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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94/128)

84화

루엘라가 다급히 돌아가는 구두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 카이런 공작은 내 감방문 앞에서 말했다.

문 앞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나는 갑자기 가까워진 그의 목소리에 놀라 움찔하고 말았다.

-일단 쉬어. 앞으로는 이런 꼴 안 보게 할 테니.

그 말은 루엘라에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옷자락을 꼭 쥐었다. 대답이 도저히 나오지 않아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조금 후, 내 대답을 듣기를 포기했는지 카이런 공작은 문 밑으로 수갑 열쇠를 밀어 넣고는 돌아가 버렸다. 나는 열쇠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주워 수갑을 풀었다.

몸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탈진한 나는 침대로 몸을 던져 정신을 잃듯 잠들고 말았다.

눈을 뜨니 다음 날 아침이었고, 작은 창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 시 방어선이 되는 성탑의 창이란 고작 사람 어깨너비 정도의 크기라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여기서는 내 허브를 건강하게 키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온실에 보낼 수도 없으니 이 허브들에게도 나와 있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너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니……?”

나는 허브에게 서글프게 말하고는 화로에 장작을 두어 개 더 넣었다.

그때 감옥문 바닥의 작은 덮개가 열렸다.

벌써 아침 식사인가 생각한 순간, 바닥에 얼굴을 댄 사람의 눈과 마주쳤다. 밀라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녀는 한쪽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사납게 말했다. 다급한 말투를 보니 몰래 숨어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배은망덕한 것! 우리 공작 부인을 얼마나 곤란하게 하려고 하는 거야.”

“나는…….”

이제 북부 사람들은 모두 배은망덕한 아리엘사를 손가락질할 것이다. 하지만 저 여자에게만은 그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조금만 더 기운이 있었다면 잘 쪼개진 얇은 장작을 하나 집어서 그 틈으로 마구 쑤셔주었을 텐데, 나는 아직 사막에서 잃은 체력을 다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그녀 쪽으로 등을 보이고 섰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녀를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얄밉게 말했다.

“내가 여기서 꺼져줬으면 좋겠어요?”

“당연하지! 우리 아가씨가 얼마나 괴로워하시는지 알아? 얼른 죽어버려. 자결이라도 하란 말이야!”

-무슨 짓이지?

체이어스의 목소리에, 밀라는 말 그대로 공중으로 튀어 오르듯 문에서 사라졌다.

-공작 부인께서 출입이 금지당한 것을, 하녀는 출입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이해했나?

밀라는 대답도 없이 달아났다.

체이어스는 여전히 열려 있는 투입구로 식판을 넣어주고는 덮개를 닫았다.

체이어스 경 하고 부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이제는 내가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치 없음이나 무심함이 능력 부족이 아니라 관심의 부족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죄였다. 더구나 그 상대가 나를 특별히 여겨주고 있었다면.

나는 이제는 체이어스가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사과할 용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 돼요. 아시잖아요.”

-내가 뭘.

그는 화를 삭이는 듯 잠시 후에 말했다.

-내가 뭘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제는 다 네 몫이야. 아리엘사.

나는 문에 붙어 다급히 말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그가 얼마나 짜증스러운지는 목소리로 충분히 전달되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공작님을 위해서예요!”

-……넌 그게 문제야.

나는 체이어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은 제자린데 몸만 도망치는 게 무슨 소용이지?

체이어스는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마음……? 그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나는 분해서 울먹이며 침대로 몸을 던졌다. 타닥거리며 장작이 타오르는 화로를 바라보며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지금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다고…….”

❄❅❄

카이런 공작이 나를 찾아온 것은 이틀이 더 지난 저녁이었다.

그는 감방문을 직접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약간 인상을 썼다. 그의 기준에서는 후끈하게 더워서 그런 것 같았다.

“공작님.”

나는 막 집어넣었던 장작을 슬쩍 빼서 벽 앞 장작 무더기로 던지며 눈을 내리깔았다.

“어디 안 갔나? 훗.”

그는 방금 자기가 한 말이 퍽 재미있는 농담이라는 듯 웃기까지 했다.

내 취향, 나라는 인간을 이룬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이 일었다.

‘자기가 날 가둬놓고 어디 안 갔냐고? 나 정말 저런 인간한테 반했던 거니……?’

까닭 모를 울분과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지는 나를 내버려 둔 채, 카이런 공작은 내가 집어 던졌던 장작을 줍더니 다시 화로 안에 넣었다.

“바빴어. 너 때문에 영지를 비우는 바람에 밀린 일이 많았거든. 그리고 꼬인 일도.”

아무렴, 꼬인 일도 많았을 것이다.

레오르트 후작이 불참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가 이 결혼식을 얼마나 모욕적으로 느꼈을까.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프라일가의 불만 표시가 전달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프라일가에서는 입도 뻥긋 못하더군. 애초에 너를 빼돌리려 한 게 헤리어트였으니까. 내가 그를 브로치를 훔친 공모자로 의심하니 프라일 일족 전체가 한꺼번에 닥치던데. 훗.”

내 짐작을 즉시 반박해버리고는, 카이런 공작은 꽤 심술 맞은 미소를 띤 채 의자에 앉았다.

“…….”

나는 좌절감을 느꼈다. 그의 두뇌 회전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 성탑 밖으로 나가는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게는 시녀 배역이 어울렸다. 체이어스로 빙의했다면 당장 능력 부족으로 쫓겨났을 것이고, 황실의 인물로 태어났다면 제국이 망해버렸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자괴감에 허덕이는 동안, 그는 마치 내 괴로움을 즐기는 듯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나 재수 없는지.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가만있어. 날 봐.”

“…….”

보라고 한다고 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 얼굴만 붉어졌다.

카이런 공작은 그러나 나를 더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내 붉어지는 뺨이 마치 하르펠 성에서 바라보이는 능선의 석양인 양 은은한 미소를 띤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르펠에 오자마자 내 심장은 다시 탈이 난 것 같았다. 나는 두근거리는 내 심장 말고 다른 것에 집중하고 싶어 얼른 말했다.

“저 계속 여기 갇혀 있어야 해요?”

“그래.”

그는 즉시, 몹시 간단히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획 들어 그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기분이 좋은 듯한 기색으로 상체를 조금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추려 들었다.

“네 죄는 게오르그 경의 공을 생각해 특별 사면령을 내리겠다고 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다. 하지만 그렇게 해주면 너는 또 달아나려고 하겠지. 내가 귀찮은 일을 사서 하는 걸 본 적 있나?”

“헉…….”

실은 내가 계속 여기 갇혀 있어야 하냐고 질문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나는 여기 갇혀 있는 게 미칠 것 같으니,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간절히 사정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가 내가 포기한 것으로 생각하고 안심하면 눈치를 보다가…….

하지만 그는 내 머릿속을 간파한 듯 아예 꺼내주지도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백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 징그러운 인간!

“차…… 한 잔 드릴까요?”

“좋지. 그리웠어.”

나는 기름기가 다 빠져나간 듯한 상태로 일어났지만, 그는 내 제안이 반갑다는 듯 방긋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겨울딸기 차는 따뜻하고 향긋했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동시에 잔을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차를 호오 불어 한 모금을 음미했다. 의도하지 않은 박자였다.

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건 차 한 잔 정도로 달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마시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을 데를 찾아 무심코 두리번거리기에 나는 얼른 일어나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잔을 건네는 대신 내 손을 꽉 감싸 쥐었다.

찻잔을 쥐고 있어 더 뜨거운 손바닥이 내 손등에 닿자, 가슴속까지 데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러지 말라고, 내가 이럴 때마다 얼마나 화가 나는지 아냐고, 언젠가는 말해야 하는데 왜 매번 잊어버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공…….”

그는 장작더미 어디로 시선을 회피한 채, 몹시 낮은 목소리로 내 말을 가로챘다.

“가만있어. 잠시만.”

나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내 머릿속은 여전히 백지였고,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내게 명령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스르르 손을 놓아주었다.

내가 뒤로 물러나자 그는 조용히 돌아갔다.

나는 찻잔을 치우고 침대에 누웠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내가 무슨 죽을병이 든 것처럼 느껴졌다.

괴로웠다.

늘 당당하다 못해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가 아까 왜 수줍기라도 한 듯 시선을 피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카이런 공작이 파도처럼 다가와 내게 자신의 더운 체온을 선사할 때마다, 내 감정은 매번 파도를 맞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이 영원한 관계를 바꾸려면 거리를 벌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에게서 멀어져야 하는데 나는 이 작은 방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

다음 날 오후에 카이런 공작이 찾아왔을 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저를 언제까지 가둬두실 거죠?”

그는 내 의중을 살피려는 듯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간단히 대답했다.

“평생.”

“하……!”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나는 기가 질린 채 그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제가 뭘 잘못했기에요.”

“넌 하르펠가의 재물을 훔쳤고, 탈옥했다. 또한 허락 없이 영지를 벗어났지. 아무리 게오르그의 딸임을 참작한다고 한들 가중처벌을 피할 수가 없어.”

“대체 사람들은 어째서 이런 공작님을 입 모아 칭송한다는 거죠?”

내 달라진 태도에,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살폈다.

“무슨 속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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