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96/128)

86화

“뭐 해.”

나는 주춤거리며 침실로 나갔고, 카이런 공작은 피곤한 듯 외투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튜닉까지 벗어서, 나는 당황한 채 그의 외투를 주워 들었다.

그새에 더 몸이 좋아지면 어쩌자고…….

잠옷을 꺼내려 외투를 껴안은 채 옷장으로 가던 나는 멈추고 말았다.

카이런 공작이 뒤에서 내 어깨에 술 냄새가 섞인 숨결을 뱉고 있었다.

“아주 까불었지, 너.”

그의 음성은 평소보다 탁했지만 약간 들뜬 듯도 들렸다. 나는 뜻밖의 말에 천천히 뒤돌아섰다. 탄탄한 가슴이 시야를 꽉 채워 눈 둘 곳이 없었다.

“고, 공작님?”

“왜?”

내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먼저 옷을 입으시고…….”

그는 한 발 물러나더니 명령했다.

“입혀.”

“네?”

“못 들었나? 너는 이제 내 침실 시녀야. 이제 네가 할 일이란 저녁에 내 잠자리를 봐주고 아침에 내 잠자리를 치우는 일뿐이야.”

그의 연설을 듣기 싫어서 나는 달리다시피 가서 옷장 문을 열었다. 그의 외투를 걸려고 보니 이미 옷장에는 그의 옷이 가득했다.

“설마, 아직도, 아니, 계속 여기서 지내신 거예요?”

“…….”

나는 카이런 공작 앞에서 그의 잠옷 상의를 흔들며 말했다.

“루엘라 공작 부인은요? 공작님!”

그는 턱을 돌려 시선을 피한 채 말했다.

“글쎄.”

“공작님!”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나와 내가 흔드는 잠옷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약한 표정이었다.

“입혀줄 생각 없으면 말아.”

“……됐어요!”

그러자 그는 즉시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고, 나는 그의 잠옷을 머리 위로부터 푹 씌웠다.

그는 팔을 쓱쓱 끼더니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술 냄새가 훅 끼쳤다.

그는 단추를 채우지도 않은 잠옷 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주저앉듯 앉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킬킬대며 말했다.

“그리고 화해했어.”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울적하게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 계세요?”

“방금 우리는 술을 마시며 화해했어. 와……. 그녀가 취해서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나? 신기해. 정말 신기하다고. 미모가 설득력이라는 걸 나는 오늘 깨달았어.”

당연하지. 그 아우라가 보통 아우라냐고.

“공작 부인의 눈에도 공작님이 그렇게 보이실 거예요.”

그의 손이 순식간에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균형을 잃고 소파에 무릎을 대고 그에게 엎드리듯 팔을 짚고 말았다.

그는 내 볼을 어루만지며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저야…….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하도 봐서 이제는 조금 질려요.”

“아하.”

그의 손끝이 내 볼을 찌르듯 눌렀다.

“설마 그럴 리가. 훗.”

그는 지금 정말로 취한 것이 틀림없었다. 내게 자기 미모를 과시하다니, 취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면 미친 것이다.

나는 손목을 억지로 빼낸 다음 침대로 가서 그의 잠옷 바지를 올려두었다.

“그런데 왜 여기 계시냐고요. 화해하셨다면서요.”

“아니, 얘기 도중에 그녀가 술에 취해 잠들고 말았어. 나는 아마 술에 취해 우리가 화해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거고, 숙취 때문에 침실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공작님…… 정말 재수 없어요.”

불쑥 뱉어버린 나는 머리털이 설 만큼 당황했지만, 내가 너무 단호하게 말해버린 탓에 그것은 어떤 사실일 뿐, 전혀 무례한 말이 아닌 것 같이 들렸다.

카이런 공작도 거슬렸는지 잠깐 눈썹을 움찔거리다가, 머리가 무거운 듯 소파에 머리를 떨어트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은 즐거웠어.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을 떠올렸거든. 아아……. 나는 미친 건가?”

카이런 공작이 스스로 그렇게 뱉어주어서 고마울 정도였다.

“네. 맞아요.”

그는 방금까지 취해서 늘어져 있었다는 게 거짓이었던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키가 갑자기 더 커 보였다.

“너, 오늘은 말을 조심하지 않네. 벌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 그게, 공작님도 광장에서 무릎 꿇고 있어 보시라고요.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아하. 수치.”

그는 마치 수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침대에 막혀 더 뒤로 가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몰린 나를 바라보더니 씽긋 웃었다.

그는 순간 재빠르게 다가왔고, 나는 순간 몸을 빼어 쪽문으로 달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후다닥 잠근 쪽문을 카이런 공작이 주먹으로 쾅쾅 두들겼다.

-감히 문을 잠가? 넌 내 침실 시녀야. 이불이라도 덮어줘야지!

나는 그의 나른한 말투를 듣기 싫어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소리쳤다.

“침실 시녀는 침실을 정리하는 시녀지 침실에서 자는 시녀가 아니라고요! 푹 자고 정신 차리세요! 좋은 꿈이라도 꾸고 제정신 찾아오시라고요!”

그는 잠시 조용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네 꿈을 꾸면 되겠군.

다행히 잠금장치는 튼튼한 것 같다고, 안심하고 침대로 돌아가려 할 때 그가 말했다.

-너는 내가 어떤 심정으로 지내고 있는지 알아야 해. 얼마나…….

나는 숨도 참고 한참 기다렸지만,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말을 잇지도 내 방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나는 그대로 침대로 가서 쓰러졌다.

소설을 읽을 땐 카이런 공작이 가끔 맛 간 짓을 할 때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였는데, 직접 당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잘생기고 멋지고 미치니까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무사히 성탑 감방에서 벗어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승리였다.

카이런 공작이 말한 ‘우리가 함께 만족할 만한 방법’은 나를 자기 침실에 숨겨놓는 것이었다.

그는 아마도 나를 침실 시녀로 삼아 전보다 더 가까이 두는 것으로 루엘라를 자극해서, 이 냉전을 더 길게 끌고 가려는 계산까지 한 것 같았다.

내가 집무실에 있는 한 루엘라와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나를 멀리 두기도 싫으니, 이것이 그가 찾아낸 최적의 답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루엘라를 얼마나 더 기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는 나로 인해 세상 최악의 유부남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 올린 채 생각했다.

그의 모든 선택이 단순히 나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마 루엘라의 반응, 카이런 공작 못지않은 노회한 귀족인 레오르트 프라일의 반응까지 다 계산하고 있을 터였다.

아마 지금은 레오르트 후작의 입김이 루엘라가 성급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루엘라가 공작 부인의 지위를 유지하는 게 모두의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카이런 공작은 이 갈등을 키워서 후작을 견제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밖에서 보기에 이 결혼은 카이런 공작이 아내에게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를 갖겠다’라는 카이런 공작의 선언은 이제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었다.

재판을 청구하겠다는 내 작전은 이렇게 형편없이 끝나고 말았다. 나는 앞으로 더 신중해져야 했다. 그에게 또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

가시방석도 그런 가시방석이 없었다.

쪽방에 앉아서 가만히 있으면 바늘 떨어지는 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랐다.

지나가는 하인들의 발걸음, 이따금 나는 기사들의 금속음 섞인 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가슴을 졸여야 했다.

루엘라가 올까 봐 겁이 나서였다.

내 불안은 역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점심때가 막 지난 무렵, 카이런 공작의 침대를 정리하고 있는데 손님방 문이 덜컥덜컥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란 사슴처럼 가만히 굳어 있었다.

아름다운 흰 문의 문고리가 덜컥덜컥, 혼자서 떨렸다.

그리고 잠잠해졌다.

내 심장은 덜컹거렸고, 그때부터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카이런 공작이 머무르는 침실을 일부러 열어볼 만한 사람은 성안에 하나밖에 없었다.

어느 때인가는 루엘라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날이 있을 것이다.

예전에 내 방에 몰래 들어와 내가 훔쳐 간 가운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던 그녀라면, 성의 안주인이 된 지금 남편이 지내는 방에 들어오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간수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터덜터덜 쪽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실외에서나 입는 클록을 걸친 다음 창문을 활짝 열었다. 정원 산책도 불가능하니 그렇게라도 찬 공기를 쐬고 싶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시장 거리의 소음에 집중하니 손님방 문밖에서 나는 소리에 신경을 끊는 데 도움이 되었다. 완전히 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는 그대로 창가의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고 말았다.

내가 눈을 뜬 것은 작게 찰칵하는 소리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심장이 방망이질 쳤고, 나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쪽방의 문으로 다가갔다.

정말 문을 열기 싫었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손님방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긴장 탓에 너무 예민해져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지, 나는 쪽방으로 돌아가 좌절감 속에서 고민했다.

❄❅❄

밤이 되었을 때, 다시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났다.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던 나는 다시 깜짝 놀라 쪽방에서 튀어 나갔다.

이번에는 카이런 공작이었다.

그는 내가 자기를 마중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웃었다.

“오늘은 아무 사고도 치지 않았겠지?”

나는 묵묵히 그의 옷시중을 들었고, 그는 내가 다시 마음에 안 들어졌다는 듯 손끝으로 내 턱을 살짝 꼬집듯 붙잡았다.

“물었잖아.”

“이 안에 갇혀서 칠 수 있는 사고가 뭐가 있겠어요. 공작님 옷장 어지러트리기요?”

“훗. 네가 얌전해지니까 기분이 좋아. 하냐크족 왕자를 붙잡았을 때보다 더.”

나를 적국의 전쟁포로가 된 왕자와 비교해준다고 해도 특별히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포로는 포로 아닌가.

나는 그의 옷을 치우고 인사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만 쉬셔요. 공작님.”

“말동무도 되어주지 않을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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