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나는 체이어스가 피워준 불가에서 잠을 청했다. 그는 허튼 생각 말라고 단단히 경고하고 잠들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은 채 이 세상에 닥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끔찍한 일들이라 나는 절대 잠들 수 없었다.
깊은 밤이 되었을 때, 나는 조용히 불가에서 물러났다.
“체이어스 경, 돌아가셔도 목 잘리지 않게 선물을 드릴게요. 꽃 한 송이만 꺾어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세요.”
나는 잠든 체이어스를 바라보며 그렇게 속삭이고 사막으로 달렸다.
절벽을 돌아 내려와 차갑고 습한 모래에 발을 담그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 광막한 죽음은 단지 잠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
사막에서 올려다보는 중부 경계가 시작되는 절벽은 거대해 보였다. 저것을 바라보기만 하면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릴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한나절도 가지 않았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는 내 발자국을 금방 삼켜버렸다.
산 능선 같은 모래 언덕에서 뒤로 돌아보았을 때, 사방으로 보이는 것은 또 다른 모래 언덕들뿐이었다.
그리고 하늘 한가운데서 작열하는 태양도.
그사이 내가 또 다른 세계로 내쳐진 것은 아닌가 두려울 정도였다.
[그는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바다에 빠지는 것이 이런 일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의심한 적 없는 사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동경했던 태양을 원망하며, 무거운 다리를 빨아들이려는 모래 위로 떠오르려 쉬지 않고 허우적대야 하는 절망 말이다.
볕에 타서 껍질이 벗겨진 듯한 피부에서는 이제 통증도 희미했다. 공기가 폐 안에서 증발해버리는 듯하여 호흡이 더 갈급했기 때문이다.
하냐크전에서 나를 떠난 기사들은 모두 낮을 구르는 저 태양을 지키고 있었을 터인데.
그들은 태양을 내 머리 위에 내버려 둔 채 모두 어디로 떠나버렸는가. 아니면 나를 배신하였는가…….
카이런 하르펠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절망을 느꼈다.
그는 힘없는 걸음을 헛디뎌 모래 언덕에서 떠밀려 가면서 오직 한 가지를 떠올렸다.
루엘라.
그는 이미 그녀에게 빠져 그가 고집한 삶을 잃었다. 그의 마음은 그녀라는 바다에 삼켜진 지 오래였다.
그러니 이 사막이 저에게서 취할 수 있는 것은 육신뿐이라고, 카이런 하르펠은 모래 늪이 그의 몸을 집어삼키는 순간 생각했다.]
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모래 위를 걸으며 원작의 카이런 공작의 절망을 떠올렸다.
북부의 기사들은 죽으면 태양이 잘 구르도록 지킨다는데, 그 기사들이 자신을 배신하여 태양을 자기 머리 위에만 떨어트려 놓은 것 같다는 그의 절망감을.
북부에서 그렇게 소중하던 태양은 사막에서는 배덕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태양이 내 피부를 다 태우는 것 같다던가, 목이 말라서 눈앞이 흐려진다던가, 모래가 내 발을 자꾸만 빨아들이려 든다던가, 그런 생각은 나지 않았다.
나는 마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처럼, <눈 내리는 사막>의 카이런 공작의 사막 속을 걸었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
문득 서늘한 바람이 스친다는 감각에 초점이 희미한 채로 눈을 떴다.
나는 오아이스의 나무 그늘에 누워 있었다. 머리가 허연 노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허, 네가 왜 여기……. 많은 것이 달라졌군…….”
태양광선이 하얗게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졌다. 그렇게 또 시야갸 흐려졌다.
❄❅❄
깨어났을 때, 나는 하늘을 가린 나무를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활엽수 잎사귀들을 보았을 때 나는 내가 사막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내가 떠나온 중부의 숲이었다.
“나를 이 정도로 화가 나게 한 인간을 살려둔 적은 없었는데.”
마침 바람이 불어 내 머리 위 하늘에서 잎사귀가 흔들렸다. 카이런 공작의 목소리는 그 바람과 함께 불어왔다. 사막에서 바싹 구워져버린 내 심장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뭉그적거리듯 겨우 머리를 들고 있었다.
카이런 공작은 험상궂은 얼굴로 내 머리를 받쳐 일어나게 도와주었다.
눈에서는 아직 살기가 돌고 화를 참느라 숨결이 거칠었지만, 그 손길만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먼발치에서 체이어스가 굳은 얼굴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 또한 그랬다. 그들이 나를 보는 눈에는 전과 같은 장난기는 흔적도 없었다.
체이어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해버렸다. 나는 멍하니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았다.
“…….”
“왜, 죽을 뻔하고 나니 말하는 법도 잊어버렸나? 눈과 얼음의 땅에서 태어난 몸뚱이를 끌고 잘도 사막으로 도망쳤군.”
“공작님은 바다를 보신 적이 있으세요?”
피부가 불쾌하게 간지러웠다. 모래바람에 살짝 익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피부에 눈물이 스치자 느껴진 통증이었다.
카이런 공작은 나를 내려다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우리는 가까워서, 그가 삼키는 아주 옅은 침음이 들렸다.
그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없어. 북부에 바다가 있었다면 그 또한 얼어 있었겠지.”
그 대답은 나는 북부에 종속된 존재다, 그런 의미였다.
그것이 너무나 카이런 하르펠다워서 약간의 웃음과 함께 조금 더 눈물이 났다.
그는 처음으로 도달한 모래의 바다에서 나를 어떻게 구해낸 걸까.
나를 찾아 사막을 헤매며, 그는 원작에서처럼 절망감을 느꼈을까.
카이런 공작은 내 눈물을 닦아주려는지 내 뺨을 쥐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자 화상을 입은 피부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입술을 앙다물며 눈을 꽉 감자 그는 놀라 손을 떼었다.
그때 체이어스가 다가와 연고를 내밀었다.
카이런 공작은 나를 쏘아보느라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팔만 들어 올려 약병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약병을 열어 연고를 찍고는, 그것을 내 얼굴에 찬찬히 발라주었다. 뺨에, 이마에, 턱에.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것을 대하려는, 약간의 두려움과 주저가 깃든 손짓이었다.
두려움도, 주저함도, 카이런 하르펠이라는 남자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나는 내가 열심히 만들었던 들개풀 연고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목이 건조해서 갈라지는 소리가 섞인 웃음소리였다.
나는 마치 그가 나를 괴롭히는 것처럼 눈을 꽉 감고 인상을 썼다. 내 콧등에 연고를 묻힐 때 그는 침음을 내며 눈을 살짝 찌푸렸다.
마치 내 작은 코를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나는 연고로 온통 번들거릴 내 얼굴을 상상하며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눈을 피해야 했다.
연고를 다 바른 그는, 몸을 조금 뒤로 물리고 내 얼굴을 조감하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역시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더 못생겨졌군.”
“…….”
나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앞으로 나는 그의 앞에서 웃어서는 안 되었다.
실제로는 온몸에서 무언가가 습기와 함께 쑥 다 빠져나간 기분이 들어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나를 외면하고 서 있는 체이어스와 불가에 선 타이라 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무거운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그들은 내가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돌보는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눈을 피하자 카이런 공작이 내게 몸을 숙이더니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내 시선 때문에 그도 부하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 같았다.
당황한 나는 그의 옷에 연고를 묻힐까 봐 목을 쭉 뽑았다. 그는 나를 근처에 세워진 황마차 안으로 옮겼다.
마차 안은 텅 비어 있었고 방석이 잔뜩 깔려 있었다. 마치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나는 쌓여 있는 방석에 몸을 기대앉아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왜 그사이 더 잘생겨지고 난리인지.
조금 수척해진 것 같지만.
조금 탄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많이.
“공작님은 어째서 여기…….”
너무 꺼칠한 목소리가 부끄러워서 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내가 사라졌다고 말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나는 그제야 체이어스가 말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내가 달아났다는 말에 침묵한 채로, 카이런 공작은 피로연 예복이 아니라 사냥복으로 갈아입은 것이다. 나를 붙잡으러 달려오기 위해서.
발 빠른 체이어스를 척후병처럼 좀 더 빨리 보냈을 뿐이었다.
그는 나를 비웃듯 말했다.
“내 가문의 보물을 훔친 범죄자를 잡으러 왔다. 왜, 잘못되었나?”
그는 나를 감금하기 위해서 내게 누명을 씌웠다. 자신이 선물한 들소뿔 브로치를 내가 훔친 것으로 만들어서. 그리고 그 구실로 기사들을 데리고 나를 잡으러 온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으나 침묵했고, 그는 나를 향해 승리감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차 벽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무언가를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공…….”
그가 내게 수갑을 채우는 걸 보며, 나는 울지 않으려고 입을 꽉 다물었다. 피부가 다치지 않도록 가죽으로 된 손목 구속구가 짧은 사슬로 연결된 수갑이었다.
그가 무덤덤한 얼굴로 마차 벽을 주먹으로 치자 젊은 기사 하나가 막 퍼 담은 스튜와 빵을 마차 안에 넣어주었다. 그는 난생처음 수갑을 차고 울기 직전인 나를 흘끔 바라보고 사라졌다.
아버지와 함께 일하던 기사들은 이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카이런 공작은 스튜를 떠서 입에 가져가 후후 불었다. 설마 하는 사이 스푼은 내 입으로 들어왔다.
나는 아직 뜨거운 스튜를 꿀꺽 삼킨 다음 급히 말했다.
“제가, 제가 먹을 수 있어요. 괜찮아요, 공작님.”
내가 기겁을 하자 카이런 공작은 멋대로 하라는 듯 물러났다. 그러나 내 곁에 앉아 좀 많다 싶던 빵을 집어서 뜯었다. 여전히 나를 쏘아보듯 하면서.
그것은 우리 둘의 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