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재판을 청구하겠어요.”
“…….”
그는 한층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그 시선을 맞받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공평한 싸움이 아니지 않는가. 그는 몸에서 빛을 흘리는 절세 미남이고 나는 엑스트라 시녀란 말이다.
내가 붉어진 얼굴로 눈을 피하자 카이런 공작은 승리감을 묻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간단히 대답했다.
“안 돼.”
“그건 영지 법률에 있는 내용이에요! 공작님은 재판을 거절하실 수 없어요.”
“그 법을 집행하는 것은 나야. 집행하지 않겠어.”
“공작님!”
그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조금 울컥한 듯 말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도둑으로 몰려 추궁당하고 싶나? 네가 그런 모욕을 당하도록 내버려 둘 것 같아?”
“헉……. 정말…….”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더니, 정말 그랬다.
“저, 저한테 누명 씌운 건, 공작님이시잖아요!”
그는 코웃음을 치며 의자에 앉더니 말했다.
“안 돼.”
“아니요, 그건 공작님의 의무예요.”
“안 된다고 했잖아.”
“왜요!”
“나는 누구에게도 질 생각이 없거든.”
“……네?”
“내가 누군가에게 누명을 씌웠는데, 그게 밝혀지게 놓아둔다? 나 스스로 재판에서 지도록 말인가? 어림도 없지. 내 범죄는 완전범죄여야만 해.”
“세상에!”
“법대로면 너는 지하 감옥에서 5년쯤 썩어야 해. 추위를 많이 타는 너는 하루도 견디지 못할 거야. 난 그 꼴 못 봐.”
“공작…….”
이쯤에서 내 머리는 더 이상의 작동을 거부했다.
나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영주님은 북부의 지배자로서의 신성한 의무를 지니셨잖아요. 범죄자에게는 재판을 열어주셔야만 해요. 지난번에 법전을 손질할 때 행정관들과 논의하시던 거 다 기억하고 있다고요. 잡아뗄 생각하지 마세요!”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잠깐 공중에 떴다가 탕 하고 돌바닥을 치는 소리에, 내 심장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쏘아보며 천천히,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고, 공작님……?”
카이런 공작은 내 양어깨에 손을 짚은 채 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가 취소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제, 제가, 왜 그러겠어요…….”
“아리엘사, 내가 방금 말했을 텐데. 재판이 열리면 너는 감옥에 갈 거다. 하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 돼. 왜냐하면 멀거든.”
“……?”
“감방 시설을 꾸미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러면 너를 보러 가려면 한참 걸어야 해. 그리고 그 역겨운 지하 감옥 냄새가 네게 배는 것도 싫어. 아리엘사.”
“끄으으……!”
“내가 귀찮은 일 따위 할 생각 없다고 말했을 텐데.”
나는 울컥 소리쳤다.
“할 거예요! 할 거라고요! 체이어스 경이 식사를 넣어주러 오시면 요구할 거예요. 체이어스 경은 절대 그걸 듣고 무시하지 못할걸요?”
그가 꽉 쥔 어깨가 아파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내가 옳게 짚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뭘 원하지?”
나는 승리감에 설핏 웃었다. 그는 내가 살짝 증오스럽다는 눈을 한 채로도,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마음을 돌린 척하다가 도망가려는 계획보다는 낫군. 좋아.”
“제, 제가 언제…….”
그 계획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는데!
나는 어색하게 소리쳤다.
“어쨌든! 제 혐의를 풀어주세요.”
“……네가 도망가더라도 다시 잡아들일 명분이 없어지도록 말인가?”
“…….”
나는 세상 순수한 아기 고양이 같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손에 다시 꾸욱 힘이 들어갔다.
“내가, 너에게 다른 누명은 씌우지 못할까 봐?”
“공작님!”
무서운 인간!
나는 눈을 피하며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때 가서…….”
“흥.”
“아…….”
그가 내 어깨를 우악스럽게 쥐기에, 나는 그가 나를 밀쳐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자기 가슴으로 밀치듯 안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그가 말할 때마다 그의 가슴에서 울림이 전해져왔다.
“맹랑해. 내 목덜미를 물어보겠다고 날뛰는 꼴이 아주 맹랑해…….”
내 목소리는 한없이 기어들어 갔다.
“고, 공작님이 잘못……하셨어요.”
“알아. 그런데 난 잘하고 싶은 게 아니야. 널 갖고 싶은 거지.”
“…….”
고개를 조금 돌려도 코로 맡아지는 그의 체취가 너무 짙었다. 정신이 없었다.
정신이 없어서인지, 그의 목소리가 심지어 감미롭게 들렸다.
“무슨 벌을 받고 싶지? 게오르그를 끌어댄다 해도 탈옥범에게 무조건 사면은 불가능해.”
“…….”
“생각해뒀을 텐데.”
나는 거의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별로……. 그것까진…….”
“좋아. 내가 생각해보지. 우리 함께 만족할 만한 것으로.”
그의 더운 손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더니 멀어졌다.
나는 순식간에 그가 나가고 쿵 닫힌 문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당했다…….”
이 벌은 내가 만족할 만한 것이어야 했다. 최소한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것 중에는 우리 둘이 ‘함께’ 만족할 만한 벌은 없었기 때문이다.
❄❅❄
다음 날 나는 체이어스와 기사들에 의해 광장으로 끌려갔다. 죄인들이 재판 때 입는 누렇고 거친 마 로브를 걸친 채였다.
손목과 다리에도 사슬이 채워져서 나는 정말 끔찍한 죄인처럼 보였다.
사슬의 무게감과 걸을 때마다 몸에서 나는 쩔렁거리는 사슬 소리는 그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없었다.
나는 체이어스에게만 들리기를 바라며 조그맣게 물었다.
“체이어스 경? 우리 어디 가요? 절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예요?”
그러나 체이어스는 못 들은 척했다.
광장을 지나던 사람들은 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 북부 사람들은 죄인이 광장에 끌려 나오면 침을 뱉거나 돌을 던졌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를 아버지를 잃은 순진한 아리엘사로 기억하고 있는 데다, 기사들이 내 주변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어서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끔찍한 기분이었다.
“아리엘사. 꿇어라.”
체이어스가 내 앞에서 물러서며 말하기에 나는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하르펠 성의 공무를 맡은 늙은 비서관이 나오더니 스크롤을 펴서 큰 소리로 읽었다.
“북부의 주인 나 카이런 하르펠은, 사소한 착오로 하르펠가의 보물이 소재한 장소를 허락 없이 옮긴 아리엘사 로크만의 죄를 용서하노라. 게오르그 로크만의 딸은 하르펠가의 시녀로 평생 봉사하여 그 은혜를 갚으라.”
“헉!”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평생’?
“쯧! 감사한다고 말해.”
체이어스는 내게 경고하듯 혀를 차며 일렀다.
내가 그래도 멍청하게 있자 그는 내 머리를 눌렀고, 나는 대답 대신 앞으로 엎드렸다.
나는 나를 째려보는 비서관을 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공작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기사들이 다가와 내 팔다리를 풀어주었다. 어느 틈에 노란 죄수의 로브도 벗겨져 나갔다.
내 신체가 자유로워지는 데는 채 삼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의 자유는 이미 저 하늘 너머로 날아간 이후였다.
시녀. 평생. 봉사…….
나를 구경하다가 흩어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저런 쯔쯔, 게오르그 경의 딸이 어쩌다가.
-저게 다 아빠 정이 그리워서 그래.
-과연 우리 공작님의 가신 사랑은 눈물겨울 정도라네. 한번 거둔 사람은 끝까지 돌보시지. 그런데……. 쯔쯔쯔.
체이어스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내 등을 가볍게 밀어 성안으로 데려갔다.
❄❅❄
“여기는…….”
체이어스가 나를 데려간 곳은 루엘라가 쓰던 손님방이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는 줄 알고 겁을 먹었다가, 이제 그녀는 공작의 침실을 쓸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 안심하고 들어갔다.
역시 방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이 방은 내게 주어질 방이 아니었다.
내가 두려운 눈으로 빈 침실을 보자 그가 말했다.
“너는 저기, 쪽방. 보여?”
이 귀빈 손님방은 바로 옆에 수행자나 하인이 묵는 쪽방과 어어지는 문이 달려 있었다. 밀라도 거기서 지냈다.
“네.”
“쪽방에서 밖으로 통하는 문은 잠겨 있으니 이 침실로만 출입할 수 있어.”
“…….”
내가 멍청하게 고개를 들자 체이어스는 돌아가려는 듯 문 앞으로 가서 말했다.
“너는 이제부터 공작님의 침실 시녀다. 죽을 때까지, 급여 없이.”
“예에, 예?”
내가 목을 삐걱거리며 돌리자 체이어스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사면장에 은혜를 갚기 위해 봉사하라고 하셨지 않아. 돈 받는 봉사도 있어?”
“헉…….”
체이어스는 잊을 뻔했다는 듯 말했다.
“재정관이 네 앞으로 보관된 돈은 내어주지 않을 거다. 공작님 허락 없이는.”
지난번에 급하게 도망치는 바람에 내 수중에 있는 돈은 많지 않았다. 내 재산 상당 부분은 재정관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게 다 묶인 데다 앞으로 수입도 없다.
카이런 공작은 나를 빈털터리로 만들어 도망갈 꿈도 꾸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흑…….”
손님이 없는 고급스러운 손님방은 횡할 정도로 넓어 보였다. 나는 울먹거리며 방 안을 바라보았다.
“이 문도 잠겨 있을 테니 엉뚱한 생각 마라, 아리엘사.”
“…….”
체이어스는 갑갑해서 미치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돌아갔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내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나는 침대 옆에 있는 문을 열고 쪽방으로 들어갔다. 쪽방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손님방이기 때문에 예상보다 넓고 깨끗했다. 오히려 내 예전 방보다 고급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내 소중한 사막의 꽃을 서랍에 잘 숨겨놓고 창문을 열어보았다.
전의 내 방과는 다른 방향으로 창이 난 탓에 나는 시장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나 빼고 모두가 자유로운 것 같았다.
❄❅❄
새 방이 낯설다고 느낀 건 내 착각인 모양이었다. 밤이 되어 사방이 조용해지자 나는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때 손님방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고, 바로 내 쪽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카이런 공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