 말했다.

“벗어버렸어. 더워서. 나는 지금 몹시 더워. 아리엘사.”

“더운 날은 아닌데요,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거든요. 감기라도 드시면 어쩌시려고요.”

뒷걸음질 치던 내 등은 벽에 막았다. 내가 그 느낌에 소스라치는 걸 보고, 그는 이글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려야 했다. 틈을 보아 방에서 도망친 다음 체이어스를 불러와야 했다.

“공작님, 의자는 왜 부수셨어요?”

“의자? 그냥……. 견딜 수가 없었어. 네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잖아. 이리 와. 나를 좀……. 아리엘사, 나는 지금 네가 필요해. 나는 지금, 좀 예민해…….”

그는 벽에 팔을 짚어 나를 그의 품 안에 가두었다. 그의 호흡은 달음질쳐 온 사람처럼 얕게 헐떡이고 있었다.

내가 말을 하지 못한 것은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고, 그의 이마가 내 어깨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하아……. 그래. 너에게 닿으면 좀 나아질 줄 알았어. 내가 맞았어. 그런데 네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 제길…….”

그는 취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를 으스러트릴 듯 껴안았다.

“공작님……!”

나는 숨이 막혀 크게 말하지도 못했다. 그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문지르며 내 살갗과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있었다.

“너 이렇게 냄새가 좋았었나? 미치겠어. 가만히 있어. 제발 겁먹지 말고 가만히 있어.”

“……!”

내 체취를 맡으려던 그의 입술이 머리카락 사이로 목을 스치는 바람에, 나는 소스라치고 말았다.

나는 그를 밀치고 방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내 손목은 이미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가자. 좀 눕고 싶어. 심장이……. 좀 진정하게 내 옆에 있어, 아리엘사.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공작님, 지금 좀 이상하세요. 제발…….”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지만 나는 이미 침대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때 손님방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어젖힌 밀라는 우리를 보고 내가 본 중 가장 커다란 도끼눈을 떴고, 루엘라는 새파랗게 질린 채 서 있었다.

나는 엉망진창인 방 안과 내 손목을 끌고 침대로 가는 중인 헐벗은 카이런 공작과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그러나 공작은, 마치 방해받은 것이 불쾌한 것 같은 얼굴을 하더니, 내 팔을 확 잡아당겨 나를 품 안에 숨기려 했다.

그는 그런 채로 몹시도 건조하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엘라. 이 밤에 어쩐 일이오? 노크도 없이.”

“고, 공작, 공작…….”

씩씩대는 루엘라는 호흡곤란이 온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건 끔찍한 광경이었다.

나는 이미 이 상황을 어떻게 해보려는 의지를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문득, 그녀가 어떻게 하필 이 순간에 찾아왔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저 아이와…….”

내가 가슴을 때리자 카이런 공작은 그제야 나를 놓아주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방은 내 침실 시녀가 치울 겁니다. 부인, 하실 말씀이 있다면 내일 보지요.”

루엘라는 대답 대신 흐느낌을 흘렸다.

그러나 그녀는 우는 대신 쿵쾅거리며 걸어서 카이런 공작의 침대로 갔다. 시트를 헤집더니 배게 아래를 뒤져 아주 작은 새빨간 천주머니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구두 뒤꿈치로 그것을 으깨듯 밟았다.

그녀는 그런 다음 이를 갈며 말했다.

“네. 내일 뵙지요. 공작님.”

루엘라가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몸을 획 돌려 나가버리자, 밀라가 뛰어 들어와 그 주머니를 집어 갔다.

문이 쾅 닫히자, 카이런 공작은 비틀거리며 소파로 늘어졌다. 넘어지기 직전에 내 팔을 잡아당겨 나는 그와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소파에서 그의 맨 가슴에 엎드린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이미 날아간 이성에, 심장이 이번엔 다른 이유로 뛰기 시작했다.

왜 심장은 머리와 따로 노는 건지.

하지만 나는 카이런 공작의 피부에서 아까의 들뜬 열기가 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공작님, 이제 괜찮으세요?”

그는 대답 대신 내 등을 가볍게 쓸 듯 어루만졌다.

나를 놓아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가 너무 안도하는 듯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놀랐나?”

“네. 심장 멎을 뻔했어요.”

“괜찮아. 이제 끝났어.”

나는 그가 껴안고 있는 내 머리를 억지로 들었다.

“공작님?”

“음……. 하지만 역시, 널 안고 있는 건 좋은데?”

그는 지친 얼굴로 억지로 웃었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우리 공작 부인께서 나한테 사랑의 주술을 쓴 모양이군.”

“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낮에 들었던 희미한 소음은 내 예민함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밀라가 몰래 들어와 카이런 공작의 침대에 마법을 건 물건을 숨겨두고 간 것이다.

“그 효과가 하필 저에게…….”

카이런 공작은 차분한 얼굴로 일어나더니 바닥에서 잠옷을 집어 입었다. 그리고 침대 곁으로 가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아까 루엘라가 빨간 주머니를 깨부순 자리였다.

그리고 그는 강렬한 혐오감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그게 뭐죠?”

그는 화가 나서 오히려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은 그가 욕설을 하기 싫을 때 하는 습관이었다.

나는 침대 곁 바닥에서 나머지 부스러기를 쓸어 모았다. 나는 그 흰 부스러기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카이런 공작이 내게 선물했다가 가져갔던 들소뿔 펜던트 조각이었다.

“아…….”

그는 침울하게 말했다.

“마법을 걸 소모품을 잘못 골랐군.”

“설마…….”

“이 물건이 내 것이 아니라 네 것이라서 마법이 꼬인 건가? 나는 아까 너를 안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거든. 아주 미치도록…….”

말을 멈추며 나를 슬쩍 돌아보는 그의 눈동자에, 한 줄기 광기가 스쳐갔다.

그러나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깝군.”

나는 이제야말로 달아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소파로 돌아가 버렸다.

이제는 구할 수도 없는 귀한 펜던트 부스러기를 내다 버리자니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이 펜던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마 카이런 공작은 지금 루엘라가 그에게 사랑의 주술을 걸려고 한 사실보다, 그가 의미 부여하는 물건을 그녀가 자기 욕망의 소모품으로 써버린 것에 더 분노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심정적으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루엘라 공작 부인은 카이런 공작이 목숨처럼 여기는 북부의 주인으로서의 명예와 의무감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었다.

그것은 내가 이 세계의 사건에 개입한 것과는 무관한 일이었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카이런 공작도 마음에 상처를 입은 듯해서, 나는 입을 다문 그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괜찮으세요?”

“아니.”

그는 일어나며 내 팔목을 와락 잡아당겨 내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확히 아까와 같은 행동이었지만,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던 아까와 달리, 지금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는 내 목덜미에서 숨을 깊이 한번 들이마신 다음 나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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