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88/128)

79화

루엘라와 카이런 공작의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머, 날씨가 너무 좋아요! 내일도 이렇게 좋았으면. 그렇겠죠? 북부의 신들도 우리 결혼식을 축복해주실 거예요.

-이미 그러셨을 겁니다.

카이런 공작의 짧은 대답에 루엘라는 흥분해서 말했다.

-어머, 공작님도! 호호호, 저희 결혼선물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보셨어요? 그건 꼭 결혼식 후에 열어보아야 할까요?

두 사람의 대화가 다시 멀어지고 들리지 않게 된 후, 체이어스는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여기, 성탑이에요? 전에 불났던.”

체이어스는 내 시선을 회피하며 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를 갈 듯 말했다.

“네가 이렇게 만든 거야.”

“…….”

“너를 눈에 보이는 곳에 둬야 한다고 일부러 집무실 창에서 내다보이는 이 성탑에 가두셨다. 내일 결혼식을 올릴 분이야. 공작님은 제정신이 아닌 거라고!”

그게 왜 나 때문이냐고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 대신 울음만 조금 새어 나왔다.

“식탁으로 쓸 만한 것을 넣어주지.”

내가 흐느끼는 동안 그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울다가 지쳐서 잠든 것 같았다. 나는 몸이 오싹한 추위에 깨어났고, 반사적으로 일어나 화로에 장작을 더 넣었다.

나는 벽면 하나를 다 메우리만치 빽빽이 쌓인 잘 쪼갠 장작을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추워할까 봐 걱정한 것 같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위해주는 건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다.

이방인인 내가 아니라 그의 유일한 소꿉친구 아리엘사 로크만이다. 그는 그 감정을 혼동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착각이었다.

체이어스도 그래서 화가 난 것이다. 아리엘사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머리가 이상해진 줄 알았더니, 결국 머리가 이상해지는 전염병을 카이런 공작에 옮기고 말았다고.

먼저 이 성탑에서 나가야 했다. 내가 공주님도 아니고, 성탑에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에서 바로 내다보이는 곳에서 감시를 받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가면?

그다음에는?

나는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체이어스가 나를 감금하라는 이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따른 건, 그에게 설득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였다.

카이런 공작이 이성적인 상태였다면 체이어스가 정색을 하고 첫째, 둘째 붙여 이유를 대면 수긍했을 것이다.

그는 감정을 이성에 앞세우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그가 좋은 영주가 된 이유였다.

자기감정을 버리고 정략결혼을 할 만큼 이성적인, 좋은 영주…….

내 생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

잠 못 이루고 지새워버린 새벽에, 체이어스가 찾아왔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성장을 한 그의 모습을 처음 보는 탓에 나는 잠시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말았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그가 얼마나 멋있는지 진심으로 찬사의 말을 던졌을 텐데.

“아리엘사.”

“절 보내주세요. 체이어스 경도 그래야 한다는 걸 아시잖아요! 조용히 사라질게요.”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서 왔을 뿐이야. 너는 오늘 공식적으로 하르펠의 죄수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공작님의 화를 돋울 행동은 하지 말아.”

너무 말도 안 되는, 뜻밖의 소리였다.

“대체, 무슨 죄목으로요!”

“하르펠가 소유의 희귀한 들소뿔 브로치를 훔친 죄목이다.”

“아니에요! 그건-”

“-알아.”

체이어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더 절망했다.

“공작님께서 너를 이곳에 몰래 숨겨놓을 생각이 없으시다는 뜻이야. 그 정도 물건의 절도죄면 너를 늙어 죽을 때까지도 가둬둘 수 있어. 공작님의 결심이 그 정도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덩달아 프라일 양도 몹시 즐거워했지.”

왜 아니겠는가.

나는 다급히 말했다. 체이어스가 또 언제 찾아올지 몰랐다.

“공작님은 결혼하셨잖아요. 아내가 곁에 있는데 이게 말이 돼요?”

“내가 그 말씀을 안 드렸을 것 같으냐?”

“…….”

나는 절망한 눈을 들어 체이어스를 바라보았다. 멋있는 기사는 참으로 잔인했다.

“자유를 제한하는 것 말고는 최대한 편의를 봐주라고 하셨다. 게오르그 경의 공을 생각해 네 편의를 봐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자도 없을 테니까.”

“체이어스 경!”

그가 돌아서려 해서 나는 그의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체이어스는 몹시 당혹한 얼굴이었지만 나를 밀쳐내지는 않았다.

그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벽에 쌓인 장작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장작은 더 넣어주마…….”

그는 나를 천천히 힘주어 떼어내고 돌아섰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

“체이어스 경, 혹시 오로라 보지 못하셨어요?”

“그 불길한 것은 왜? 없었다.”

“그냥요. 경사를 앞두고 있으니까…….”

나는 두 손을 모아 쥔 채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그의 주머니에서 꺼내 쥔 열쇠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체이어스는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지만 돌아가는 발걸음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내가 그의 품에서 열쇠를 훔쳐낸 것을 알아챘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뚜벅뚜벅, 그의 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그도 결정한 것이다. 내가 사라지는 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열쇠를 꼭 쥐고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체이어스 경.”

❄❅❄

결혼식 축제 인파 사이로 두꺼운 클록의 후드를 뒤집어쓴 채 마구간에서 말을 훔쳐 나올 때, 성내에는 종소리가 마구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결혼식을 마친 카이런 공작과 루엘라는 성의 발코니로 나와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만은 운명의 순간에 나란히 선 두 주인공에게서 뿜어지는 아우라를 바라볼 수 있었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백성들의 환호는 그 종소리를 덮어버릴 만큼 크고 우렁찼다.

나는 그 모든 무서운 소리들을 뒤로하고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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