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90/128)

80화

말이 지쳤는지 투레질하며 머리를 저어댔다. 나는 말 목을 다독이며 숲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 머리를 돌렸다.

“체이어스 경.”

체이어스는 내가 돌아갈 길목을 막고 서 있었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지만 하르펠가의 다른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징그러운 인간, 대체 언제 쫓아왔는지. 잘만 하면 그를 제치고 달아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때,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따라와.”

❄❅❄

그는 말없이 숲으로 들어가 캠프를 차렸다.

육포를 뜯으며, 그는 나를 물어뜯는 것 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많이 늘었네. 혼자 여행도 하고. 방석도 없이.”

동부 순시에 따라가면서 방석 때문에 놀림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그때는 게오르그도 살아 있었고, 내가 이 세상을 멋대로 주무를 수 있을 줄 알았던 때였다.

“어떻게 찾아내셨어요?”

그는 하르펠가의 기사인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어쭙잖은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공작님은 안녕하세요?”

이 먼 곳에 그와 단둘이 있는 게 어색해서 안부 인사처럼 물었는데 입을 열자마자 실수인 걸 깨달았다.

체이어스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잠시 땅을 노려보았다.

“저를 하르펠로 데려가실 거예요?”

“글쎄.”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체이어스는 나를 당장 끌고 가겠다고 답하지 않았다. 글쎄라니, 무슨 뜻인지.

나는 간절하게 말했다.

“제가 열쇠를 훔친 것도 모르는 척해주셨잖아요. 이번에도 못 본 척해주세요. 전 다시는 북부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는 내가 그것을 눈치챈 것이 뜻밖이라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

그러고 보니 나는 아무 계획이 없었다. 내 유일한 계획은 헤리어트였으니 말이다.

“사막에 들어가서 모래 속에 해골을 파묻는 게 네가 원하는 장례법이었냐? 북부 여자애 주제에 추위가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군.”

나는 몸을 조금 움츠렸다. 오싹한 기분 때문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죽을 수 있구나.

불행히도,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적이 없었다. 나는 빙의자니까.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혹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눈을 들어 체이어스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네가 죽음을 꿈꾸거나 말거나, 나는 관심이 없어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내가 이곳에서 만난 가장 잔인한 사람이었다.

“드세일 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제 부탁을 들어준 거예요.”

“그 자식…….”

체이어스의 얼굴이 갑자기 무서워져서,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감히 널 빼돌리려 하다니. 제 사촌누이가 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그런 거지.”

“그렇긴 한데……. 악의는 없었어요.”

“알아. 너한테 반했던데.”

“네?”

이건 또 무슨 소린지, 나는 농담하지 말라고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모르고, 취해서는 중부에서 너에게 얼마나 잘해줄지 떠들어대더라. 그 프라일가 놈만 아니었다면…….”

체이어스는 자기가 담담하게 말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솔직히는 그의 곁에서 물러앉고 싶을 정도로 사나운 기세였다.

나는 조금 더듬으며 부정했다.

“오해예요. 그럴 리가 없어요.”

“너처럼 사람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여자를 본 적이 없다던데.”

“그런 소리까지 해요?”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눈을 돌렸다.

보아하니 카이런 공작에게 자발적으로 루엘라를 빼앗긴 헤리어트의 헛헛한 마음을 알아준 건 나뿐이었나 보다.

어쩌면 중부로 무사히 갔다면 나는 그와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헛헛한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카이런 공작이 결혼한 시점에는 헤리어트의 역할도 사라지므로, 우리는 스토리의 그늘에서 오붓하게 살아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씁쓸해졌다.

물론 지금은 모두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그때 체이어스가 불쑥 말했다.

“좀 반성했다.”

“네?”

“공작님은 미쳐서 고백하고, 헤리어트는 너에게 집을 구해주고 찻집도 차려주려 했다는데 나는 한 게 없더라.”

“찻집이요?”

믿기 힘든 소리였다. 나는 위약금 재테크를 안 했어도 되었던 모양이다.

루엘라가 그렇게 싫어하는 내게 그 정도 호의라니. 헤리어트는 악당이 아니라 호구였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다시 체이어스에게 집중해야 했다. 꼭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왜요, 저한테 잘해주셨잖아요. 음, 전반적으로는요……?”

“늦었어.”

“…….”

나는 그를 조금 혼란스럽게 바라보았다.

“너무 늦었어. 너는 예정대로 내 아이를 낳았어야 했어. 공작님이 돌아버리시기 전에……. 휴우.”

카이런 공작은 북부를 방문한 황태자가 나를 황궁으로 데려가려 하자 내가 체이어스의 아기를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농담은 아마 영영 나를 따라다닐 모양이었다.

마치 나를 공작에게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 같은 체이어스의 자포자기가 담긴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나한테 고백을 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따지고 보면 나는 체이어스를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부질없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나야말로 카이런 공작의 아우라에 취해서 눈이 가려져 있던 사람이었다. 내 남주를 챙기는 것밖에 관심이 없었다.

냉철한 체이어스는 그런 나를 보았기에 고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결국 누구의 마음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못했던 거다. 괴로울 정도의 허탈함이 나를 휩쌌다.

나 참 나쁜 여자네.

“공작님은 피로연에 참석하지 않으셨다.”

체이어스는 불쑥 카이런 공작에 대해 말했다.

나는 겨우 물을 수 있었다.

“어째서…….”

그는 땅을 쏘아보며 내가 성탑에서 도망친 이후의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

체이어스는 카이런 공작이 하인들을 보내 내 방을 뒤지라고 했을 때, 제 주인이 진짜로 돌아버렸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카이런 공작의 명령은 아리엘사가 절도죄를 자백하여 성탑에 일단 감금했으니, 방을 뒤져서 증거를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결혼식 도중이었다.

내 문 자물쇠가 새것이어서 열쇠를 가진 사람이 없는 탓에 하인들은 내 방문을 뜯어내야 했고, 물론 방에서는 내가 보관하던 들소뿔 브로치가 나왔다.

결혼식 직후, 백성들에게 인사까지 마친 그는 하인에게서 내 ‘범죄’사실을 보고받고 끄덕이며 말했다고 한다.

“게오르그의 딸을 매정하게 대할 수는 없지.”

이미 감금해놓은 주제에 자비로운 척까지 하다니, 징그러운 인간 같으니. 삼권분립이 없는 세계의 불의였다.

그 소동은 결혼식의 떠들썩한 혼란 가운데서도 성내에 삽시간에 퍼졌고, 피로연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온 루엘라는 나타나자마자 화를 냈다고 한다.

“어머나, 우리의 경사스러운 날에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이것 보세요, 제 가운도 그 시녀가 훔쳐 갔던 거예요, 공작님!”

하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계속 씰룩씰룩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고.

체이어스는 그때 카이런 공작이 루엘라를 마물을 보듯 노려보아서 일부러 카이런 공작 앞으로 끼어들었다고 했다.

“공작님, 곧 피로연에 참석하셔야 하니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그리고 체이어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뒤이어 성탑을 경비하던 기사가 달려왔다. 네가 달아나 성탑이 비었다고. 이를 사리물었던 공작님의 표정이 순간 평온해지더군. ‘옷을 갈아입어야겠군.’ 하시면서.”

그 말을 하는 체이어스도 얼굴로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아.”

나는 짧게 말했다. 체이어스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카이런 공작의 눈빛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이는 것 같았다.

“공작님은 더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

체이어스는 먼 산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어두컴컴해진 숲의 나무들 사이로 쏟아부은 것 같은 별이 보였다.

“예쁘네요.”

내가 중얼거리자 체이어스도 나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말씀이 없으셔서 섭섭하니?”

“유부남이 그러시면 안 되죠.”

“…….”

“그런데 체이어스 경은 왜 오셨어요? 공작님이 아무 말씀 없으셨다면서요.”

그는 조금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그분을 하루 이틀 모셨냐?”

“음……. 네가 놓쳤으니까 네가 잡아다 놔라?”

“말해봐. 너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음……. 대답하기 좀 어렵네요.”

“네가 나를 유혹한다면 넘어가 줄게.”

“……우와.”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체이어스에게서 들은 것 중 가장 대단한 농담이었다.

나는 그가 주군을 배신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고, 그는 자신이 주군을 배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가 그런 말이라도 입 밖에 내준 건 엄청난 애정 표현이었다. 나는 솔직히 감동했다.

나는 조금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도 다음에는 주인공이었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나는 좀 더 홀가분하고 몹시 더 기쁜 마음으로 그의 곁에 있을 수 있겠지.

체이어스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털었다.

내가 사막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으로 걸어가자 체이어스가 투덜거리며 따라왔다.

“도망은 꿈도 꾸지 마.”

체이어스는 날 따라와 내 곁에 앉았다. 그리고 나란히 절벽 너머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건 또 못 봤네.”

“하냐크전 때 못 보셨어요?”

“여기 나와서 얼쩡거렸다면 지금 내 시체는 저 아래에서 찾아야 했을걸.”

“아……. 멋지네요.”

“멋지네.”

우리는 별이 흩뿌려진 밤의 사막을 바라보았다.

사막의 모래가 밤에 넘실댈 리는 없을 테지만, 내게는 환한 별하늘 아래 검게 파도치는 바다가 펼쳐진 것처럼 보였다.

사막이 낮에 소리치던 죽음은 온데간데없었다. 조용한 어둠이 사자의 평화는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라고 유혹하는 듯했다.

체이어스가 팔로 내 어깨를 가만히 둘렀다. 나는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우리는 단지 같은 땅에서 자라 같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두 사람처럼 그 밤을 보냈다.

단지 약간의 후회를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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