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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93/128)

83화

의사가 그녀를 살릴 방법을 알 수 없다고 했을 때 그는 집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는 북부의 모든 의사를 성으로 들게 했다.

“실력 없는 의사 놈들은 다 죽여버리겠어. 그녀를 살리지 못하는 놈은 살 자격이 없어.”

마치 자신에게 말하듯 그렇게 뇌까렸다.

그때 체이어스는 그 명령을 거두게 하려고 거의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렇다.

그는 종종, 자신이 인내할 수 있는 선을 넘어버리면 폭주하곤 했다.

내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은 그것이 원작 안에 있는 에피소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엑스트라인 내게 주어진 에피소드 같은 것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주인공 주변을 벗어나면 나는 그저 평탄히 지내야 했다.

아니, 나는 이방인이다.

늘 그의 아우라와 미모를 환호하며 즐기는 얼빠. 덕후. 철없는 관객…….

하지만 그동안 카이런 공작은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아리엘사와 이방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면서. 때로 의심하고 시험하면서.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 사이에는 거스를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나는 이제는 그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쩐지, 이제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아리엘사는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죽었어요. 공작님은 헛갈리시는 거예요. 그녀를 잃었다는 걸 인정 못하시는 것뿐이라고요.”

카이런 공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인정 못 하는 건 너다. 아리엘사. 정말 네게는 눈앞의 사실이 보이지 않나?”

“떼쓰지 마세요!”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저한테 도둑 누명을 씌우시다니, 북부의 주인이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그는 나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내가 정의로운 일만 해야 했다면, 나는 루엘라 프라일이 하르펠 성에 도착한 순간에 포박해서 남부로 돌아가는 마차에 태워 보내야 했다. 네 가짜 편지 따위는 내가 쓴 게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었어. 그걸 반박하고 싶다면 레오르트 후작은 군대를 끌고 와야 하는데, 그에게 그럴 배짱이 있는지는 모르겠군.”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반쯤 울음이 섞인 숨소리를 뱉었다.

그의 말대로, 그라면 정면 돌파를 선택할 터였다.

내가 지진 말고도 다른 재앙이 올 거라고 설득하지 않았다면, 그는 루엘라를 즉시 돌려보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인 후작을 마물이나 다름없는 인간이라고 경멸했으니 말이다.

“대신 나는 그 여자가 내민 거짓을 택했다. 편지에 속았다는 거짓, 아버지에게 쫓겨났다는 거짓. 나는 북부를 지키는 자지 정의로운 자가 아니다, 아리엘사.”

“공작님…….”

“아리엘사가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불러줄까? 그러면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는 걸 믿을 텐가?”

그의 입가는 나를 비웃고 있었다. 자신의 또렷한 확신을 애써 외면하며, 심지어 자기 감정으로부터도 달아나려 하기만 하는 나를 우습다는 듯 보는 눈을 하고서.

“새 차를 개발하겠다고 골몰하는 너, 제 정체를 들킬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너, 게오르그가 얄밉고도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는 너,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너.”

그의 목소리는 어느덧 먹먹해져갔다.

“그리고 벽난로에 불이 피워져 있는 걸 보면 해실거리며 그 앞에 주저앉아 손바닥부터 내밀어보는 너…….”

그는 조금 거친 목을 가다듬으며 내게서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 나를 보면서 늘 혼자 무언가를 맹세하는 너. 나는 내가 네 맹세 안에 있는 것이 좋았다. 이방인.”

“…….”

나는 언어를 잃었다.

머릿속도 비었다.

카이런 하르펠이 이토록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자기 속마음을 다 까발리는 사람이었나 놀라고 겁먹었을 뿐이다.

이제는 그를 내 남주라고 부를 자신이 없었다. 그는 그저 카이런 하르펠 공작이었다.

내가 아리엘사라 불리는 이방인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그때 마차가 크게 기울어졌다. 바퀴가 커다란 돌이라도 밟고 넘어간 모양이었다.

“앗!…….”

내가 앞으로 고꾸라지려 하자 카이런 공작이 내 팔을 붙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수갑을 찬 채로 마차 바닥에 그와 마주 누워야 했다.

“공작님.”

다급하게 속삭이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카이런 공작은 나를 조이듯 꽉 안았다. 내가 몸통을 비틀며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그는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이제는 숨을 쉬기도 힘들 것 같아 나는 가만히 견뎠다. 먼 길을 달려와 흙먼지 냄새가 섞인 그의 체향이 코로부터 들어와 머릿속을 채우는 것 같았다.

나는 거의 들리지도 않게 속삭였다.

“제 맹세가 좋았다면, 그걸 지키게 해주세요.”

카이런 공작의 손바닥이 내 뒷머리를, 이번에는 거칠지 않게 꾹 눌렀다.

“내가 뭘.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나는 범죄자를 잡아가서 성탑에 가둘 거다. 내 방 창밖에서 바로 내다볼 수 있게……. 그뿐이야.”

내가 그의 얼굴을 보고 말하려 몸에 힘을 주자 그가 내 머리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닥쳐.”

❄❅❄

그는 마치 지독히 목이 말랐던 사람처럼, 하룻밤 내내 나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 마차에서 내려 말에 올랐다. 마차 문에는 걸쇠가 걸렸다.

예전에 산사태 때문에 동부에 갔을 때 카이런 공작을 호위하는 기사 무리는 떠들썩하게 농담을 주고받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필요한 말 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다시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북부로 돌아가는 내내 카이런 공작은 나를 직접 돌봤다. 먹을 것을 직접 갖다주고 잠자리를 확인했다.

어떤 순간에는 그가 나를 돌봐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를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체이어스가 종종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체이어스의 말을 잘라 쫓아냈다. 타이라 경과 다른 기사들은 지금 주인이 미쳐 있다는 걸 잘 아는 듯 침묵했다.

❄❅❄

하르펠 성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이 깔리는 저녁이었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체이어스는 내게 클록을 입혀주었다. 정말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 덕분에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성탑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클록 속에서 수갑이 약하게 내는 쩔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카이런 공작은 앞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가 내 숨소리까지 주시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성탑 꼭대기 방의 복도가 시작되는 곳에서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

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뒤로 숨었고, 카이런 공작은 그런 나를 팔로 가리며 내 앞을 막아섰다.

성탑 감방문 앞에는 루엘라가 서 있었다.

호화로운 흰 털가죽 케이프를 입은 아름다운 새신부는 복도의 작은 창으로 들어온 비스듬한 석양빛을 받아 더 아름다워 보였다. 설명하기 힘든 그녀의 복잡한 표정은 그녀를 처연하게 보이게 했을 뿐, 아름다움을 덜어내지는 못했다.

“공작님. 무사히 돌아오셨어요?”

루엘라는 그를 향해 절도 있는 동작으로 허리를 숙였다. 남편을 맞이하는 공작 부인의 자태로 손색없었다.

카이런 공작은 그녀를 무시하듯 내 팔을 붙잡고 감옥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나를 자신의 몸으로 가리는 위치로 데려가 루엘라가 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나를 감방 안에 밀어 넣고 문을 걸어 버렸다.

나는 방 중간에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실내는 뜻밖에 훈훈했다. 그사이 넉넉한 크기의 침대와 작은 테이블, 서랍장 따위가 들여져 있었다.

심지어 차 끓일 도구도 마련되어 있었다. 창 아래 내 허브 화분이 놓인 걸 보고 나는 질리는 기분으로 다가갔다.

실내는 심지어 아늑했고, 그 방 안에 없는 것은 자유뿐이었다.

그는 정말로 작정한 것이다.

절망에 젖은 웃음을 짓는데 문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공작님, 이만 저와 방으로 돌아가세요. 돌아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렸답니다.

나는 비틀거리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죄인을 호송해오느라 노고가 크셨으니……. 이만 방으로 돌아가세요, 공작님. 우리는 결혼했잖아요.

나는 카이런 공작의 대답을 들으며 그가 몹시 아름다운, 가면 같은 미소를 띤 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대꾸를 들으며 그가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루엘라, 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줄 필요는 없소. 그러나 당신 말이 옳소. 나는 먼 길을 다녀와서 피곤하오. 피로가 풀릴 동안은 따로 지내겠소. 내 침실은 물론 당신이 써도 됩니다.

세상에……!

결혼식 날 집을 나온 주제에 각방을 쓰자니, 나는 암담하여 눈을 감고 말았다.

루엘라도 감정을 추스르느라 그러는지 잠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저는…….

루엘라는 울컥한 목소리를 한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을 할수록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려갔다.

-헤리어트 오빠가 공작님께 화를 내면 안 된다고 했어요. 주인의 측근일수록 죄는 반드시 엄벌해야만 한다고. 그것은 공작님이 마땅히 하실 일이라고요. 그래서 저도…….

헤리어트는 공작가의 보물을 훔쳐 달아나려 한 범죄자인 나를 중부로 빼돌리는 공범이 될 뻔했다는 사실에 식겁했을 것이다.

그는 새 공작 부인의 친척이니 그가 내 공범이 되었을 때의 부담은 고스란히 루엘라에게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루엘라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쓴 모양이었다.

그러나 점점 떨리는 루엘라의 목소리는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루엘라. 이만 방으로 돌아가시오. 남부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공작 부인이 감방까지 오는 것은 적절치 않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랍니다.

카이런 공작의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한결같이 냉랭했다. 감정이라고는 단 한 점도 없어서, 곧 폭발하여 산산이 뿌려질 것만 같던 루엘라의 감정은 그에게 닿지 못하고 모두 튕겨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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