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나는 그 불편한 시선을 견디며 식사를 끝냈다. 쪼그라들었던 위장이 조금 날뛰다가 겨우 진정하는 것 같았다.
“어서 돌아가셔야…….”
그는 내 말을 자르듯 물었다. 평소와 달리 거친 그의 목소리에서, 나는 그의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나 또한 고통스러웠다.
나는 힘들어하는 그를 보며 사과하지도 못하고, 몸을 가누기도 힘든 내 상황에 화를 내지도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너는, 좋던가?”
나는 단지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나를 떠나니, 좋던가?”
좋았냐니……. 그의 한마디에 내 감정은 금방 정리되어버렸다. 이제는 오직 그가 미웠다.
“공작님…….”
“네 말대로라면 너는 내가 속한 세계를 벗어날 수 없어야 해.”
그는 나를 다시 확인하듯 바라보고는, 설핏 웃었다.
“됐어. 너는 결국 내 손을 떠나지 못했으니까. 너는 황실 놈들 때문에 북쪽 방벽이 뚫렸을 때보다 나를 더 화가 나게 만들었지만, 좋아. 이 정도라면 됐어.”
나는 울컥 말했다.
“공작 부인은요! 새신부를 두고…….”
“네 예언은 다 이뤘다. 문제 있나?”
“대체……!”
나는 그의 싸늘한 대꾸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품에서 천으로 곱게 싼 무엇을 조심스럽게 꺼내더니 내 무릎에 던졌다.
나는 수갑을 쩔렁거리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제는 그가 뭘 준다면 무서웠다. 지난번에도 이렇게 브로치를 선물해놓고 그걸 함정으로 이용했으면서.
하지만 나는 어떤 불평도 떠올리지 못했다. 눈앞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가 던진 천 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누워 들어 있었다. 도톰한 여섯 개의 흰 꽃잎을 가진 작은 꽃은 사막의 꽃이 분명했다.
작열하는 태양에 절대 시들지 않는, 기적 같은 꽃.
원작 속, 그가 사막에서 꺾어 루엘라에게 바친 꽃은 결국 이번에도 그의 손에 꺾였다.
운명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면 원작이라 불려야 하는 걸까.
카이런 공작은 꽃과 나를 번갈아 보며 눈썹을 미묘하게 일그러트렸다.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쓱 눈물을 닦았고, 그 때문에 손등에 묻은 연고를 치마에 쓱쓱 닦아냈다.
“너는 이 꽃에 대해서도 아는 거지? 내게 말한 적이 없지만 말이야. 사막에서 꽃이라니, 어지간히도 부조리하군.”
나는 그를 젖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부조리라니. 지금 미쳐 날뛰는 당신이 할 말은 아니잖아.
그는 몹시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와 눈빛만으로도 그가 어떤 고생을 거쳐 나를 구조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 가슴이 조여드는 듯했다. 나는 분명 사막 한가운데서 정신을 잃었다. 그가 나를 구하러 목숨을 걸고 사막을 가로지르지 않았다면 나를 찾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조금도 고맙지 않고 그가 밉고 화가 났다.
여주인공은 내팽개친 채 나한테 이렇게 잘 해줘서 어쩌자고! 나를 위해 목숨을 걸어서, 그래서 나를 이렇게 아프게 만들어 놓고서…….
더 견디기 힘들어 눈을 질끈 감자 눈물이 뺨을 스치며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냉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물을 뿐이었다.
“설마, 이걸 찾으러 사막으로 달아난 건가?”
나는 깊이 심호흡한 다음 말했다.
“이 꽃을 찾아내셨네요. 이 꽃에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힘이 있으니까 소중히 보관하세요, 공작님.”
내가 천을 곱게 접는데 그가 간단히 말했다.
“됐어. 네가 가져.”
나는 울컥 소리치고 말았다.
“정신 나가셨어요? 이걸 저한테 주면 어떡해요!”
카이런 공작은 내 말투가 마음에 안 들어서인지 눈썹을 씰룩거리며 대답했다.
“내 거니 내 마음대로 한다. 문제 있나?”
“…….”
나는 입을 앙다문 채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오만한 시선은 늘 나를 가볍게 압도했다. 나는 언제나 약자이기만 했다. 그에게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겨우 도망쳤는데, 내가 얼마나 힘들게 결심했는데, 그걸 이렇게 간단히 부숴버리면…….
나는 당신이 내 눈앞에 있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너도 내 거니 내 마음대로 할 거고.”
카이런 공작은 주먹으로 마차 벽을 치며 소리쳤다.
“출발!”
마차는 산길에서 심하게 흔들리며 출발했다.
나는 다시 북부로 끌려갔다. 심지어 카이런 공작은 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며 감시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듣기도 싫다는 듯 방석 하나를 끌고 가더니 머리에 베고 누웠다.
“쪼그만 게 어찌나 빠르던지. 좀 잘 테니 깨우지 마.”
그에게도 사막을 뒤지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제는 그를 미워하기도 지쳐서인지, 나는 그가 안쓰러워 보였다. 그런 내가 한심했지만 나 또한 절망하고 있었다.
모두의 마음 따위, 내 마음 따위,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미쳤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잠든 줄 알았던 카이런 공작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도망가. 잘 참고 있는 사람을 자극해서는…….”
나는 어쩔 수 없이 꽃을 잘 싸서 품에 넣었다. 어쨌든 친정에만 자주 보낸다면 루엘라가 심각한 우울증으로 죽을 위험은 없었으니 이 꽃은 불필요했다.
진짜 위험한 사람은 루엘라가 아니라 나였다.
❄❅❄
나는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카이런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산길을 천천히 내려가는 마차는 심하게 흔들려서 방석이 없었다면 등에 멍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은 태평하게 자고 있었다. 결혼식 날 아내를 내팽개치고 시녀를 붙잡으러 온 남자가 저렇게 편안한 얼굴로 숙면을 취하다니.
그러자 그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언제 깨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매일 보던 얼굴이잖아.”
“공작님이 생각하는 사람은 아리엘사에요. 공작님의 유일한 소꿉친구, 공작님의 성격을 다 받아준 다정한 누나 같은 소녀는 아리엘사였어요. 제가 아니고요.”
그는 나더러 보라는 듯 비웃음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내가 사다리에서 떨어진 것 같은가?”
“아시면 이러지 마세요. 냉철한 공작님답지 않아요.”
카이런 공작은 눈을 떴지만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너, 나를 잘생겼다고 생각하지? 마치 내게서 빛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늘 그렇게 나를 쳐다보잖아.”
“그거야…….”
징그러운 인간. 당신 몸에서 빛이 나오는 게 사실이니까 그렇지!
내가 그동안 그 정도로 허술하게 넋을 놓고 그를 구경한 것인지, 그의 눈치가 징그럽게 빠를 뿐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다 망쳐버렸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미쳤다. 아주 제대로.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쏘아보았다.
“냉철이라……. 그러면 내가 냉철할 때 계속 냉철하도록 내버려 뒀어야지. 힘들었다면, 말을 했으면 해결해줬을 거잖아!”
“공작 부인 때문이 아니었다고요!”
“과연.”
“…….”
그는 빈정거리듯 중얼거렸다. 그가 이럴 때는 정말 꿀밤을 놓아주고 싶게 얄미웠다.
나는 그에게 어떤 말로 내 선택을 설명할지 고민해야 했다.
내가 루엘라 때문에 떠날 결심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질투를 견디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내가 떠난 것은 루엘라에게 그녀의 자리를 온전히 돌려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가진 애착은 루엘라에게 향해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개입하는 바람에 우리 세 사람의 관계는 다 변해버렸기에, 내게 남은 선택지는 그를 떠나는 것밖에 없었다.
카이런 공작은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권력자의 성정이 삐뚤어질 때의 면모는 이런 때에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는 자신의 성정을 제어하려 이성을 활용하지만, 그 제어력이 깨어지는 순간 그는 먹이에 맹렬히 달려드는 짐승 같았다.
그때 그에게 반대 의견을 말하는 자는 그를 적으로 돌려야만 했다.
나는 바보같이 그가 꽉 쥐고 있는 수류탄에서 핀을 뽑아버린 것이다. 성탑에서 달아나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면 나는 계속 그의 곁에서 숨죽인 채 그가 수류탄을 꽉 쥐고 있도록 다독여야 했을까?
하지만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가 이렇게까지 무모해질 것을 예측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원작에서 그가 ‘돌아버리는’ 상황은 마물을 방벽 너머로 완전히 몰아낸 전쟁사에 묘사된 것과 남부에 있을 때뿐이었다.
그가 프라일가에 억류되어 있을 때, 레오르트 후작의 기사 하나가 루엘라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녀 앞에서 카이런 공작에게 북부를 싸잡아 모욕한 적이 있었다.
카이런 공작이 프라일가에 온 이후 후작의 가신과 기사들은 그를 도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북부의 주인을 꺾은 자라는 명성을 쟁취하기를 원했고, 카이런 공작은 그의 가신과 다툼을 벌여 후작에게 약점을 쥐어줄 수 없었다.
말에서 떨어지기나 하고, 루엘라가 그것을 공개적으로 모욕해도 얼굴을 굳힐 뿐 입을 열지 않던 북부의 도망 귀족은, 후작의 가장 강한 기사를 검도 뽑지 않고 쓰러트려 버렸다.
그에게 달려드는 기사를 노려보며, 카이런 공작은 여전히 허리에 손을 올린 채였다. 그리고 몸을 슬쩍 비틀며 한 번의 발길질로 그를 땅에 내동댕이쳐버렸다.
후작의 기사는 배를 안고 땅에 무릎을 꿇었다가 속엣것을 다 게워내고 말았다. 기사 된 자에게 그것은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만한 수치스러운 패배였다.
카이런 공작은 그 광경에 조롱 한마디 던지지 않고 시크하게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때 루엘라는 자신의 인정을 얻으려 분투하지 않는 남자를 처음으로 만나고 말았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루엘라는 처음으로 남자에게 반하고 만다.
그것 말고 그가 광기라고 할 만한 모습을 보인 것은 루엘라 때문이었다.
향수병과 임신 후의 우울증으로 까닭 없이 죽어가는 그녀를 보며, 카이런 공작은 처음으로 뼛속까지 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